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43화
태현은 웃으면서 칼을 든 채 블랙 드래곤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이 자리에 케인이 있다면 ‘조심해! 저건 함정이다!’라고 말했겠지만 불행히도 이 자리에는 케인이 없었다.
이 자리에 습격을 위해 모인 플레이어들이 있었다면 ‘저, 저놈 또 사람 팬다!’라며 말했겠지만 그들은 방금 브레스에 쓸려나간 상황.
블랙 드래곤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블랙 드래곤은 그걸 눈치 못 채고 열심히 입을 놀렸다.
-주인, 사디크에 속하는 인간으로서 나 같은 존재를 부리는 건 행운으로 알아야 한다. 일단 그대가 주인이지만 그건 이름에 불과하고 누가 더 사디크의 사랑을 받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사디크가 사랑하는 마수이자 블랙 드래곤인 나. 평범한 인간인 그대. 사디크가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는 당연하지만 나는 관대하니 일단은 그대를 주인으로 인정하겠다. 자, 빨리 인간을 잡아 오도록…… 컥!
빡!
태현은 블랙 드래곤을 후려갈겼다.
-뭐, 뭐 하는 짓인가!
“미안. 난 사디크에게 사랑을 받을 일보다는 사디크를 패고 다닌 일이 더 많았어. 그래도 사디크는 나 좋아하더라. 권능도 몇 개 주고.”
정확히 말하자면 권능은 뺏은 것이었지만 태현은 당당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괜찮아. 이해할 필요 없어.”
퍽! 퍼퍼퍽!
[블랙 드래곤의 몸통에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습니다.]
[힘이 오릅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
-주인, 진정해라! 지금 이 무례는 내가 관대히 용서해 주겠다!
“……! 그래. 고맙다! 계속 용서해 줘!”
-응?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 그런데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지?
태현의 눈빛은 이미 경험치를 보는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앞으로 말도 안 들을 것 같은데 그냥 잡아서 경험치로 바꿔버려?’
태현이 사디크의 신도였다면, 사디크의 마수를 잡는 순간 엄청난 페널티를 입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태현은 아키서스의 화신!
사디크의 마수를 잡으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이익이었다.
‘서버 내 첫 드래곤 사냥에, 경험치에, 비늘에, 드래곤이니까 드래곤 하트도 있을 거고…… 내 행운 스탯이면 무조건 나오겠지? 게다가 명성 보상도 있을 테니까…….’
깊고 어둡게 번쩍이는 태현의 눈빛.
블랙 드래곤인 만큼, 상대는 태현의 생각을 금세 알아차렸다.
-주인! 사디크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괜찮아. 사디크는 뭘 해도 용서해주더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사디크의 분노는 무섭다! 사디크의 분노는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성소 불태우고 본거지 불태우고 주교들 해치워도 용서해 주던데?”
-?!
그제야 블랙 드래곤은 태현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저놈은 사디크의 독실한 신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잠, 잠깐 이야기 좀…… 컥! 커컥! 그만 좀 때리고! 이야기 좀 하자!
“나는 칼로 이야기한다.”
어느새 블랙 드래곤의 HP는 절반 이상 닳아 있었다.
아무리 강력하고 위대한 보스 몬스터라지만 마수로 소환된 상태에서 브레스로 힘의 대부분을 소모해서 약해지고 작아진 상태.
쌩쌩한 태현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블랙 드래곤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이 인간 놈! 너는 인정도 없냐! 내가 너를 도와서 너의 적을 쓸어버렸는데!
“고마워서 살살 패고 있다.”
물론 블랙 드래곤의 단단한 몸뚱이를 때려서 스탯 보너스를 최대한 얻기 위해서였다.
-타협하자! 내가 너를 나보다 위의 존재로 인정해 주마.
“고맙다. 잘 가라.”
-……타협합시다! 주인님!
“그래. 고맙다. 잘 가라.”
-주인님! 제발! 이렇게 소환됐는데 죽고 싶지 않아요!
HP가 10% 밑으로 떨어지자 나오는 본심!
태현은 그제야 검을 멈추었다.
“그래?”
-살고 싶습니다!
“에이. 못 믿겠어. 사디크 놈들은 다 흉악하고 성격 더러워서 남 속이는 게 일상이잖아.”
‘그러면 사디크 마수 소환 권능을 쓴 너는 뭐냐?!’
블랙 드래곤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블랙 드래곤은 눈치를 잘 보고 타협을 잘하는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저는 사디크의 마수지만 동시에 드래곤. 명예를 아는 존재입니다!
“진짜? 나중에 내 뒤통수치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사디크의 이름을 걸고?”
-사디크의 이름을 걸고…… 헉!
블랙 드래곤은 식겁했다.
사디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이상 어떤 반항도 할 수 없게 된 것!
“그래. 그러면 믿어줄게.”
-…….
블랙 드래곤은 태현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주인.
“님이 빠졌다?”
스르릉-
다시 올려지는 검. 블랙 드래곤은 거기서 악마의 힘이 느껴진다는 걸 깨달았다.
악마 에다오르의 진홍빛 대검!
‘사디크를 믿는 인간이 왜 악마들이 쓰는 무기를 들고 있냐?!’
블랙 드래곤은 황당했지만 말했다가는 한 대 맞을 거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주인님. 헤헤.
“그래. 말해봐라.”
-주인님께서는 사디크를 믿으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아니지. 솔직히 사디크는 대륙 전체에 민폐나 끼치고 불장난이나 하는 놈 아니냐? 그런 놈이랑 나랑 엮으면 내가 기분이 좀 나쁘다.”
-…….
블랙 드래곤은 뭔가 말하려다 참았다. 일단은 더 물어보자!
-그…… 그러면 주인님께서는 어떻게 사디크의 권능을?
“죽이고 뺏었는데.”
-……!!
그제야 블랙 드래곤은 깨달았다.
태현은 사디크의 신도가 아니라, 사디크의 적!
사디크의 힘을 흡수하는 놈이었던 것이다.
‘이런 미친 인간을 봤나! 어떻게 그런 짓을……!’
인간 주제에 신의 권능을 싸워서 뺏는 놈이라니.
블랙 드래곤은 처음에는 경악했지만 생각해 보니 아쉬운 건 사디크였지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블랙 드래곤은 사디크와 계약하고 힘을 빌려 대륙으로 나온 존재.
사디크의 권능이 태현한테 넘어가든 넘어가지 않던 별 상관이 없었다.
결국에 이긴 놈이 그의 주인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니 나하고는 상관없군.’
다른 선한 신의 신수였다면 태현의 사악한 행동에 분노하고 목숨을 건 저항을 했겠지만, 사디크는 악신.
사디크의 마수와 사디크는 딱히 충성심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었다.
‘그런데 사디크와 싸우다니, 선한 신의 성기사 같은 놈인가?’
블랙 드래곤은 태현의 겉을 훑어보았다.
악마가 쓰는 무기를 들고 사디크의 권능을 훔쳐 쓰는 놈!
‘……성기사 맞아?’
-주인님. 그런데 어느 신을 믿으십니까?
“나는 아키서스의 화신인데.”
-…….
대번의 바뀌는 블랙 드래곤의 눈빛!
경멸 그 자체의 눈빛이었다.
“뭐지? 그 눈빛은? 뭔가 기분 나쁜데?”
-아, 아닙니다. 주인님께서 아키서스 그 샊…… 아니, 아키서스의 화신이라니…… 역시 그 모습이 이해가 가는군요…….
“…….”
-아키서스라니. 아키서스의 화신이라면 그 모습도 이해가 갑니다.
끄덕이며 납득하는 블랙 드래곤.
태현은 기분이 나빠서 한 대 더 후려갈겼다.
퍽!
“아키서스가 뭐 어때서. 어? 꼽냐?”
강제로 전직한 덕분에 아키서스의 욕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태현이었다.
-아, 아닙니다. 아키서스가 다른 신들과 악마를 속이고 사기를 치긴 했지만 주인님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죠.
“……분명 정당한 거래였겠지. 신이나 악마쯤 되어서 속은 게 잘못이지. 다른 애들한테는 사기 안 쳤잖아. 그거면 된 거지.”
-다른 신들은 보통 신수나 마수 소환 계약을 할 때 그 종족과 협상을 하는데, 아키서스는 혼자 사기를 쳤습니다. 골드 드래곤 종족에게 사기를 쳐서 신수 계약을 했는데…….
“…….”
용용이의 충격 비화!
안 그래도 이런 블랙 드래곤을 만나서 용용이가 생각나고 미안한데, 다시 한번 더 용용이한테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잘해 줘야지…….’
-주인님. 이름이나 지어주시죠.
“용용이로 할까 했는데.”
-오. 좋은 이름입니다.
“그건 이미 주인이 있어서.”
-?
“넌 흑흑이로 하자.”
-……주인님.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가자. 흑흑아. 그런데 넌 힘을 어떻게 회복하냐? 설마 너도 내 경험치를 뺏어 먹냐?”
태현의 마지막 말에는 살기가 묻어 있었다.
-아, 아닙니다! 안 먹겠습니다!
“먹는다는 거야, 안 먹는다는 거야?”
-안 싸우면 안 먹을 수 있습니다!
“용용이랑 똑같은 시스템이군.”
태현은 한숨을 쉬었다.
신수나 마수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펫이나 소환수에 비해 엄청나게 강력한 대신, 제약이 너무 심했다.
특히 이런 경험치 나눠 먹는 시스템이 더더욱 그랬다.
안 그래도 경험치에 허덕이는 태현에게 신수나 마수는 커다란 짐이었다.
“용용이는 신성 스탯이나 그런 걸로도 회복이 되긴 했지. 너도 뭐 다른 거 없냐?”
-저는 도시를 불태우고 사람을 불태우면…….
“……악명 스탯이군.”
사디크의 마수답게 악명을 쌓아도 힘이 회복되는 모양이었다.
태현은 두들겨 맞아서 작아진 흑흑이를 들어 어깨에 올렸다.
“가자. 일단 영지부터 가야지.”
-그런데 사디크의 마수인 제가 아키서스의 화신인 주인님과 같이 다녀도 됩니까?
“괜찮아. 내 영지에는 사디크 성기사들도 있거든.”
-?!?!
흑흑이는 깜짝 놀랐다.
그가 없는 사이에 대체 대륙에 무슨 일이?
* * *
“수확할 시간이다!”
“흑흑. 힘들었다. 이번 농사는.”
농부 플레이어들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밭에 다가갔다.
이 농사 하나를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해왔던가.
아직도 날씨는 춥고 저 멀리에서는 토끼들이 난리를 치고 있지만, 적어도 이 영지는 그나마 안전했다.
토끼들은 결국 끝까지 오지 않은 것이다.
“토끼들이 왜 안 온 거지?”
“저 용 때문 아닐까?”
“확실히…….”
플레이어들은 처량하게 앉아서 망을 보고 있는 용용이를 보고 수군거렸다.
아름다운 금빛 가죽!
날렵한 몸의 형태!
드래곤다운 위엄까지!
가끔 몬스터들이 다가오는 순간 내뿜는 번개 공격은 농부 플레이어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김태현이 데리고 다닌다더니, 정말 강하구나!
저 정도라면 정말 토끼들이 위엄에 질려서 못 올 법도 했다.
몇몇 플레이어들은 지나가면서 용용이한테 기도를 하고 가거나 먹을 걸 놓고 갔다.
“…….”
용용이는 복잡한 표정으로 뭐라고 하려다가 고개를 숙였다.
반쯤 포기한 마음!
이미 용용이는 영지의 마스코트처럼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른 농부 플레이어들에 비하면 진짜 나은 편이지.”
“사실 여기가 의외로 좋긴 해. 시설이 적어서 불편한 거 말고는…….”
세금도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교단 NPC도 무슨 협박이라도 당한 것처럼 친절했다.
시설이 없기는 했지만 특정 제작 직업들은 엄청나게 많았다.
서걱, 서걱-
논밭을 오가며 농작물들을 챙겨가는 플레이어들.
“어?”
“어어???”
그들 사이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하, 하급 씨앗을 뿌렸는데 왜 상급 밀이 나오지?”
“하나 나와야 하는데 왜 다섯 개가……?”
웅성웅성!
농부들은 서로 떠들며 상황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아무도 버프 마법 같은 거 따로 안 썼다 이거지? 스크롤도 아니고?”
“그렇다니까.”
“그러면…….”
“아키서스의 축복이다! 그거밖에 없어!”
“야, 나는 근데 밀을 심었는데 토마토가 나왔어.”
“나는 밀을 심었는데 약초가 나왔는데…….”
“…….”
농부들의 얼굴은 복잡하게 바뀌었다.
“뭐, 뭐 일단 좋은 거잖아!”
“맞아! 양도 더 많고!”
“토마토도 품질 좋은 토마토 아니야?”
“그렇긴 한데…… 아니…… 왜 밀을 심었는데…….”
“일단 마저 챙기자!”
차곡차곡 쌓이는 농산물들.
유 회장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 앞의 농지에서 나올 어마어마한 생산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