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88화
케인이 그렇게 말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케인을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흑흑이가 ‘저러니까 당하지’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이다비도 비슷한 눈빛으로…….
그 눈빛에 케인은 흠칫했다.
‘잠깐,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쟤는 저러면 안 되지!’
케인은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이다비도 같이 튀었다는 것을!
“야! 이 치사한……! 너만 같이 튀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이 사기꾼들!”
“그러고 보니 케인 씨, 이번에 게시판 1~3위 다 차지하셨더라고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헉, 나 또 사고 쳤나? 아닌데? 나 사고 친 거 없는데?”
케인은 갑자기 불안해했다.
최근 케인이 그렇게 많은 주목을 받았던 건, 대회에서 망신을 당했을 때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 활약으로 차지한 건데요.”
“뭐?! 진짜??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혹시 너희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조회수를 조작했다거나…….”
잘 해놓고서도 겁먹은 케인을 보자 태현도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저희가 조작을 하기는 하지만 저렇게까지 조작은 못 하죠!”
‘하기는 한다는 거군.’
이다비의 말을 들은 태현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게시판을 본 케인은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헤헤, 으헤헤…….”
“그냥 웃어라.”
“웃, 웃긴 누가 웃어?”
말은 그렇게 해도 케인의 얼굴에는 흐뭇함이 가득해 보였다.
이상한 이미지로 유명해졌으면 유명해졌지, 멀쩡한 이미지로 유명해졌던 경우가 적은 케인이었다.
혼자 이렇게 활약한 게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다니!
“그러고 보니 케인 씨, 케인 씨는 아직도 프로게이머 제안 안 들어왔나요?”
“어…… 그러게.”
“케인 씨 정도 되는 선수라서 다들 눈치 보는 걸 수도 있겠네요. 어느 정도 제안을 해야 할지 다들 모를 테니…….”
“그, 그런가? 그런 거면 좋겠다!”
이다비의 희망찬 말에 케인의 기분은 바로 좋아졌다.
흑흑이는 그걸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까 품었던 증오와 분노는 어디로 갖다 버렸단 말인가!
-주인님. 아무리 그래도 위대한 블랙 드래곤의 핏줄인 저를 버리고 가신 것은 사디크도 분노할…….
-시끄러. 구해줬으면 됐지. 네 선배인 용용이는 지금 영지에서 토끼 잡고 있다. 너도 가서 토끼 잡을래?
-아, 아닙니다.
나름 블랙 드래곤답게 폼을 잡고 진지하게 항의하려고 한 흑흑이었지만 태현은 가차 없었다.
구해주고 레벨 업 시켜줬으면 됐지!
그러는 사이 에반젤린이 다가왔다.
“……어쨌든 난 빚 다 갚은 거다! 이제 진짜 남은 빚 없는 거다!”
“물론이지. 내가 양심이 있지, 설마 여기서 더 부탁하겠어?”
“…….”
에반젤린은 못 믿겠다는 눈빛으로 태현을 노려보았지만, 태현은 뻔뻔했다.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수군거렸다.
‘양심이 없지 않나?’
‘그런 거추장스러운 건 안 들고 다니신다고 들었는데…….’
“진짜 진짜 간다? 또 불러내거나 하기 없기다?”
“아, 가라니까.”
태현은 손까지 흔들면서 에반젤린에게 가라고 말했다. 에반젤린은 투덜거리면서 떠났다.
그걸 본 이다비가 속삭였다.
“말만 잘 하면 더 부려먹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었겠지.”
‘뭐라는 거야 이것들은…….’
좋아하던 케인은 멈칫하고서 둘을 쳐다보았다. 태연한 얼굴로 흉흉한 대화를 나누는 둘!
“그렇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나중에 알아서 도와달라고 올 거야. 길드 동맹한테 얼굴 제대로 찍혔을 테니까.”
이런 개망신을 당했는데 길드 동맹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특히 에반젤린처럼 눈에 띄는 랭커는 더더욱 기억에 깊숙이 남았을 것이다.
태현을 당장 못 친다면 에반젤린한테 암살자를 보낼 게 분명!
“아……! 그런 깊고 사악한 속셈이!”
“후후후!”
“하하하!”
“…….”
케인은 슬슬 거리를 벌렸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취급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자. 바하 씨. 여기 주사위 받으시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고생은 태현 씨가 다 하셨는데!”
원하던 아이템을 받은 바하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바허와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대형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만족!
차례대로 이번 일에서 고생한 플레이어들은 칭찬해 주던 태현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 왜 흑마법사들은 안 나오냐?”
“…….”
“…….”
오단 성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서로 시선을 피했다. 태현은 케인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내, 내 잘못 아냐!”
* * *
“저, 흑마법사 여러분들. 지금 협상 맺어서 나가도 된다는데요.”
케인의 태도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리치로 변한 체세도가 솔직히 많이 무서웠다.
“뭐지? 후퇴하란 소리인가?”
“어…… 대충 그렇지 않겠습니까?”
“후퇴는 없다!”
“……네?”
케인은 귀를 의심했다.
“흑마법의 명예! 에랑스 왕국 마탑의 명예! 김태현 백작의 명예!”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건 없는데…….”
“우리는 이 성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물러나야 할 건 저놈들이다! 약한 소리 하지 말고 썩 싸울 준비나 하도록!”
“힉!”
꽈르릉!
체세도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려치자 시커먼 벼락이 줄줄 내리쳤다.
당장 물러서지 않으면 케인도 공격할 것 같은 분위기!
* * *
“……그래서 두고 나왔다고?”
“아, 나보고 어떡하라고! 난 최선을 다했어!”
아직 길드 동맹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멀리서 ‘김태현 머리 위로 드래곤 브레스나 떨어졌으면 좋겠다’ 하고 노려보고만 있을 뿐!
태현은 그들을 한 번 쳐다보고, 오단 성을 한 번 쳐다보았다.
처음 왔을 때 보였던 평화롭고 아름다운 성의 모습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지금 성은 무슨 악마의 본거지처럼 시커멓고 어두운 기운을 풍겨내고 있었다.
리치가 된 체세도가 온갖 스킬로 강화시켰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음…… 그럼 뭐 두고 가자.”
“?!??!!?”
“에랑스 왕국 마탑의 공적치 포인트가 엄청나게 깎이긴 하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
어차피 직업이 마법사도 아닌 이상 그 정도는 참을 만했다.
태현은 쿨하게 결정했다.
리치랑 흑마법사들은 두고 가기로!
그 결정에 다른 사람들이 더 당황했다.
“정말로 두고 가도 괜찮나요?”
“가자는데 싫다잖아. 괜히 말 붙였다가 공격받을라.”
태현이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리치는 결국 몬스터.
지금은 체세도가 태현의 편을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맛이 가서 태현을 공격할지도 몰랐다.
리치 정도 되는 보스 몬스터가 태현의 영지에서 난동을 일으키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태현의 입장도 있었다.
나름 아키서스 교단 교황 아닌가!
교단 교황으로 리치를 영지에 데리고 있는 게 들킨다면, 안 그래도 미묘한 다른 교단과의 사이가 치명적으로 나빠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버리고 가는 게 최선!
마치 얄미운 놈의 땅에 불법 쓰레기를 투척하고 가는 것 같은 방법!
“정, 정말 두고 가냐?”
“그럼 같이 싸우던가. 난 간다!”
태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토바이를 꺼냈다. 길드 동맹이 상황을 깨닫고 항의하기 전에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야, 야! 나도 간다!”
“저도요!”
후다닥!
다른 플레이어들도 깨달았다. 여기 혼자 남아 있으면 덤터기를 쓴다는 것을!
우르르 빠져나가는 태현 일행을 보며 길드 동맹의 수뇌부들은 중얼거렸다.
“결국 놓쳤군. 빌어먹을 놈들.”
“그나마 수도를 지킨 게 다행이지. 거기까지 터졌어봐.”
지금 길드 동맹은 부서진 아레네 시의 건물들을 수리하고, 시계탑 안을 수색하느라 바빴다.
-안에서 폭탄 하나 더 발견했습니다!
-또? 아오, 이 김태현 사악한 자식이…… 샅샅이 뒤져! 그나마 지금 찾아서 다행이군.
시계탑 안에는 뒤질 때마다 폭탄이 나왔다. 다행히 시간이 부족해서 제대로 숨겨놓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폭탄이 발견되자 길드 동맹은 오히려 안심했다. 발견 안 됐다면 더 수상했을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봤자 우리가 망신당한 건 사실이잖아?”
“그렇긴 하지. 이 인원을 데리고 저거 하나 못 뚫어서 그 난리를 쳤으니…….”
갑자기 공성전이 끝나고 태현 일행이 무사히 빠져나가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된 일인지 추측하고 있었다.
-뭐임? 도대체 뭐임?
-왜 갑자기 포위망을 풀지?
-설마 오단 성을 공략할 자신이 없어서 저러는 건가?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다 포위했는데…… 참가한 인원도 인원인데. 설마 자신이 없어서 저랬겠어?
-그러면 왜 저러는데?
-너무 손해가 커서 그러는 거 아닌가? 적당히 타협하고 끝내려는 거 보니까 그런 것 같은데.
-와, 피해를 얼마나 입었으면…….
-계속 공격했는데 끝까지 못 뚫은 거 보니 상당히 심했나봐?
다들 말하는 것만 보면 마치 태현이 이긴 분위기였다.
“이거 하자고 책임진 놈들은 속 좀 쓰리겠어.”
“그렇겠지? 맞아. 쑤닝한테 연락 왔는데, 자기랑 손잡을 생각 없냐고 하더라고.”
“그래서? 잡게?”
“쑤닝 정도면 괜찮지. 조건도 좋고, 그리고 가만히 있으면 괜히 이번 공성전 책임 뒤집어쓸 수도 있으니까. 너도 미리 줄 잘 서는 게 좋을 거다.”
“흠…….”
결과를 보고 안심한 쑤닝은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 패배를 이용해 경쟁자들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잠깐, 왜 김태현 패거리는 꺼졌는데 언데드들은 그대로지?”
“……그러게???”
-야, 김태현! 어떻게 된 거냐! 왜 언데드들이 그대로 있어!
-무슨 소리야? 난 약속한 대로 했는데. ‘길드 동맹은 오단 성에 있는 태현 일행을 무사히 내보내 준다’가 약속이었잖아? 그래서 무사히 나갔고.
-언데드들도 데리고 나가야지!
-아, 걔네 내 일행 아니야. 나가기 싫다고 해서 갈라졌지.
-…….
-그리고 자꾸 잡상인들이 귓속말하는 게 귀찮으니까 이제 이건 차단할 거야. 귀찮게 연락하지 마.
-야! 야!!!
[현재 플레이어는 귓속말을 받을 수 없는…….]
“…….”
“…….”
길드 동맹 수뇌부들은 황당한 눈빛으로 오단 성을 쳐다보았다.
당연히 평화 협상을 맺었으니 오단 성도 알아서 손에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걸 다시 공격해야 한다고?
“……어쩌지?”
“일단 길드 내에 공지 올려봐.”
언데드가 우글거리는 리치의 성.
안 그래도 죽은 플레이어들이 많아서 언데드 숫자가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진 않았다.
게다가 태현도 없는데, 실패한 공성전으로 인해 잔뜩 피로해진 길드원들이 다시 공성전에 나서겠다고 할 리 없었다.
-난 빠진다. 할 만큼 했어.
-김태현도 없는데 저걸 뭐 하러 공략해?
-랭커들끼리 해보든가. 지금 파티원 중에 나만 살았다. 난 빠짐.
-지금 저기 성기사들 빌려오느라 신전에서 공적치 포인트를 얼마나 썼는지 알아? 여기서 더 빌리기도 힘들어! 나도 빠진다.
순식간에 와해되는 공성전 파티들.
그걸 보면서 수뇌부들은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괜히 억지로 시킨다고 해서 될 분위기가 아니었다.
“일단 저 성은 내버려 두자고. 저 리치 놈이 먼저 기어 나오면 그때 생각하고.”
불완전한 대책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일단 그렇게 결정 내리고 자리를 파했다.
* * *
태현과 길드 동맹이 그렇게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도, 판온의 다른 플레이어들은 각자 알아서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장쓰안이었다.
“그 <차가운 울음의 검>을 갖고 있다는 플레이어, 여기서 만나기로 한 거 맞겠지?”
“예. 맞습니다.”
“한국인은 싫은데, 후, 어쩔 수 없나.”
장쓰안은 머리칼을 옆으로 털어내며 넘겼다. 멋진 동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