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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될놈이다-506화 (506/1,826)

§ 나는 될놈이다 506화

앨콧은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태현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걸 본 길드원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앨콧 님! 지금입니다! 지금이 기회예요!”

“…….”

“지금 바로 공격을 꽂아 넣으면 됩니다!”

앨콧이 겁먹었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채, 거리가 가까워진 상황만 보고 외치는 길드원!

확실히 지금 의지만 있으면 기습하기 좋은 상황이긴 했다.

대화를 하느라 오크들은 물러서 있었고, 태현은 가까이 있었으니까.

암살자 직업인 만큼, 폭딜을 한 번 제대로 넣으면 상황을 바꿀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앨콧은 움직일 수 없었다.

판온 1때부터 지독하게 당한 기억 때문이었다.

-푸하핫! 어디서 웬 듣도 보도 못한 대장장이가 던전에 들어와 가지고…… 불쌍하니까 갖고 놀지는 않아주지. 그냥 죽어라…… 컥!? 아니, 여기에 왜 함정이?!

-이 대장장이 자식…… 너 때문에 받은 사망 페널티를 복구하느라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죽어…… 어, 어? 함정은 없었는데? 몸, 몸에 폭탄을 장착하고 있었다고?

-이번에는 반드시…… 으아아악! 여기에 왜 함정이 있는 건데!

-김, 김태현. 난 딱히 너와 싸우려고 온 게 아니라 다른 목적 때문에 온 거니까…… 서로 좋게좋게 넘어가자고. 너도 나하고 싸우면 피해가 클…… 야, 망치 내려! 망치 내리라니까! 폭탄 그만 던져 미친놈아!

-으아아아악 김태현이다!!! 김태현이다!!! 김태현이다!!!!! 아, 아니구나. 그냥 대장장이군. 이 자식…… 죽어라! 어디서 기분 나쁘게 대장장이가 돌아다니는…… 헉, 왜 폭탄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김태현이 판 함정이었냐?!?! 끄아악!

처음에는 만만하게 보고, 그다음에는 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원한을 품었지만, 계속 패배하고 패배하자 앨콧의 생각도 점점 바뀌었다.

‘만나면 죽인다!’

‘만나면 이번에야말로 죽인다!’

‘……만나면 그냥 피해야지. 더러워서 피한다!’

‘……만나면 도망가야 한다! 더 이상 죽으면 진짜 위험하다!’

‘아니, 저 미친 XX는 내가 덤비지도 않았는데 왜 먼저 공격하는 건데 XX!’

앨콧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그가 더 이상 공격할 의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태현은 앨콧만 보면 닥치는 대로 공격을 퍼부었다.

물론 태현 입장에서는 앨콧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 대충 적 같아 보이면 먼저 선공을 갈기고 보는 것이었지만…….

덕분에 앨콧은 태현만 보면 겁에 질리게 되었다.

‘도, 도저히 덤빌 수가 없어……!’

태현이 바로 앞에 있는데 덤빌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뭘 하더라도 태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태현이 판 함정에 지독하게 걸렸던 기억 때문!

“앨콧 님!!!”

길드원의 애달픈 목소리!

“저건 뭐 하는 바보냐?”

태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기습을 하라고 할 거면 귓속말로 말해야지, 급하다고 저렇게 말하면…….

“그래서, 덤빌 거냐?”

“아, 아니.”

“앨콧 님?!?!”

-닥쳐, 좀!!!

-?!

눈치 없는 길드원에게 분노하는 앨콧이었다.

“어, 근데 너 어디서 본 거 같다?”

“기, 기분 탓이겠지.”

“그런가?”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이 뭔가 예전에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이상하다? 예전이면 판온 1인데…….”

“아! 저번에 길드 동맹에서 김태현 잡으라고 불렀었잖아. 그때 다른 랭커들이랑 갔었으니까 봤었겠지!”

필사적으로 과거를 부정하려는 앨콧!

만약 태현이 판온 1 때 일을 떠올리면 대화고 뭐고 그냥 로그아웃을 시킬 것 같았다.

“그랬나?”

“그래, 그래!”

“근데 그렇다는 건 저번에도 나 잡으려고 온 놈이었다는 거잖아? 뭘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거야?”

“아차!”

앨콧은 깨닫고 당황했다. 이건 이거대로 위험했다.

“아, 아니. 그건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얼굴만 내밀었던 거고…… 생각해 봐. 내가 그때 너한테 직접적으로 공격을 넣거나 했냐?”

“사실 거기 모였던 랭커들 기억을 안 하고 있어서…… 기억할 필요가 없는 놈들은 기억 안 하는 성격이거든.”

“…….”

굴욕적이었지만 앨콧은 한 줄기 희망을 발견했다.

“그렇지? 난 원래 평화주의자라고.”

‘미치셨나?’

멀리서 듣던 길드원은 기겁했지만 앨콧의 사납게 부라리는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아까 나를 기습하려던 건 뭐였는데?”

“그, 그건…… 내가 데리고 있던 길드원들이 하도 성질을 내니까 나도 말릴 수가 없었다고. 그놈들 성격이 얼마나 더러운데. 나는 무서워서…….”

“레벨은 네가 더 높지 않나? 랭커라면서.”

“꼭 레벨 높다고 사람을 잘 다룰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없었던 능력도 생겨난다는 말이 있었다.

지금 앨콧이 그랬다.

태현에 대한 두려움과 로그아웃을 피하겠다는 일념으로 깨어난 능력!

최대한 비굴하게 엎드리기!

“제발 봐줘라! 네가 하는 퀘스트도 열심히 도와줄게! 나는 나쁘지 않아! 나쁜 건 나 같은 사람을 억지로 싸우라고 하는 길드 동맹이야! 아까 로그아웃 당한 길드원 놈들이 나쁜 거라고!”

필사의 떠넘기기!

길드원들 대부분이 로그아웃 당한 걸 이용해 책임을 떠넘기는 앨콧이었다.

태현은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괜찮겠지.”

“정말로?!”

“뭐야. 왜 놀라는 거지?”

“아, 아니. 기뻐서 그래!”

태현이 받아주자 못 믿겠다는 듯이 놀라는 앨콧!

-판온 1 때였다면 안 받아주고 그냥 죽이는 게 보통이었을 텐데……?

* * *

“앨콧 님…….”

“닥쳐.”

“아니, 그래도 지금 상황을…….”

“닥치라니까.”

앨콧은 ‘물으면 죽인다’는 표정을 지었다. 길드원은 당황했지만 그 모습에 더 이상 묻지 못했다.

대체 방금 있었던 일은 뭐였지?

‘내가 꿈꾼 건가?’

지금 앨콧과 길드원은 앞장서서 땅굴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는 췩췩거리는 오크들과 태현이 따라가는 상태!

“저, 앨콧 님…….”

“너 내가 한 말 못 들었냐?”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거 보고해야 하지 않나요? 여기 김태현 있다고.”

“네가 해라.”

“네?”

“네가 하라고. 난 하기 싫으니까.”

“……그런! 그런 거군요!”

“……?”

“김태현한테 당했다고 하면 우리 체면도 말이 아니고, 지금 우리와 상관이 없는 다른 길드원들도 몰려와서 문제도 더 커질 테니까! 그거 때문에 숨기는 거군요. 로그아웃 당한 길드원들은 김태현을 상대했다는 걸 모를 테니까 얼버무리기도 쉽고요! 그 마법사는 우리가 알아서 다 처리했다, 앞으로 남은 퀘스트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이렇게 말하면 리스폰 되고 나서 굳이 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요!”

“……바로 그거다.”

앨콧은 놀랐다. 이 길드원이 이렇게 똑똑했단 말인가?

물론 앨콧의 이유는 저런 복잡한 현실적 이유가 아닌, 그냥 두려워서였다.

가슴 속 깊숙이 박힌,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 때문!

“취익, 저 첩자 놈들을 왜 살려둬야 하는지 모르겠다.”

“췩, 마법사 생각은 이해할 수가 없다.”

오크들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태현이 설득하기는 했지만, 이미 앨콧의 정체는 드러난 상태였다.

태현의 설득만 아니었어도 당장 공격했을 것!

“그래……! 저 마법사 놈의 말을 듣지 말라고. 저놈은 너희를 이용해 먹는 거야! 자, 날 풀어주면 내가 주인님에게 돌아가 잘 말해주도록 하지!”

“췩, 마법사. 이 악마가 또 떠든다.”

“패.”

“췩. 알겠다.”

퍽퍽퍽퍽퍽!

오크들은 이런 면에서 좋았다. 일단 패라면 왜 패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패는 단순함!

아까부터 입을 놀려서 탈출하려고 한 악마였지만, 그런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컥, 잘못했습니다!”

“췩. 잘못했다고 하는데?”

“잘못을 알고 있다니 잘됐군. 더 패라.”

“췩. 알겠다!”

퍼퍼퍼퍼퍼퍽!

“앨콧 님.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요?”

“돌아보지 마라. 봐서 좋을 거 없으니까.”

앨콧은 안 들리는 척하려고 애썼다. 뒤를 돌아보면 태현과 마주칠 것 같았다.

틱-

“……?”

[고블린식 침입 경비 장치를 건드렸습니다.]

[장치가 작동됩니다.]

빼애애애애애애앵-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땅굴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아무것도 안 나왔는데?!”

앨콧은 당황했다.

암살자 직업은 도적만큼은 못해도 함정이나 은신을 파악하는 스킬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그게 랭커인 앨콧이라면 어지간한 함정은 다 발견할 수 있을 정도!

그런데도 발견하지 못하다니!

-침입자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땅굴 어딘가에서 고블린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쿠르릉!

“?!”

땅굴 통로 벽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무언가!

그건 대포였다.

-오크 놈들이 잘도 들어왔구나! 죽어라!

“김, 김태현! 어떻게 하면 되지?”

“흠, 설득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무리겠군. 일단 공격을 막아봐.”

“……잠깐, 내가?”

“네가 가장 레벨이 높잖아. 힘내봐. 오크들, 방패 앞으로! 공격에 대비해라!”

“아니, 난 딜러라고!”

“날아오는 포탄을 잘 공격해 봐.”

태현은 그렇게 말하고 앨콧에게 관심을 껐다.

그리고 오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크들은 놀랐지만 착실하게 움직였다. 태현의 스킬 덕분이었다.

[고급 전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부하들이 당황하지 않습니다.]

[<뛰어난 지휘관에 대한 믿음>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부하들의 사기가 올라갑니다.]

[<직감과 행운의 지휘>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가장 알맞은 지휘를 조언받을 수 있습니다.]

-오른쪽 뒤로 물러서서 받아내면 대포의 위력이 줄어듭니다.

“오른쪽 뒤로!”

“췩! 고블린 대포 무섭다!”

-이 오크 놈들! 우리 위치를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가 너희 무덤이 될 것이다.

“야, 야…….”

앨콧은 뒤로 튀려다가 멈칫했다. 태현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한 것이다.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뒤로 오면 죽는다.

“……핫!”

앨콧은 고개를 돌려 앞으로 뛰쳐나갔다. 동시에 대포가 발사됐다.

콰콰쾅!

-고양이의 눈, 전투 기계 발동, 냉혹한 손끝, 혈류 급가속, 암살자의 혼…….

있는 스킬을 닥치는 대로 쏟아붓는 앨콧!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실수하지 않고 스킬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앨콧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의미했다.

물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쾅! 콰콰쾅!

[고블린 대포에 직격당했습니다. 상태 이상 <스턴>에 빠집니다!]

[<혈류 급가속> 스킬로 <스턴> 상태에 저항하는 데 성공합니다.]

[고블린 대포알을 무기로 박살 냈습니다. 무기의 내구도가 크게 하락합니다!]

“억! 컥! 크헉!”

몇 개는 잘라내고 몇 개는 몸으로 맞아내고, 앨콧은 재빨리 포션을 따서 입에 부었다.

앨콧이 앞에서 시선을 끌어준 덕분에 뒤의 오크들은 비교적 편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쿵! 쿠쿵!

“췩, 마법사. 마법으로 대포 막아주면 안 되나?”

“하하, 그럴 수 있지만 그러면 너희의 방패 스킬이 늘지 않잖아? 다 해봐야 느는 거지.”

“췩, 그렇군!”

[오크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합니다.]

물론 못 하는 것이었지만, 오크들은 순진하게 태현의 말을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

슈우우-

포격이 멈추고, 잠시 땅굴 통로 안이 조용해졌다.

-다시 준비! 다시 준비해!

높고 갈라진 고블린들의 목소리! 앨콧은 놀라서 외쳤다.

“김태현! 이건 진짜 위험해! 진짜 위험하다고! 방법 있는 거 맞겠지?”

“고블린! 대화를 하러 왔다!”

“……설마 그게 방법이냐?”

앨콧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숨어서 대포를 쏴대는 고블린들이 저 말 하나 듣고 멈출 리가…….

‘김태현도 이제 맛이 갔나?’

-……화약 냄새가 진하게 나는 인간이군! 뭐냐! 뭔 말을 하려고 온 거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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