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87화
어찌 되었든 태현이 허락을 해줬으니, 우드스탁 길마는 둘의 귓속말을 연결시켜 주었다.
길드 동맹의 협상을 맡은 사람은 랭커, 마이크였다.
-김태현. 케인이 잡혔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어.
마이크의 속은 복잡했다.
현재 공성전에 참가한 길드 동맹 측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잘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이만큼 인원과 자원을 동원했는데도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한다면?
참가한 플레이어들이 책임을 져야 했다.
게다가 아무 결과도 얻지 못했는데, 거기서 추가로 태현한테 역습이라도 당한다면?
‘그건 정말 위험해!’
마이크는 갑자기 쑤닝이 떠올랐다. 비웃듯이 ‘그래, 너희가 한번 해봐라’라고 말했던 쑤닝.
그때는 ‘어휴, 패배자 XX가 입은 살아가지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쑤닝이 갑자기 거대하게 느껴졌다.
‘쑤닝, 너는 이걸 알았던 거냐……!’
후회해 봤자 늦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마이크가 노리는 것은 하나. 포로로 잡은 케인과 성 안에 남은 플레이어들을 이용해 태현을 얌전히 물러서게 만드는 것이었다.
원래 원하는 것과는 엄청나게 거리가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케인이 잡혔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들었겠지. 케인이 말했을 테니까.
-……물, 물론 그렇지.
태현이 말을 더듬었지만 마이크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제안을 할지도 이미 알고 있겠군.
-모르겠는데? 무슨 제안이지?
-케인을 풀어줄 테니, 아레네 시에 설치한 폭탄을 치우고 얌전히 꺼져라.
협상의 기본은 약점을 보여주지 않는 것.
마이크는 초조했지만 강한 척을 했다. 아직 겉으로만 보면 유리한 건 마이크였다.
리치가 됐다고 하지만 오단 성은 여전히 포위되어 있었고, 태현도 빨리 빠져나가지 않으면 포위당할 테니까.
-어? 이런. 내 주변이 시끄러워서 잘 못 들었는데, 네 조건이 케인을 풀어줄 테니까 폭탄을 치우라는 거 맞지?
-그래! 잠깐만, 왜 주변이 시끄럽지?
마이크는 당황했다.
지금 태현 일행은 혼자 탑을 점령하고 있는 상태일 텐데?
그 대답은 태현 대신 다른 길드원들이 했다.
“마이크 님! 아레네 시의 마법 포탈이 폭발했습니다!!!”
“뭐?!?!”
“지금 그쪽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당황해하고 있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김태현이…….”
“일단 조용히 시켜! 동영상 같은 거 올리지 말게 하고! 빠르게 수리 들어가고, 사고였다고 해!”
마이크는 다급하게 대응했다.
현재 태현이 아레네 시로 들어가서 깽판을 치고 있다는 건 몇몇 길드원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이 사실이 밖으로 퍼져 나가면 정말로 개망신!
어떻게든 숨겨야 했다.
지금 소란이 일어난 건 탑하고 마법 포탈 정도밖에 없으니 어떻게 잘 수습하면…….
“크하하! 멍청한 놈들! 김태현 그 자식이 날 구하겠다고 그런 불리한 교환을 하겠냐!”
<포로> 상태에 빠진 케인이 마이크를 비웃었다.
“허세 부리지 마! 김태현이 너하고 친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아무리 김태현이 허세를 부려도 무시할 수는 없을걸!”
“아니라니까, 이 멍청한 놈들아!!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포로로 잡힌 케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야, 나 잡아봤자 아무 의미 없으니까 그냥 로그아웃 시켜줘라.
진심이 담긴 조언!
그러나 길드 동맹은 케인의 말을 오해해서 들었다.
‘저놈이 김태현한테 방해가 안 되려고 그러는구나!’
‘과연 듣던 대로 강철 같은 우정이군.’
“흥. 케인 놈 말 무시해. 저놈은 김태현한테 명령받고 저러는 거야.”
“아오, 이 XXXXXXXXXXXXX들이…… 읍읍! 읍읍읍!”
케인은 짜증이 나서 장문의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길드 동맹이 급히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아무리 허세 부려봤자 김태현도 한계가 있을…….”
“마이크 님! 아레네 시의 <날아다니는 탈 것 마구간>도 폭발했습니다!}”
“아니, 김태현 이 미친놈이 진짜!”
마이크는 울컥해서 외쳤다. 이 자식은 협상의 기본도 모르나?!
* * *
사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태현의 의도가 아니었다.
콰콰쾅!
“뭐야? 왜 지금 터져?”
“아까 대장장이들 보내놓고 정해진 시간 되면 자폭시키기로 했잖습니까.”
“아, 맞다. 그랬지? 뭐 내 도시 아니니까.”
-야! 김태현! 지금 뭐 하는 거냐!
-어? 폭탄 자동으로 터지게 만든 걸 까먹어서. 뭐 이거 때문에 협상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이만 끊을까?
-아, 아니…… 잠깐만. 우리는 케인이…….
-다음 폭탄이 어디였지? 대장간이었나? 지금 터뜨린다고? 아, 미안. 귓속말에 잘못 말했군. 지금 다른 놈이랑 대화하면서 하는 중이라 좀 헷갈리네. 귀찮은데 그냥 협상하지 말자. 네 조건도 좀 이상하고 그런데 우리 서로 갈 길 가는 게 낫지 않겠냐? 넌 케인 로그아웃 시키고 난 폭탄 터뜨리고…….
-…….
마이크는 진심으로 무서워졌다.
이 자식은 정말로 신경 쓰지 않는 것 아닐까?
-김태현…… 제발…… 지금 협상 중이니까 폭발은 잠시 멈추자. 대화를 하자! 문명인처럼!
-미안한데 멈추려고 해도 이미 말한 거라서 어쩔 수가 없네. 열심히 폭탄 설치한 애들한테 멈추라고 하면 좀 미안하잖아.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러니까 빨리 조건 말하라고. 아까 그 조건이 전부였나?
-아, 아니…… 만약 폭탄을 해제하고 얌전히 물러나 준다면, 포위를 풀고 오단 성에 있는 놈들을 그냥 나가게 해주겠다.
마이크는 얼떨결에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원래라면 끝까지 버티고 버텨야 할 최후의 조건이었지만, 계속해서 폭발을 터뜨리는 태현이 너무 무서웠던 것이다.
-음…… 좀 아쉬운데.
-뭘 더 바라는 건데?!
-아, 잠깐만. 또 터뜨렸다고 옆에서 말해가지고. 이런, 이번에는 어디야? 뭐 어쩔 수 없지.
-야! 김태현!!!!
* * *
협상을 하려고 해도 1분 간격으로 터져 나가는 폭탄들!
오랫동안 굶주려 왔던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은 폭탄을 터뜨릴 기회가 오자 눈이 돌아갔다.
그 사실을 모르고, 마이크는 이 폭발이 태현의 교묘한 계략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마이크는 오만하게 굴던 태도를 버리고 빌기 시작했다.
-김태현 씨, 저도 길드에서 체면이 있고 밖에는 아내와 저를 지켜보는 자식이 있습니다.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우리 서로 타협합시다.
-공손한 태도는 마음에 드는데 내용은 별 의미가 없군. 나도 밖에는 날 지켜보는 어머니가 있고 게임 안에는 날 괴롭히려 하는 아버지가 있지. 누군 가족 없냐? 응?
‘이런 개XX…….’
그래도 마이크는 빌고 빌어서 간신히 협상을 성공시켰다.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조건을 드러내서.
-김태현은 더 이상 아레네 시에 폭탄을 터뜨리지 않는다.
-길드 동맹은 오단 성에 있는 태현 일행을 무사히 내보내 준다.
-이후 길드 동맹과 김태현은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
-이 협상은 공개하지 않는다.
물론 서로가 알고 있었다.
이건 잠시의 휴전일 뿐, 언제든지 서로 다시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서로가 알고 있었다.
“어, 어??”
“빨리 꺼져라!”
“진짜 김태현이 포기했다고? 야, 너희 속고 있는 거야! 걔가 그럴 놈이 아니야!”
“아, 꺼지라니까!”
케인은 어리둥절해서 길드 동맹 길드원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이미 잔뜩 화가 난 길드원들은 대답 대신 욕설을 퍼부었다.
“이 자식들은 친절하게 말을 해줘도 저러네!”
케인은 투덜거리면서 나왔다. 오단 성에서 빠져나오는 다른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그들도 지금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상황 끝난 겁니까?”
“왜 그냥 보내주죠?”
케인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김태현이 쟤네 본거지 가서 폭탄 들고 협박했단다.”
“……역시 김태현 님!”
“저희를 위해서……!”
“아, 아니야! 이 자식들아!”
그제야 제정신이 든 케인은 당황해서 외쳤다.
아까야 사기가 내려갈까 봐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일이 다 끝난 이상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김태현의 사악한 속셈을 세상에 알려주리라!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겠지만, 적어도 고생을 같이한 이 사람들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이렇게 된 거라고!”
케인은 열정적으로 사실을 말했다. 그러나…….
“에이, 농담도 적당히 하셔야죠.”
“맞아요.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농담은 가려서 하는 겁니다.”
“케인 씨,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
아무도 안 믿어주는 진실!
태현은 그냥 너희들을 버리고 도망친 거고, 도망친 김에 빈집털이하러 갔다가 이렇게 된 거다! 라고 말해줘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후…… 인생 진짜…….”
-아니다. 난 네 말을 믿는다.
“?!”
케인은 깜짝 놀랐다. 흑흑이가 케인에게 말을 걸어준 것이다.
“정말로?”
-물론이다. 주인님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 * *
“어, 진짜 물러날 거야?”
우드스탁 길마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솔직히 그는 태현이 협상을 거절한 다음 아레네 시를 불바다로 만들 줄 알았다.
“왜, 난 협상하면 안 되냐?”
“아, 아니. 그건 아닌데…….”
태현이 협상을 받아들인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치고받으면 나만 손해일 테니…….’
이렇게 난리를 쳤으니 아무리 태현의 영지가 방어가 잘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길드 동맹은 바로 공격 준비를 해올 것이다.
사람은 일정 이상의 피해를 입으면 어느 순간부터는 손익을 따지지 않고 덤비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아쉬운 나머지 먼저 평화제 안을 하다니.
태현이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실컷 두들겨 패고 평화!
이 얼마나 이상적인가!
“배신을 하면 어쩌죠?”
“먼저 배신하지는 못할걸. 이거 공개되면 길드 동맹 내에서 목 날아갈 놈들이 한둘이 아닌데.”
태현은 저쪽에서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길드 동맹은 한 명의 길마 밑에 합쳐진 단결력 좋은 조직이 아니었다.
여러 길드가 합쳐진 동맹!
당연히 서로 견제하고 다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실수를 인정하는 건 매우 위험했다. 한 번에 훅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폭탄을 해제해야 한다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 제 자식 같은 폭탄들인데…….”
“…….”
“…….”
태현과 이다비는 식겁한 눈빛으로 가브리엘을 쳐다보았다. 가브리엘은 애절하게 폭탄들을 쓰다듬고 있었다.
“가브리엘, 좀 약하고 안 쓰는 폭탄들은 설치하고 가자.”
“예?! 정말입니까?!”
“그래. 그래. 어차피 길드 동맹 놈들은 우리 가고 나면 탑 한 번 싹 뒤질 테니까.”
태현이 물러나도 의심 많은 길드 동맹 사람들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그들이 의심을 풀게 해주려면 이런 폭탄들을 좀 설치해 주는 게 좋았다.
찾으면서 ‘폭탄 찾았다! 역시 김태현 놈! 수작을 부렸구나!’ 할 테니까.
만약 못 찾으면?
그건 그거대로 더 좋았다.
“잠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위에 점검 좀 하고 올게.”
태현은 그렇게 말하고 위로 올라가 날개 악마들을 마지막으로 훑어보았다.
밑의 사람들은 태현이 위에 뭘 하고 왔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잘 하고 있군.”
-주, 주인님. 곧 오실 거죠?
“그래. 대신 선물로 이걸 주지.”
-?
태현은 폭탄 하나를 꺼내 악마에게 건넸다.
“이걸 잘 갖고 있어. 만약 들키면 터뜨려도 좋다!”
-……그러면 저도 죽지 않나요?
“그러면 난 이만 가볼게!”
-주인님? 주인님?!?!
* * *
“야, 김태현 이 자식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 사람인 이상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다비는 데리고 가는데 나는…….”
“우리 판타지 크래프트 연습할까?”
“……지금 생각해 보니 각자의 역할이 있었던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