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83화
케인은 귀를 의심했다.
리치?
사악하고 강력한 흑마법사가 타락할 대로 타락하다 보면 김태현이 되거나…… 아니, 보통 리치가 됐다.
리치가 되면 살아 있는 육신을 버리는 대신 엄청난 힘을 얻게 되었다.
물론 강력한 힘을 얻으려면 강력한 대가도 치러야 하는 법.
보통 리치가 되면 살아생전에 있던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점점 더 사악해지고 악랄해졌다. 김태현처럼…… 아니.
‘내가 왜 자꾸 이러지?’
케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김태현을 욕할 때가 아니야! 더 급한 게 많아! 나중에 욕하자!’
어쨌든 리치는 언데드 몬스터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함을 자랑했고, 리치가 되는 건 뛰어난 흑마법사이니만큼 엄청난 마법을 갖고 있었다.
한 번 대륙에 소환되면 대륙을 벌컥 뒤집는 수준!
판온 1 때도 리치 한 번 소환됐다고 작은 왕국 하나가 무너진 적이 있었다.
“아니……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아직 정신줄을 조금 붙잡고 있는 케인이었기에, 상식적으로 의문을 제시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자기 본진에 리치를 소환하는 게 과연 옳은 짓일까?
지금 당장이야 그들의 편을 들어주겠지만 리치가 나중에 돌아선다면 재앙이 될 것이다.
“아닙니다!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방법밖에 없다니. 그건 편견이야! 다시 생각해 보자고! 그, 그럴 힘이 있으면 언데드를 더 소환하고 강화해서 차라리 포위망을 뚫어보는 게?”
케인은 모르는 사이 자기 무덤을 파고 있었다.
길드 동맹은 이미 그런 상황을 대비해 함정까지 다 파놓고 있었으니까.
포위당한 상태로 공격받다 보면 언젠가는 한계가 올 것이고, 그때 탈출을 위해 튀어나오는 놈들을 일망타진한다!
그게 길드 동맹의 계획이었다.
다급하기에 케인의 시야도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흑마법사들은 아니었다.
“포위망을 뚫는다고요?”
“그래!”
“그건 도망치는 거잖습니까?”
“……도망치면 안 되나?”
“안 됩니다!”
“왜?!?!”
케인은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망치면 명예가 꺾입니다.”
“누구 명예가 깎여?!”
“김태현 백작의 명예, 에랑스 왕국 마탑 흑마법사들의 명예!”
“아니, 이런 씨…….”
케인은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김태현이 너희를 버리고 튀었다고!!
그렇게 둘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의식은 시작되었다.
콰르르르릉!
검은 번개가 내리치더니, 체세도의 몸에서 어두운 기운이 파도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에랑스 왕국 마탑의 흑마법사, 체세도가 리치화 의식을 시도합니다.]
[리치는 언제나 대륙을 위협한 강력한 적이었으며, 질서를 파괴하는 악이었습니다. 리치가 태어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정의로운 아키서스의 노예인 당신이 나서야 합니다.]
<리치의 탄생을 막아라-아키서스의 노예 퀘스트>
대륙을 위협하는 리치는…….
‘나보고 어쩌라고!!’
케인은 퀘스트창을 꺼버렸다.
판온의 모든 놈들이 케인을 괴롭히는 기분!
지금 들어가서 체세도를 죽인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절대 안 됐다.
언데드들이 무너지고 흑마법사들도 케인의 말을 듣지 않을 테니, 길드 동맹이 케인의 목을 따러 올 테니까.
-안 해! 안 한다고! 거부!
[퀘스트를 거부하셨습니다.]
[아키서스가 당신에게 실망합니다. 명성이 하락합니다.]
[신성이 하락합니다.]
“후…….”
케인은 하늘을 쳐다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하늘이 시커멨다.
마치 케인의 기분 같았다.
* * *
리치가 탄생한다는 메시지창은 케인에게만 뜬 게 아니었다.
밖에 있는 길드 동맹에게도 떴다.
“리, 리, 리치가 나온다고?”
“김태현이 리치 되는 건가?!”
“막아! 지금 당장 들어가!”
“저, 죄송하지만 지금 길드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많습니다.”
“무슨 불만!”
“랭커분들께서 자꾸 뒤에만 계시고 자기들만 피 본다고…….”
랭커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랭커들이 다 얼굴 가죽이 얇은 건 아니었다. 얼굴 가죽이 두꺼운 랭커들도 있었다.
“무슨! 뒤에서 상황을 보고서 있었던 거야! 앞에서 싸우다 보면 큰 상황을 볼 수 없다고!”
“아, 예. 그러시겠죠. 어쨌든 지금 길드원들은 랭커분들이 앞장 안 서시면 안 들어가겠답니다.”
“길드원들 관리 이렇게밖에 못해?!”
“말조심하시죠. 지금 최선을 다해서 관리하고 있으니까. 랭커분들이 대접 많이 받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뭐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 아닙니다. 받은 게 많으면 그만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뭐야?!”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길드원들 다 불러서 한 번 따져볼까요?”
“야, 야. 그만해.”
다른 랭커들이 나서서 발끈한 랭커를 말렸다. 지금 일이 커지면 곤란한 건 그들이었다.
명분은 길드원들한테 있었으니까.
실제로 랭커들은 랭커라는 이유만으로 길드의 가장 좋은 지원만을 받고 있었다.
길드원 중에서는 거기에 불만을 가진 이들도 꽤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일이 커지면 그런 불만까지 겹쳐서 덤터기를 쓸 가능성이 높았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좀 상황을 보려던 게 오해를 샀네요. 지금이라도 나서죠.”
“그래주시면 감사하고요.”
길드원은 싸늘하게 대답하고 돌아갔다. 그걸 본 랭커 하나가 성질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저 자식이 짜증 나게…….”
“야. 그만하라니까. 너 때문에 우리까지 다 같이 피보고 싶냐?”
“피 볼 게 뭐가 있어! 저딴 놈들한테!”
“이 자식은 진짜 머리가 없나…… 길드원들이 몇 명인데, 걔네가 손잡고 덤비면 네가 버텨낼 수 있을 거 같냐? 얌전히 있으라고!”
“그보다 어떻게 나서지?”
“글쎄…… 가위바위보라도 할까?”
“주사위로 하자.”
한시라도 빨리 성벽을 넘을 생각은 안 하고, 이 와중에도 순서를 정해 자기는 빠지려는 이 모습!
덕분에 체세도는 수월하게 리치가 될 수 있었다.
* * *
“아주 잘하고 있군.”
쑤닝은 길드 상황을 보며 중얼거렸다.
쑤닝은 이번 공격에 참가하지 않았다. 쑤닝이 원하는 건 하나. 그의 경쟁자들이 실수하는 것!
그것 때문에 이번 공성전은 그들에게 맡겼다. 다른 사람들이 실수하는 만큼, 쑤닝의 입장은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보니 거의 절반은 성공한 기분이었다.
랭커 마이크는 일대일로 이름 좀 알려보겠다고 나대다가 망신이나 당하고, 다른 랭커들은 길드원들이 앞장서서 길을 뚫는데 김태현이 암살한다고 몸을 사리고…….
벌써 곳곳에서 불만이 튀어나오고 있는 상황.
“어? 리치?”
만족스럽게 보고 있던 쑤닝은 당황했다. 뭔 리치?
“아니, 저건 막아야지! 이런 멍청이들이…….”
쑤닝이 원하는 건 적당히 실패하는 거지, 아주 크게 실패하는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태현도 똑같이 싫었으니까!
쑤닝이 원하는 건 대충 ‘엄청나게 피해를 입고 공성전을 성공하긴 했는데 잡으려는 김태현은 못 잡은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단 성에서 리치가 튀어나온 것이다.
‘……설마 저 병력 가고 지지는 않겠지? 저 멍청이들이?’
그런 쑤닝도 지금 태현이 아레네 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건 상상치 못했다.
* * *
<리치의 탄생을 막아라-아키서스의 화신 퀘스트>
대륙을 위협하는 리치는…….
“뭐야?”
태현은 귀찮다는 듯이 메시지창을 꺼버렸다.
“왜 그러세요?”
“대륙에 리치 나왔나봐.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거기 있는 플레이어들 고생 좀 하겠군.”
“리치가 나왔어요?! 하긴, 판온 2에서도 나올 때가 되기는 했죠.”
이다비는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플레이어들이 리치를 잡을 수 있을까요?”
“플레이어들끼리 싸우면 힘들지 몰라도, 리치 뜨면 보통 NPC들도 나서서 잡으려고 하니까 아마 가능하겠지.”
아키서스의 화신인 만큼, 태현에게도 리치를 막으라는 퀘스트는 떴다.
물론 바빠 죽겠는 태현은 가볍게 퀘스트창을 간단하게 무시했다.
“어, 저기, 김태현?”
“아. 진짜. 어련히 알아서 할까. 왜 자꾸 귀찮게 해?”
“아니, 그게…… 리치는 오단 성에 나왔다는데?”
“뭐?! 길드 동맹이 리치까지 불렀어?! 이런 사악한 놈들…… 케인의 명복이나 빌어줘야겠군.”
태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태현이 에랑스 왕국 마탑 흑마법사들을 동원했다지만, 맞불 작전으로 리치를 들고 오다니.
길드 동맹도 정말 단단히 독이 올랐구나 싶었다.
이번에 할 짓을 보면 더 독이 오르겠지?
“아니. 그게 아니라…… 오단 성의 흑마법사들이 불렀다는데.”
“!”
태현은 깜짝 놀랐다. 정말 오랜만에 놀란 것 같았다.
“누가?”
“오단 성 흑마법사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걔네들이 사악하고, 성격 더럽고, 지금 사람 많이 죽어서 죽음의 정수도 많이 모은 상태긴 하지만 갑자기 리치가 되는 의식을 할 정도로 미치지는…….”
말하던 태현은 멈칫했다. 말하다 보니 왠지 모르게 그럴듯했던 것이다.
“……정말 오단 성에서 불렀어?”
“지금 생중계하고 있는 영상을 봐라!”
“으음…….”
태현은 고민에 잠겼다.
사실 최악의 경우, 마탑의 흑마법사들은 다 버려야 할 수도 있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물론 그럴 경우 에랑스 왕국 마탑과의 관계는 매우 안 좋아질 테지만, 태현은 어차피 마법사 직업이 아니었다.
권능도 얻었고 마탑이랑 사이 안 좋아지면 거기 안 가면 그만!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태현은 이런 짓이 가능했다.
그런데 거기 흑마법사들이 궁지에 몰리다 보니 리치까지 되고 만 것이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태현은 입맛을 다셨다.
일단 지금 상황에서는 좋긴 했다. 리치가 된 흑마법사는 어마어마한 전력이었으니까.
문제는 나중이었다.
리치가 된 흑마법사가 계속 태현 편을 들어줄까? 리치가 됐는데도?
‘길드 동맹 상대하겠다고 더 큰 적을 부른 거 아닐까 모르겠는데…… 에이, 뭐 됐다. 어차피 내 영지 주변도 아닌데. 길드 동맹이 알아서 하겠지.’
고민하던 태현은 쿨하게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여기는 길드 동맹의 땅!
리치가 미쳐 날뛰어도 길드 동맹이 피해를 입지 그가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이래도 되는 거야?”
“흠, 괜찮을 거다.”
“괜찮다니, 헉, 설마 여기까지 계산하고 있었던 건가? 리치를 통제할 수 있다니…… 말도 안 돼!”
우드스탁 길마는 경악한 눈빛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태현은 정말 차원이 다른 플레이어였다.
“아니, 통제할 자신은 없고, 나중에 날뛰어도 일단 나한테 피해는 안 올 테니까 괜찮다는 거지.”
“…….”
정말 차원이 다르기는 했다.
“다 왔다.”
“어…… 김태현?”
“아, 너 왜 자꾸 날 부르는 거야? 나 좋아하냐? 응?”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귀찮게 해서 미안한데…… 여기는 아레네 시 아니야?”
“그래. 아레네 시지.”
“왜 여기가 다 왔다는 거…… 아! 여기서 이동 수단을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 거구나!”
아레네 시는 길드 동맹이 작정하고 가꾸는 도시다 보니, 각종 이동 수단이 많았다.
“아. 이동 수단도 파괴해야겠군. 좋은 포인트를 지적했어, 스톤스탁.”
“우드스탁이에요.”
이다비가 속삭였다.
그러나 우드스탁 길마와 길드원들은 화낼 정신도 없었다.
지금 그들이 여기에 왜 온 건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김, 김태현 이 자식…… 여기를 공격하려고 우리를 데리고 온 거야……!’
‘미친놈 아니냐?!’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해!’
“어이쿠.”
태현은 갑자기 검을 뽑았다. 그리고는 길드원들을 쳐다보았다.
“실수로 손이 미끄러져서 검을 뽑았네. 한 번 더 미끄러지면 도망치려는 놈을 공격할 수도 있겠어.”
“…….”
“…….”
-길마님? 제가 뭐라고 했…….
-닥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