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500화
이다비와 태현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도 모르는 채, 장쓰안은 스스로를 점검했다.
‘활력의 눈 스킬 쓰고, 또 기습당할 수는 없으니까 그림자 경계 스킬도 쓰고…….’
각종 버프 스킬을 사용할 정도로 기합이 확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왜 여기에 오크들이 있지? 여기 안전한 마을이라고 하지 않았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태현은 뒤를 훑어보았다. 원래 있던 마을의 흔적이 보였다.
“아무도 없군. 마을 사람들은 싹 사라졌고.”
[고급 전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상황을 읽는 데 보너스를 받습니다.]
순간 태현 앞에 흑백의 장면들이 떠올라서 지나가기 시작했다.
전술 스킬을 갖고 있으면 이런 흔적이나 폐허 상황을 보고서 있었던 일들을 엿볼 수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
‘애초에 전술 스킬은 화술 스킬보다 써먹기 애매한 스킬이긴 한데…… 뭐, 이렇게라도 쓰니 다행이군.’
대형 길드의 간부면 모를까, 태현처럼 적은 인원으로 주로 플레이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쓸 일이 적은 스킬!
-이 주변에 오크들이 늘어났다고?
-네. 위험할 거 같아요.
-어쩔 수 없군. 여기서 떠나는 수밖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고.
-왜 하필 대족장 카라그가 깨어나서…… 부상이 심각해서 죽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마을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마을을 떠나는 장면!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과거 장면은 끝났다.
“…….”
“왜 그러세요?”
“……대족장 카라그가 깨어났다는데?”
“…….”
자리에 있던 모두가 표정이 변했다. 그중 몇몇은 특히 얼굴이 굳었다.
대족장 카라그.
우르크 지역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오크 부족들을 이끄는 대족장 오크.
예전에 카라그의 아들을 케인이 쓰러뜨린 것 때문에(사실 태현 때문이지만), 오크들이 대공세를 펼치는 대륙 퀘스트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막아내고, 태현이 간신히 함정에 빠뜨려 부상을 입혀 퀘스트를 끝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벌써 깨어났다고?
“카라그 그놈 <불의 마수의 숨결>로 자폭해서 데미지 입히지 않았나? 그런데도 깨어났다니. 하여튼 사디크 놈 도움이 안 되는군. 그거 불량품 아냐?”
허락도 안 받고 뺏어온 주제에 뻔뻔하게 불평하는 태현이었다.
-주, 주인님. 그래도 사디크 님의 힘은 진짜입니다.
-시끄러. 오크 하나 못 잡는 놈이 무슨.
카라그가 깨어났다는 말에 케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야, 야. 그러면 엄청 위험한 거 아냐? 저번에도 그 난리를 쳤는데…….”
“그러게. 케인이 위험하겠네.”
“맞아요. 케인 씨가 위험하겠네요.”
마치 남 일처럼 이야기하는 분위기! 태현과 이다비가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오 그런가? 정말 케인만 위험한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내가 위험한 건 너 때문이잖아!! 그리고 모르는 척하지 마! 너도 똑같이 위험하다고!”
케인은 태현을 가리키며 외쳤다.
카라그가 머리가 달린 이상, 눈앞에서 <불의 마수의 숨결>을 터뜨렸는데 태현한테 원한을 품지 않을 리 없었다.
“에이, 그래도 난 죽이지도 않았다. 그에 비해 넌 직접 아들을 죽였잖아.”
“네가 한 거잖아!”
케인이 항의했지만 태현은 가볍게 무시했다.
“어쨌든 카라그가 깨어났다면 골치 좀 아프겠는데요?”
“그러게. 안 그래도 우르크 지역은 위험한 몬스터 많아서 퀘스트 깨기 힘든 곳인데…….”
처음에는 몬스터들만 피해서 돌아다니며 아키서스 전도 퀘스트를 깨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계획이 달라졌다.
“음…… 일단 안 들키고 돌아다니면서 상황을 좀 더 봐야 하나…….”
만약 태현 일행이 우르크 지역에서 돌아다닌다는 걸 알게 된다면 오크들이 좋게 반응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무조건 죽이려고 하겠지!
-취익, 왜 그놈들은 안 돌아오는 거지? 따끔하게 혼을 내야겠군.
-췩! 맞는 말씀이십니다.
“……?”
멀리서 들려오는 오크들의 대화 소리. 다른 오크들이 안 돌아오자 동료 오크들이 찾으러 온 게 분명했다.
일행은 재빨리 몸을 숨겼다.
“야, 오크 시체…… 는 사라졌을 테고, 아이템은? 잡템 남아 있으면 들킬 텐데?”
지능 있는 NPC는 흔적을 보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고렙 이상의 플레이어들.
흔히 볼 수 있는 오크 전사를 잡고 나오는 잡템까지 챙기는 사람은 없었다.
“……제가 챙겼는데요……!”
이다비 빼고.
이다비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잘했어! 덕분에 안 들키고 그냥 보낼 수 있겠네.”
“잡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음…… 그래도 오크 파티 두 개가 사라지는 것보다는 파티 하나 사라지는 게 좀 덜 들키지 않을까 싶어서. 오크들이 얼마나 똑똑한지는 모르겠는데…….”
파아앗!
그 순간 숨어 있던 일행 중 한 명이 잽싸게 뛰어나왔다.
그리고 오크들을 향해 맹렬하게 돌격했다.
“……?”
“??”
“이번에는 다르다!”
“뭔…….”
태현이 ‘뭔’이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장쓰안은 달려들어서 오크들에게 선빵을 넣었다.
-취이익! 인간! 인간 있다! 기습이 커헉!
“보고 있냐 김태현! 이게 원래 내 실력이다! 아까는 방심해서 그렇지!”
“…….”
“…….”
“지금 죽일까?”
* * *
“……그런 이유로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네가 산통을 깬 거다. 알겠냐?”
“그, 그렇지만 그냥 다 잡는 것도 방법 중 하나일 텐…….”
“아. 시끄러.”
“…….”
장쓰안은 입을 다물었다. 태현의 분위기가 반박할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 완성.”
“……?”
“이 팻말을 목에 걸고 다녀라.”
<다시는 함부로 선빵을 치지 않겠습니다>라고 쓰여 있는 팻말!
솜씨 좋게 만든 아이템이었지만 장쓰안은 질색했다.
“이게 무슨 아이템이냐!”
“쓸래? 갈래?”
“가다니, 어디를?”
“어디긴 어디야. 파티 밖이지.”
“……쓰겠다…….”
“그래. 앞으로 행동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 거 잊지 말고.”
* * *
“그래. 제대로 봤군. 대족장 카라그가 깨어났다는 소문은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해.”
“그럴 수가!”
일행이 다음으로 도착한 마을은 다행히 멀쩡히 남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두렵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문을 들어보니 웬 수상쩍은 마법사가 오크들에게 찾아갔다는 모양이야. 원래라면 오크들도 외부인은 다 거절하는 놈들인데, 워낙 대족장 카라그가 오랫동안 깨어나질 못했으니 그런 수를 쓴 것 같아.”
“마법사?”
어떤 마법사인지는 몰라도 카라그를 깨어나게 했다는 점에서 별로 좋은 마법사 같지는 않았다.
“좋은 놈 같지는 않은데…… 혹시 사디크 쪽 놈은 아니겠지?”
일단 수상하면 사디크부터 의심하고 보는 태현!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거 같아.”
“왜?”
“……주요 NPC들을 네가 다 박살 냈잖아…….”
“그렇긴 하네.”
태현도 납득할 만한 깔끔한 이유!
어쨌든 태현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아키서스 퀘스트가 뜬 것도 카라그가 깨어난 것 때문에 뜬 것 같은데…… 이 두 개가 따로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카라그가 깨어났다는 건 오크들이 이제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우르크 지역의 다른 세력들은 힘들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다면 어떡한다?’
대형 길드라면 잔뜩 인원을 데리고 와서 오크 부족들과 맞붙든가 영역을 늘리든가 했겠지만, 그건 태현의 방식이 아니었다.
“……오크 부족으로 잠입해 봐야겠다.”
“네??”
“그건 좀 위험할 것 같습니다.”
“맞아, 그건 좀 아닌 거 같다. 네가 아무리 변장을 잘해도 그렇지 오크로 변장은 무리라고.”
태현의 말에 다들 놀랐다.
태현이 다른 사람으로 위장하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것으로 유명하긴 했지만, 다른 종족들의 진영에 숨어들어 가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아. 혹시 오크로 변신할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변신 포션 있어?”
“아니. 그리고 애초에 오크인 척하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면 뭐로 들어가려고?”
“수상쩍은 마법사가 들어가서 카라그를 깨웠다면서? 나도 못 할 게 뭐가 있겠어?”
“……설마…….”
“나도 충분히 수상쩍은 마법사가 될 수 있겠지. 가서 나도 능력 있으니까 들여보내달라고 할 거야.”
-주인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실 겁니다!
태현과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듣던 장쓰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 이해가 가지 않는 방식의 회의였던 것이다.
“……뭔 퀘스트를 저렇게 깨지?”
“뭐가?”
“퀘스트를 깨려면 일단 길드원들을 부르거나, 그도 안 되면 글을 올려서 파티를 모집해서…… 그렇게 해야 하지 않나?”
퀘스트를 깨는 정석을 전혀 따르지 않는 태현!
그 모습은 장쓰안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뭐 김태현이야 원래 저렇게 깨 왔으니까 그렇지.”
“저랬다가 실패하면?”
“실패하면 좋은 거지. 김태현이 로그아웃 당하는 거 솔직히 좀 보고 싶…… 헉. 잠깐만! 그러면 나한테도 페널티 들어오잖아!”
케인은 그제야 직업 특성을 깨닫고 경악했다.
“야, 김태현! 안 돼! 다시 생각해 보자!”
그러나 이미 태현은 작업에 들어간 상태였다.
에랑스 왕국 마탑에서의 경험은 태현을 성장시켰다.
……딱히 마법 스킬이 성장한 건 아니고 강력한 마법사인 척하는 스킬이!
검은색 로브에, 얼굴도 뒤덮고 지팡이 하나만 들고 있는 태현의 모습은 그럴듯한 사악한 마법사였다.
‘나 뭔가 꾸미고 있는 마법사’라고 전신에서 외치고 있는 것 같은 겉모습!
“이대로 오크들한테 가서 한 번 접촉해 봐야지.”
“거절할 수도 있어요.”
“뭐, 거절당하면 돌아오고, 공격하면 도망치면 되지.”
태현은 자신만만했다.
이 방법의 좋은 점은 실패했을 때 위험성이 적다는 것이었다.
태현의 얼굴이 후작의 가면 아이템으로 바뀐 이상, 오크들이 태현의 정체를 알아볼 리는 없었으니까.
만약 마법사인 척하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거절당한다면?
그냥 돌아 나오면 됐다.
공격당한다면?
적당히 피하고 도망치면 됐다. 태현이 누군지는 모를 테니 엄청나게 쫓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즉석에서 생각해낸 것치고는 확실한 방법이야.’
태현은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태현은 한 가지 경우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 방법이 엄청나게 성공했을 경우!
* * *
쑤닝은 정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오단 성 공방전.
이 공방전 이후로 길드 동맹 내에서는 세력이 나뉘어 ‘네가 잘못했다’, ‘아니다 네가 잘못했다’로 치열하게 다퉜다.
아무래도 직접 지휘한 사람들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쑤닝처럼 뒤에 물러나 있던 사람들은 발언권이 세졌다.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그랬냐! 김태현 얕보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 나 비웃던 놈이 그러니까 아주 꼴 보기 좋다!
쑤닝은 기회를 타 점점 그의 파벌을 불려 나갔다.
포섭하거나, 쫓아내거나…….
상대하는 길드원이 만만치 않을 때면, 쑤닝은 김태현을 떠올렸다.
‘그놈에 비하면 별거 아니다!’
이제 어지간한 놈은 애송이로 보일 뿐!
그러던 쑤닝의 귀에 한 가지 소식이 들려왔다.
“쑤닝 님. 쑤닝 님. 이거 보셨습니까?”
“뭔데?”
“되게 웃기네요. 장쓰안이 망신당하는 영상입니다. 자식, 멋있는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이번 주의 가장 웃긴 판온 순간들>이라는 인기 영상이었다.
쑤닝은 엄격하고 진지하고 근엄한 태도로 동영상을 확인했다.
그는 요즘 길드 동맹 내에서 카리스마적인 분위기를 굳혀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풉!”
그러나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웃음!
“웃기죠?”
“나, 나는 안 웃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