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32화
그 말에 이동팔은 씩 웃었다.
“왜 웃어요?”
“불평하는 것치고는 믿고 있다 싶어서 웃었지.”
“실력은 믿어요. 실력은. 솔직히 실력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아니, 애초에 실력만 아니었으면 그런 배배 꼬인 사람하고 어울릴 일도 없었을 텐데!”
말하다 보니 이세연은 새삼 억울해졌다.
생각해 보니 태현 때문에 정말 시간 낭비를 하고 있었던 것!
판온 1에서 ‘너, 내 부하가 되라!’ 한 제안이 거절당한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 특유의 실력 하나 때문에 포기를 못 하고 계속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어느 곳이든 실력이 다지. 너도 알잖아? 연예계에도 성격이 괴팍한 사람들 많은 거. 그런데도 그런 사람들이 버틸 수 있는 건 다 실력이 있어서야.”
“별로 위로 안 되거든요?”
“김태현이 실력이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니.”
“실력이 없으면 상대도 안 했을 거라고요.”
이세연이 토라진 듯이 고개를 돌리자 이동팔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완벽한 것처럼 보여도 이세연은 저렇게 한 번 삐지면 오래갔던 것이다.
굳이 헤집어서 불을 지필 이유가 없는 것!
“그래. 조카야. 꼭 우승컵 좀 갖고 와주라.”
이동팔은 진심을 다해서 말했다.
판온 투기장 대회는 생각보다 훨씬 더 커다란 반응을 얻고 있었다.
괜히 프로게임단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며 접촉을 해온 게 아니었다.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이번 첫 대회가 끝나는 즉시, 판온 대회는 더 커다란 무대에서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이동팔은 확신했다.
예전 몇몇 굵직한 게임 대작들 이후, 한동안 시들했던 프로게이머 유행이 다시 불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유행의 선두에는 분명 김태현이나 이세연 같은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선수들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암암. 재능 있고 게임 잘하고 말 잘하고 예쁘고…… 물론 김태현도 메이크업만 하면 잘생겼고…….’
태현이 들으면 울컥할 소리를 속으로 하는 이동팔이었다.
“결승전에서는 최선을 다해야죠. 숨겨놨던 것도 다 써보고…….”
이세연은 말끝을 흐렸다.
과연 상대와 어떻게 싸워야 할까?
상대는 정보를 감추고 있는데 태현 팀은 정보가 많이 노출된 상태.
상대는 팀워크를 갖추고 있는데 태현 팀은 팀워크란 게 없는 상태.
거기에다가 노릴 약점까지 명확했다.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숨겨진 스킬들을 써서,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왠지 모르게 불길했다.
‘잘해낼 수 있을까?’
이세연의 불안함은 그대로 적중했다.
팀 에이트와의 1경기에서, 한국 대표팀은 대회에서의 첫 패배를 경험했다.
* * *
팀 에이트의 구성은 사제 둘에 탱커 둘, 딜러 하나라는 특이한 구성이었다.
마법사가 없는 대신 사제를 넣었고, 사제와 탱커를 짝지어서 2:2로 움직이는 식으로 싸웠다.
마법사가 주로 맡는 원거리에서의 폭딜은 할 수 없어도, 방어나 견제, 버티는 부분에서는 오히려 유리했다.
팀 에이트는 사제와 탱커 조합의 단단함으로 버티고, 남은 딜러 한 명이 날뛰는 식으로 싸워서 이겨왔다.
-팀 에이트 딜러는 만만치 않아. 우리랑 반대쪽 블록에서 올라왔지만 사람들 평가 보면 거의 김태현이랑 맞먹는 수준이더라.
류태수.
팀 에이트의 주장이자 광전사 계열의 직업으로 딜러를 맡고 있었다.
강력한 직업 성능과 화려한 컨트롤로 팀 에이트의 승리를 견인해 왔다.
사람들이 태현과 비교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회에서 역시 가장 주목받기 쉬운 건 딜러였고, 류태수는 그 딜러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다.
태현과 차이점이 있다면 태현은 기발한 계책을 사용해 약점을 극복하고 있었고, 류태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 팀과 힘을 합쳐서 최선의 전략으로 나온다는 것 정도.
게다가 류태수는 직업도 안정적이었다.
-일단 탱커-사제 콤비 하나를 나하고 김철수 씨가 맡을 거야. 바로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질 생각은 없으니 그건 걱정하지 말고.
-나하고 케인이 다른 콤비 하나를 맡으면 좋겠는데 도동수가 저 류태수를 혼자 상대해야 하잖아. 못 이기지 않나?
-…….
도동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태현은 거기서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수많은 적을 만들어 온 태현만이 느낄 수 있었다.
뭔가를 꾸미고 있는 놈이 풍기는 분위기. 그런 분위기가 도동수에게서 느껴졌다.
-시끄러워. 어차피 원한다고 우리 마음대로 맞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최선을 다하자. 뭐 생각한 방법 있어?
-1경기에는 아직 없어.
태현은 케인을 사용한 인간 폭탄 전략을 위주로 이것저것 숨겨 둔 패가 있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일단 1경기부터 쓸 생각은 없었던 데다가 도동수가 왠지 모르게 신경 쓰였던 것이다.
-그리고 너, 저쪽 팀 인터뷰는 봤어?
-안 봤는데.
-그래. 잘됐네. 안 봤다니.
-?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소리지?
태현은 케인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넌 봤냐?
-아, 아니. 영상만 내내 보느라…….
케인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엿보였다.
결승전을 앞두고 잔뜩 겁을 먹어서 상대 팀의 경기 영상만 계속 본 것이다.
-뭔 인터뷰를 한 거지? 나 죽인다고 선전포고라도 했나?
-보면 되잖아?
-그거 봐서 내가 뭐하겠냐. 이세연이 날 너무 잘 알아. 저렇게 말해도 내가 귀찮아서 안 볼 거라는 걸 아는 거지.
-…….
-에이, 뭐 나 욕한 거면 언젠간 알게 되겠지. 나 욕한 놈이 한둘도 아니고. 그리고 솔직히 나보다는 너 욕하지 않았을까?
-내, 내가 왜……!
그러나 이세연이 잘됐다고 말한 이유는 그런 게 아니었다.
류태수가 인터뷰에서 한 말 때문!
-존경하는 선수 말입니까? 판온 2에서는 없습니다. 전부 다 쓰러뜨려야 할 상대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판온 2에서라는 건, 판온 2가 아니면 있다는 건가요?
-네. 판온 1의 김태현 플레이어를 가장 존경했습니다. 판온 2를 시작하게 된 것도 김태현 플레이어의 영상을 보게 되어서입니다. 플레이 스타일도 많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 그러면 판온 2의 김태현 선수와도 비슷한 부분이 있네요. 둘 다 1의 김태현 선수 팬이라고 하니까…….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네?
-안일하게 팬이라고 말하면서 이름을 따라 지은 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자신감이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태현은 ‘하하 판온 1의 김태현과 이름이 같고 플레이 스타일이 겹치는 건 제가 그 김태현 좋아해서 그렇죠~’라고 꾸준히 변명해 왔었다.
물론 판온 1에서 당하고 2에서도 당한 놈들은 ‘어디서 그딴 거짓말을’ 하면서 의심하고 있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 변명을 류태수도 믿었다.
그리고 그게 류태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팬이라는 놈이 저렇게 가볍게 이름을 따라 하다니!
저런 건 자신감이 아니라 오만함과 경박함이다!
-결승전에서 확인해 줄 생각입니다. 어디 얼마나 잘나가서 그런 식으로 따라왔는지 말입니다.
-아, 네…….
진행자는 놀란 얼굴로 류태수를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인터뷰에서 류태수는 예의 바르고 과묵하게 대답해 왔었다.
‘예’나 ‘아니오’나 ‘잘 모르겠습니다’ 같이. 거의 재미없을 정도로!
그런 류태수가 결승전을 앞두고 태현과 싸우기 직전이 되니 저렇게 말을 길게 하는 것이다.
거의 선전포고 수준이었다.
실제로 이 인터뷰가 나가고 나서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팀 에이트 팬과 한국 대표팀 팬들의 대결!
-어디서 킬 수도 김태현보다 딸리는 놈이 입을 털어?
-그건 다른 팀원들이 킬을 못해서 그런 거지. 류태수는 팀원들한테 양보하거든? 자기 혼자 날뛰어서 이기는 것보다 팀이 이기는 게 더 우선 아니냐?
-개소리하고 있네. 그래서 류태수 경기 시청률 몇 퍼? 매번 김태현 경기한테 밀렸죠?
-결승전에서 보자. 게임을 시청률로 하냐!
그리고 그걸 본 이세연은 이마를 짚었다.
태현이 저걸 본다면 ‘뭐? 내 팬이었어? 하하 저런 기특한 녀석’ 하면서 예상 못 할 반응을 할 것 같았던 것이다.
‘……어차피 김태현은 이런 것까지 안 봤을 테니까 경기 끝나고 말하자.’
* * *
1경기가 시작되고 나서, 태현-케인, 이세연-김철수가 움직이고, 도동수가 움직였다.
도동수는 생각에 잠겼다.
경기 전날 찾아온 사람 때문이었다.
탐험가 플레이어, 제카스였다.
-잘나가네, 도동수.
-무슨 일이냐?
-내가 무슨 일로 왔겠어. 김태현 때문이지.
-…….
-판온 1에서 네가 왜 망했는지 잊은 건 아니지?
-닥쳐.
-설마 김태현이 ‘나는 판온 1 김태현이 아니다’라고 하는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다른 멍청한 놈들이면 몰라도 우리는 알잖아? 그런 놈이 세상에 둘이 있을 리 없다는 거.
제카스의 말은 뼈저리게 와 닿았다.
세상에 저런 놈이 두 명 있지는 않다!
-네 마음은 이해해. 지금은 대회 중이니까, 너한테도 중요한 대회니까, 그런 변명을 믿고 싶겠지. 스스로를 속이고 싶겠지.
-…….
-그렇지만 아니야. 이제 인정할 때라고.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봐! 네가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김태현 손바닥 위라고. 사람들 반응 봤지? 넌 이미 대회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김태현 뛰어넘기는 글렀어!
-닥치라고 했을 텐데! 어쩌라는 거냐!
-손바닥 위에서 노니까 그렇게 되는 거다. 손바닥에서 벗어나. 틀 밖에서 나와야지.
-뭐라고?
-그깟 대회 포기해 버려.
-……무슨 미친 소리를…….
-왜? 결승전에서 이기면 뭐가 달라질 거 같냐? 김태현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거고, 앞으로 김태현의 위치는 더 높아지겠지. 그걸 네가 직접 봐야 하는 거야. 기분이 어떻겠어?
빠드득!
저절로 이 가는 소리가 나왔다.
-그에 비해 결승전에서 진다면? 너는 그렇게 크게 타격이 없어. 물론 우승컵을 못 따는 건 아쉽지만 어차피 너 정도 되면 벌써 프로게임단 제의 정도는 들어왔을 테니까. 이미지? 이미 넌 김태현 때문에 이미지 망쳤다니까. 뭘 더 신경 써?
도동수가 대답하지 못하자 제카스는 계속 밀어붙였다.
-좋아. 내 말을 바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겠지. 그렇지만 이거 하나는 명심해. 너나 내가 김태현한테 왜 맨날 당했는지 알아? 너무 욕심이 많아서야.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고. 그러면서 김태현도 이기고. 김태현 그놈은 그런 욕심이 없어. 필요하면 다 던져 버리고 남을 엿 먹이러 달려온다고. 이기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해! 정신 차려!
제카스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진심에 도동수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경기 전, 이세연은 많은 걸 예상했다.
그중 하나가 도동수였다.
아무리 태현과 사이가 안 좋은 도동수여도, 결승전인 만큼 도동수도 이제까지와는 달리 조금은 협력할 거라는 게 이세연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예상이었다.
태현에게 판온 1에서 진 적이 없는 이세연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판온 1에서 태현에게 당한 랭커들이 어느 정도의 굴욕감과 원한을 갖고 있는지.
그건 태현에게 당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이었다.
마음을 굳힌 도동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 * *
“저거 뭔가 좀 수상한데…….”
“왜 그래?”
“느낌이 안 좋다. 대비를 해야겠어.”
“??”
태현의 말에 케인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왜 아군을 가리키며 수상하다는 거지?
“야, 진지 먹으러 안 가?”
“일단 채집 좀 하자.”
태현은 폐허 건물 근처를 돌며 먹을 수 있는 식재료를 찾아다녔다.
한시라도 빨리 중앙 진지에 가서 자리를 잡아야 하는 상황.
“그렇게 여유 부려도 되냐?!”
“상관없어. 이 정도로는 점령 못 하잖아.”
“그래도 좋은 자리가 있는데…….”
맵은 유적지 맵.
숲처럼 태울 만한 거대한 영역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유적 근처의 수풀에 식재료들이 간간이 있었다.
저번 경기 때처럼 잔뜩 장비를 챙겨 나온 태현이었지만 이번에는 식재료까지 모으다니.
‘대체 뭔 생각이지?’
케인은 초조하게 앞을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적이 먼저 와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