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33화
“야, 언제까지 할 거야?”
“아. 자식. 거 더럽게 겁 많네. 좀 폼 나게 기다려봐. 방송에서 어떻게 보일지는 생각 안 하냐?”
“……!”
케인은 태현의 말에 자세를 고쳐 잡았다.
지금 분명 사람들은 둘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을 테니까!
-저 둘 뭐 하는 거죠?
-어…… 요리 재료를 모으는데요? 설마 지금 요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죠? 아무리 그래도 시간이 안 될 거 같은데요? 폭탄보다 훨씬 더 힘들 겁니다.
-김태현 선수가 요리 스킬이 높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당장 하기 힘들죠!
태현은 재료를 마지막으로 챙기며 말했다.
“그리고 시간 다 재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뭔 시간?”
“쟤네들 이동 시간. 15초 정도는 더 여유 있어.”
“그런 걸 어떻게!?”
“영상 보면서 체크 안 했냐? 넌 뭘 본 거야?”
“…….”
케인은 풀이 죽어서 고개를 숙였다. 원래라면 했을 불평도 나오지 않았다.
이건 태현의 말이 맞았다.
태현은 설렁설렁 보는데도 소름 끼칠 정도로 필요한 걸 완벽히 숙지하고 있는데, 그는 쓸데없는 것만 갖고 온 것이다.
“미안하다…….”
“풀 죽을 필요는 없고. 넌 쓸모가 있거든.”
“진, 진짜?”
“물론이지. 이번 결승전에서는 네가 가장 활약할 거 같다.”
“그런…… 그 정도까지는…… 잠깐만 이 새끼야. 그거 폭탄 이야기잖아?!”
칭찬에 헤벌레 하던 케인은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정색했다.
“눈치가 좋아졌군. 좋은 징조야. 가자!”
“야! 야!!”
* * *
“뭔……?”
도동수는 예상 못 한 상황에 눈을 깜박였다.
반대편에 상대 팀 사제 두 명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둘은 이미 도동수가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전혀 놀라지 않았다.
즉 이건 함정이라는 것!
무슨 스킬로 도동수의 위치를 파악한 게 분명했다.
“또 나만 노리는 거냐? 지겨운 자식들…….”
투덜거렸지만 도동수의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이걸로 들키지 않게 태현을 엿 먹일 수 있다!
아무리 제카스의 말이 그럴듯해도 훼까닥 돌아버린 척하고 태현을 찌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아예 매장당할 테니까.
대회를 포기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적당한 선에서 엿을 먹여야 했다.
역시 가장 좋은 건 최선을 다해 싸우는 척하면서 태현의 발목을 잡는 것.
어떻게 해야 하나 했지만 상대 팀을 보니 왠지 모르게 잘 풀릴 것 같았다.
“안 무섭냐? 우리가 이렇게 있는데?”
“16강부터 나만 노리는데 내가 쫄 거 같냐?”
“겁 좀 먹어야 할걸. 우리는 좀 차원이 다르거든.”
“……?”
말과 함께 사제 중 한 명이 도동수에게 스킬을 걸었다.
-우로슬의 신성한 포박!
느림의 신 우로슬의 권능 스킬!
잘 알려지지 않은 인기 없는 신. 그런 신의 권능 스킬을 상대 사제가 사용했다는 것에 도동수는 놀랐다.
“다른 신을 믿고 있는 거 아니었나?!”
“편법이 있지.”
[신성 권능이 당신의 몸을 묶습니다. 움직일 수 없습니다.]
단순하고 강력한 효과.
이동 불가.
그렇지만 패배를 각오한 도동수에게는 뭐든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할 건데?”
사실 사제 직업의 공격력은 다른 직업에 비해 많이 밀리는 편이었다.
물론 이런 대회에 나올 정도의 사제라면 당연히 공격 스킬 몇 개는 갖고 있었지만, 상대도 그 정도는 피해낼 수 있었다.
“이렇게 못 움직이게 하면 끝인 거 같냐? 응? 다 막아낼 수 있다.”
“아직 안 끝났다. 멍청한 놈아.”
말과 함께 다른 사제가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제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킬 이펙트.
그 오래 걸리는 시전 시간에 도동수는 강력한 스킬이라는 걸 깨달았다.
‘뭘 쓰려고?’
-트슬리프의 사악한 정신 지배!
[트슬리프의 사악한 정신 지배에 당했습니다. 상대가 당신을 조종합니다.]
“뭐야?!”
패배를 각오한 도동수였지만 메시지창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대 조종 스킬이라니.
이런 건 엄청나게 강력한 보스 몬스터나 갖고 있는 희귀한 스킬 아닌가.
이런 걸 플레이어가 갖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판온에서 불가능이란 없지. 우리가 이 대회를 위해 얼마나 준비했는지 아냐? 인기투표로 뽑힌 너희하고는 차원이 다르다고.”
사제 플레이어가 도동수를 비웃었다. 굴욕적이었지만 도동수는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강력한 사기 스킬을 얻었는데도 아직까지 소문이 안 나다니.
그동안 철저하게 쓰지 않고 버텨온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미안하지만 우리 주장 태수는 너희하고 그릇이 달라. 가끔 느끼는 거지만 태수와 적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니까. 자. 움직여! 다른 놈도 처리해야 하니까!”
사제의 명령에 따라 도동수가 달리기 시작했다.
두 사제의 연계 스킬로 태현 팀의 인원 구성과 위치를 파악, 그 후 도동수가 혼자 움직인다는 걸 확인하고 대기, 함정을 파서 도동수를 묶은 다음 시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명중률이 낮아 실전에서는 쓰기 힘든 사기 스킬까지 적중시켰다.
두 사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결승전은 그들의 승리가 틀림없었다.
* * *
“음…….”
태현은 낮게 신음성을 흘렸다. 그 태도에 케인은 불안해졌다.
“왜?”
“1경기는 진짜 질지도 모르겠는데…….”
“왜?!”
“저기 봐.”
태현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폐허의 뒤편에 탱커 두 명이 자리를 잡고 버티고 있었다.
어디서든 쇠사슬이 날아오면 바로 피할 수 있도록 엄폐물을 끼고 있는 자세.
“아주 노골적으로 시간을 끌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쪽에서 승부를 보려는 게 아니라 다른 쪽에서 승부를 보려는 건데…….”
“우리가 뒤집을 수 있잖아!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제까지랑은 좀 다르지.”
태현은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숲에 불을 지른 건 상대방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 할 수 있는 건 케인과 태현 둘이서 저 탱커 둘과 맞붙는 것 정도.
폭탄 정도는 적의 예상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차라리 재료를 더 모아볼까…….’
1경기에서 상대를 파악하고 2경기에서 승부를.
태현은 장기전을 각오했다.
도동수의 이상한 태도, 상대방의 전략, 이런 모든 것들이 강하게 경고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콰콰콰콰쾅!
“?!”
그 순간 저 멀리서 폭발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이세연 쪽인데…….”
태현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문제가 생겼군.”
“뭐? 왜?”
“이세연이 진 모양이다.”
“그걸 어떻게 알아?!”
“이세연은 저런 스킬 안 쓰거든.”
태현은 저 멀리서 보이는 스킬 이펙트만으로 누가 쓰고 있는 스킬인지 구분했다.
이세연과 김철수의 스킬이 아닌 다른 플레이어들의 스킬들만 저렇게 연속으로 터져 나온다는 건…….
‘저걸 알아봤다고?!’
멀리서 희미하게 색만 보이는 스킬 이펙트를 알아보고 구분했다는 것에 케인은 경악했다.
그리고 태현의 예측은 곧 맞아떨어졌다.
도동수를 데리고 간 사제 둘과 류태수가 이세연-김철수를 공격한 것이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세연은 도동수와 사제를 잘라내는 데 성공했지만 거기까지였다.
4:2.
4명이서 덤벼도 될 상황이었는데도 류태수는 덤비지 않았다.
탱커 둘이서 태현과 케인을 잡아놓고 남은 둘은 나뉘어져서 진지를 점령한 것이다.
확실하게 버프를 받은 다음에도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비교적 쉬운 케인을 무너뜨린 다음, 혼자 남은 김태현을 공격한다. 너희 둘이 잘해 줘야 해. 진지 버프를 두 겹이나 받았으니 어지간하면 버틸 수 있을 거다. 아무리 김태현이라도 없는 딜을 만들어 낼 수는 없을 테니까. 너희들이 맞으면서 버티면 우리가 김태현을 공격하겠다.”
태현이 감탄할 정도로 류태수의 계획은 맞아떨어졌고, 그들은 1경기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 * *
대기실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아무도 입을 열 것 같지 않은 분위기.
놀라운 건 태현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었다.
태현에게서는 보기 힘든 반응!
이세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김태현이라도 이번 패배는 좀 충격적이었나? 나도 저런 사기 스킬이 있다는 건 몰랐으니…….’
지금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팬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뭐 저런 스킬이 있냐!
-사기 아니냐?! 밸런스 패치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웃기고 있네. 스킬도 실력이지. 꼬우면 이런 스킬 배워서 오든가!
-저거 맞은 놈이 멍청한 거 아니냐? 딱 봐도 써먹기 힘들어 보이던데.
-아니, 작정하고 저거 위주로 플레이하면 상대할 방법이 있냐? 완전 경기 노잼으로 만드네.
-아, 이기면 그만이죠~
“자. 진 게 충격적이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상대방 스킬이 좀 사기긴 하지만 작정하면 막을 방법은 있을 거야. 도동수. 앞으로는 2, 2, 1이 아니라 3, 2로 움직이자.”
이세연의 방법은 간단했지만 효과적이었다.
저런 허점 많은 스킬은 같이 움직이면 맞추기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절한다.”
“…….”
도동수의 말에 이세연은 ‘야 이 개새끼야’ 하고 욕을 하려다 참았다.
오히려 분노한 건 케인이었다.
“야 이 자식아! 지금 누구 때문에 진 건지 알아?! 대회 내내 발목만 잡더니! 실력 없으면 나처럼 말이라도 잘 들으란 말이야!”
태현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건 자기 욕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마음을 정한 도동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난 내 마음대로 할 거다. 아. 내가 네 말을 듣게 하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지.”
“뭔데?”
“김태현이 내게 진심을 담아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면 한 번 생각해 보겠다.”
전원의 시선이 태현에게 쏠렸다. 태현은 웃으면서 말했다.
“미쳤냐?”
“그래. 그럴 거 같았어.”
이세연은 포기하고 태현에게 말했다.
“2경기에서는 너하고 케인 둘이 도동수를 따라 움직여줄 수 있겠어?”
“그렇게 하지. 큰 차이는 없을 거 같지만.”
“무슨 소리야?”
“저 자식. 아무래도 일부러 저러는 거 같단 말이지.”
“……!”
“뭐, 내 기분 탓일 수도 있으니까 2경기까지는 보자고. 나도 준비 좀 더 할 수 있으니.”
“잠깐만, 뭔가 이상하다면 지금 당장 대책을……!”
“괜찮아. 3경기부터 다 이기면 되니까.”
“야!”
이세연은 속으로 다짐했다.
이 대회만 끝나면 진짜 김태현 같은 놈들을 억지로 데리고 대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 * *
태현의 예측은 다시 맞아떨어졌다.
3명, 2명으로 나눠 움직이는 태현 팀에 맞서 팀 에이트는 4명, 1명으로 맞서 움직였다.
이번에는 시간을 끌 필요 없이 남은 1명이 다른 진지로 가고, 4명이 태현, 케인, 도동수가 있는 곳으로 찾아온 것이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침착하게 플레이한다면 상대의 스킬에 당하지 않고 싸워나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도동수는 다시 한번 돌격했다.
파파파파팟!
“야 이 개- XXX아!”
케인의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동수는 돌진했다.
팀 에이트 입장에서는 ‘이게 웬 떡이냐’ 싶을 수밖에 없었다.
냉큼 덥석 먹는 팀 에이트!
원래라면 ‘이거 뭔 함정 아닌가’하고 의심할 수준의 자폭이었지만, 도동수는 그대로 들어가서 잡혀주었다.
이렇게 되니 팀 에이트 입장에서는 도동수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저놈은 확실히 구멍이야!
“…….”
기세 좋게 달려가서 정신 지배를 당하는 도동수를 보며 태현은 확신했다.
‘저 자식, 결심했군.’
도동수는 결심한 것이다.
개망신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태현을 엿 먹이겠다고!
‘저 욕심 많은 자식이 제멋대로 결심했을 리는 없는데…… 저 자식을 설득할 수 있는 놈이 누가 있지?’
떠오르는 놈이 하나 있었다.
제카스!
‘그래. 그거면 말이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