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64화
‘내가 너무 만만하게 봤군!’
태현은 체시자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속여 온 순진무구한 NPC들과 달리, 체시자는 속이 배배 꼬인 흑마법사였다.
쉽게 속여 넘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
‘이세연처럼 말이지.’
자리에 없는 이세연도 한 번 씹어주고, 태현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태현 씨! 태현 씨!”
“?”
저 멀리서 바하의 애절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 주사위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흑마법사 구역 밖에서 바하가 애절한 목소리로 태현을 부르고 있었다.
이제는 체면도 벗어던진 바하!
태현은 그걸 보고 흑마법사 NPC들에게 말했다.
“집중해야 하니 외부인은 좀 내보내자.”
“예!”
흑마법사 NPC들이 우르르 몰려가 바하의 양팔을 붙잡았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니, 저도 마탑 마법사인데……!”
“화염술사면서 어디 흑마법사 구역에!”
“다 같은 마탑 마법사 아닙니까?!”
“아니니까 조용히 가라. 응?”
성격 더럽고 꼬인 흑마법사들답게 가차 없었다.
“저는 저기 태현 씨랑 아는 사이란 말입니다!”
“어디서 거짓말을! 썩 가라!”
그러는 동안 태현은 어두컴컴한 흑마법사 구역의 의자에 앉아 고민하고 있었다.
‘체시자를 죽인다, 죽이지 않는다, 죽인다, 죽이지 않는다…….’
누가 듣는다면 깜짝 놀랄 만한 살벌한 반응!
* * *
“길드 동맹에서 태현이를 잡았다고!?”
“예! 형님! 벌써 게시판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말이 안 되는데? 아. 그리고 좀 제발 길마님이라고 해라! 다른 사람들이 보면 자꾸 오해하잖아!”
김태산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수많은 장점을 가지고도 아저씨들의 괴상한 센스 때문에 신규 길드원들이 거의 없었던 <최강지존무쌍> 길드.
그러나 <최강지존무쌍> 길드에도 이제 새로운 길드원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사실 곰곰이 따져보면 길드원들이 들어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오스턴 왕국에서 탄탄히 자리 잡은, 영지를 갖고 있는 길드 중 하나!
게다가 길드원들은 모두 열정적으로 돈과 시간을 팍팍 투자하는 사람들이었다.
강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형님. 형님. 동생이 형을 매우 잘 따르는 걸 3글자로 줄이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모르겠는데?
-형광팬!
-으하하하하하!
-까르륵 깔깔!
-쟤 유모어 솜씨가 제법이다? 개그맨 해도 되겠는데?
-…….
새로 들어온 길드원들을 맞이해 주는 적나라한 길드 채팅!
그들은 순간 처음에 아저씨들이 짜고서 신고식을 하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다면 저런 개그에 웃을 리 없지 않은가!
저런 개그가 일정 시간마다 올라오니 길드원들은 괴로워했다.
‘아, 안 돼……! 그만……! 그만하라고!’
-으하하하하! 너무 재밌습니다!
가장 괴로운 건 저런 개그에 익숙해져서 깔깔 웃어대는 스스로를 보게 되었을 때!
게시판에 보면 [최강지존무쌍 길드에 들어가고 싶은데 거기 어때요?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라는 글을 보면 반응을 알 수 있었다.
* * *
-님아산태김:정말 좋은 길드입니다. 요즘 대형 길드들이 서로 손을 잡고 선량한 플레이어들을 무차별 PK하는 문제가 터지는데, 이런 길드들이 있어서 그나마 판온이 판온답게 유지가 되는 거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길마님이 훌륭하신 분이신데, 인품부터 시작해서…….
-배고픈바지:거기 길드 괜찮아요. 보니까 길드가 영지에 투자도 엄청 하고, 길드원 전력도 되게 강하더라고요. 이제까지 소문이 안 난 게 이상할 정도?
-고독한암살자:영지 가보면 알겠지만 진짜 전력 강한 길드더라고요. 건축가 직업이어서 보이는데 요새를 뭐 저렇게 짓나 싶어요. 완전 돈지랄을…….
-(익명 처리되었습니다):길드원인데 개그에 자신 있는 분만 들어오세요…….
-(익명 처리되었습니다):다 좋음. 다 좋은데…… 후…… 아닙니다. 들어오면 알 테니까요. 솔직히 다른 건 다 엄청 좋아서, 이제 좀 있으면 들어오고 싶어도 못 들어올 거 같아요.
-님아현태김:여기 길마 성격 나쁨.
-님아산태김:아니, 그런 허위 정보를 퍼뜨리시다니. 그러시면 안 되죠. 책임 있는 판온 플레이어가 됩시다.
-님아현태김:사실인데요? 왜 길마를 옹호하시죠? 혹시 길마랑 아는 사이? ㅋㅋㅋㅋ.
-님아산태김:너 어디 사냐?
* * *
“아, 죄송합니다. 길마님.”
“그래. 근데 태현이를 잡았다고?”
“네.”
“……?”
김태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걔네들이 그렇게 셌나? 이해가 안 가는데.”
“연합이 아니라 아예 동맹 수준으로 뭉쳤잖습니까. 세력만 따지면 길드 동맹은 판온 최대 길드입니다.”
“길드 합친다고 다 뭉쳐지나. 나중에 확인이나 해봐야지.”
옆에 있던 로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길드 동맹이 작정하고 사람 보냈고, 확인글까지 올렸는데 왜 못 믿으십니까?”
“확인글 올리면 무조건 믿어야 하냐? 난 인마, 리X지 때 상대방 길드원으로 위장해서 일부러 이간질 글 올린 적도 있었어. 저런 건 다 믿으면 안 돼.”
“예???”
“아, 아니. 내가 했다는 게 아니라 그런 일도 있었다는 거지. 리X지에서 말이야.”
로이가 의혹에 가득 찬 시선으로 김태산을 쳐다보았다.
김태산은 아차 싶었다.
예전에 ‘혈맹! 군주님!’ 하던 때와 달리, 판온에서는 나름 이미지 관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흠흠. 어쨌든 인터넷에 떠도는 거라고 다 믿으면 안 된다. 이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길드 동맹이 저렇게 공식적으로 발표를 했는데 아닐 리가…… 그러면 망신 중의 개망신이잖습니까.”
“시끄럽고. 너 내가 시킨 건 다 했냐?”
“예.”
로이.
김태산과 예전에 시비가 붙어서 PK로 덤벼들었다가 막강한 장비와 아이템 빨에 밀려 패배한 랭커였다.
그 이후로 김태산에게 완전히 호구를 잡혀 계속 끌려다니던 로이.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로이는 아예 길드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너 보니까 쓸만하다? 우리 길드 들어와서 같이 하자 그냥.
-후,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래. 그러면 죽어라.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죽겠다는 건 아니고요. 그리고 제가 이렇게 열심히 해서 퀘스트도 도와드렸는데 죽이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로이의 간절한 항의!
그 항의는 다른 길드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맞는 말이긴 해.
-우리가 좀 많이 부려먹긴 했지?
-그래. 그러면 이쯤에서 슬슬 보내주자.
-아쉽네. 들어오면 이것저것 좀 챙겨주려고 했었는데.
-……그 이것저것이 뭡니까?
-알아서 뭐 하게. 나간다는 놈이. 빨리 가라. 훠이훠이.
-그게 뭔지 정도는 알아도 되잖습니까.
-아. 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 이놈이. 빨리 가라니까. PK당하고 싶냐? 응? PK해달라는 거냐?
안 알려주면 더 궁금해지는 게 사람 마음.
로이는 결국 매달리고 매달려서 알아냈다.
-제발! 제발 알려줘요!
-에이. 귀찮게. 알겠어. 뭘 해주려고 했냐면…….
김태산은 귀찮다는 듯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길드원들에게 챙겨주는 각종 아이템들과 필요하다면 직접 자기 사비로 경매장에서 장비를 사다 주는 것까지!
다 들은 로이는 입을 벌렸다.
-가입하게 해주세요!
-응? 왜 이랬다저랬다 해? 얘 왜 이러냐?
-생각해 보니 여러분과 함께했던 시간이 제게는 즐거움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아무한테나 PK를 하자고 시비를 걸던 제가 여러분을 만나 회개하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같이하고 싶습니다!
-오. 그래?
-녀석. 싹수가 있군.
결국 이렇게 로이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로이는 길드 동맹의 요새 하나를 염탐하고 온 중이었다.
길드 연합이 동맹으로 바뀌고 합쳐졌어도 김태산은 달라지지 않았다.
-적은 부수고 박살 낸다!
“좋아. 다음으로 가볼까? 크핫핫핫핫핫!”
“길마님은 남 공격하는 걸 되게 좋아하시는 거 같습니다.”
“뭐? 아, 아니야. 그냥 내가 하면서 안 웃으면 다들 사기가 안 오르니까 그런 거야.”
설득력 없는 변명을 하는 김태산이었다.
* * *
-이번에 영광을 차지할 요리사는…… 주현영!
짝짝짝짝짝-
결국 국왕 생신 잔치 이벤트에서 우승한 건 주현영이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테란드 남작은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 요리는 정말 대단하군! 이 요리를 높게 평가 안 하는 사람은 혀가 없거나 뇌가 없는 사람이 분명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이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 눈에는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와. 정말 맛있나 보다!
“저번에도 저 주현영이란 요리사가 이기지 않았어?”
“맞아. 파즈를 이겼었지. 이번에도 또 이겼고!”
“소속 길드도 없는데 진짜 혼자서 대단하다.”
“실제로 엄청 대단한 요리사래.”
“하긴, 그 정도 되니까 저렇게 실력으로 이길 수 있는 거겠지.”
광장에 몰린 사람들은 주현영을 보고 수군거렸다.
대부분은 감탄하고 있었지만, 몇몇 플레이어들은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했다.
-저 정도 요리사인데 아직도 솔로라고? 확인해 보고 길드 초대해.
-쓸 만한 요리사면 무조건 OK지. 최대로 지원해 줄 테니까 길드 들어와 달라고 해!
길드 없고 능력 있는 솔로 플레이어는 언제나 길드의 관심 대상이었다.
그 상대가 제작 직업일 경우에는 더욱!
“후. 내 패배였다. NPC 하나 만족시키지 못하다니……!”
파즈는 무릎을 꿇고 한탄했다. 그걸 본 주현영은 당황해서 손을 흔들었다.
“아니, 그렇다고 무릎을 꿇을 건…….”
“아니다! 이건 내 각오다! 이러지 않으면 난 이 패배를 극복하고 갈 수 없을 테니까!”
그걸 본 플레이어들은 수군거렸다.
‘파즈가 무릎을 꿇었어!’
‘대체 저 주현영이란 요리사는 뭐하는 플레이어지!?’
사람들이 그렇게 웅성거리는 동안, 광장 구석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어딘가 초췌하고 우울한 표정!
차오와 그 길드원들이었다.
감옥에 갇혀 있다가 골드를 바치고 공적치 포인트까지 써서 간신히 나온 것이다.
물론 이벤트에 전혀 참가할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김태현…… 김태현……!”
차오를 더 분하게 만드는 건, 단순히 전투력 차이가 아닌 음모 능력에서 밀렸다는 점이었다.
스스로가 갖고 있는 요리를 사용한 음모 능력에 자부심이 있는 차오였다.
그런데 태현 앞에서는 정말 보름달 앞의 반딧불 수준!
뭘 해도 이길 수가 없었다.
“길마님. 그래도 길드 동맹이 가서 잡았다지 않습니까?”
“그래…… 그나마 다행이지. 후. 이번 이벤트에 참가 못 한 덕분에 손해가 막심하다. 비싼 돈 주고 산 재료는 쓰지도 못하고…….”
“그중 일부는 김태현이 먹고, 또 일부는 김태현이 가져갔…….”
“…….”
“……죄송합니다.”
눈치 없이 진실을 말한 길드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보다 주현영은 완전히 떴군.”
“저런 이벤트를 두 번이나 우승하면 싫어도 눈에 띌 수밖에 없으니까요. 뛰어난 요리사 플레이어는 구하기 힘들고…….”
레스토랑 길드처럼 요리사들만 있는 길드가 고평가받는 이유였다.
친해질 경우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요리들을 대량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다.
“벌써 섭외하려는 놈들이 있더라고요.”
“그래? 음. 차라리 우리가 초대해볼까?”
“예? 우리가요?”
“왜. 안 될 거 같냐?”
“우리하고는 너무 안 맞지 않습니까? 벌써 몇 번을 부딪쳤는데…….”
차오가 주현영과 경쟁하기도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일반 요리사 플레이어들은 레스토랑 길드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다.
요리에 독 타기, 요리 재료 먼저 선점하기, 남 요리 못하도록 방해하기…….
워낙 뒤에서 더러운 짓을 많이 하는 것이다.
“그런 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조건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