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31화
김춘식과 운 좋은 선수 한 명은 서로 화기애애하게 스파링을 했다.
주먹을 맞대고, 툭툭 치고…… ‘아, 여기선 이렇게 해야죠 춘식 씨’, ‘역시 선배님이십니다 하하’ 같은 대화가 오가는 훈훈한 스파링!
김춘식도 웃었고, 제작진들도 웃었고, 방송에 잡히게 된 선수도 웃었다.
뽑히지 못한 다른 선수들은 뒤에서 야유를 보냈지만.
“우우!”
“동작이 그게 뭐냐! 난 널 그딴 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은퇴해라! 퇴물 다 됐다!”
“……저 소리는 편집하자.”
PD의 말에 제작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살벌한 분위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아저씨, 제 착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쟤가 저 노려보고 있는 거 맞죠?”
태현은 반대편에 서 있는 김상철을 가리키며 양성규에게 물었다.
“그래. 맞다.”
“저 싫어하는 놈이 요즘 하도 많아서 기억하기가 힘든데, 제가 쟤한테 뭐 한 거 있습니까?”
“아냐. 쟤는 네가 한 거 없다.”
“그래요? 그러면 왜 저럽니까? 원래 저렇게 사나워요?”
“그것보단 그냥…… 음…… 네가 너무 잘나가서…….”
“설마 제가 너무 잘나가고 아저씨부터 시작해서 저기 선수들까지 저를 좋아하는데 그게 자존심을 건드려서 저렇게 열폭한다는 건 아니겠죠?”
말 한마디에 정확히 속을 짚어내는 태현!
양성규는 속을 내둘렀다.
평소에는 사람 마음을 전혀 모르는 놈인데, 싸울 상대가 되면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맞히는 재주가 있었다.
“……맞는데.”
“쯔쯔. 저렇게 정신 수양이 안 되어서야.”
“저래 봬도 나름 잘하는 애거든? 너 안 왔으면 괜찮았어, 인마! 왜 와가지고 젊은 애 속을 뒤집고 그래!”
“그게 제 잘못입니까.”
“어쨌든 내가 미안하다.”
양성규는 입맛을 다시며 사과했다. 어쨌든 김상철은 그가 가르치는 놈이었으니까.
“하하. 그 사과는 아직 하지 마시죠.”
“?”
사과를 넣어두라는 태현의 말에 양성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 말뜻을 알아듣고 새파랗게 질렸다.
“……야! 야!! 적당히 해라!”
“아니, 저는 적당히 할 건데…… 상대가 적당히 해야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상대도 나름 여기서 먹고사는 선수인데 제가 어떻게 손대중을 해요. 그건 실례죠. 언제든지 최선을 다해서 하라는 게 아저씨 가르침이었잖습니까.”
“그건 다른 놈 전용이고 넌 아냐! 넌 좀 적당히 해도 돼!”
그러나 태현은 이미 귀를 막고 있었다.
양성규는 급격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 * *
“김태현 선수는 어느 정도로 잘하는지 궁금한데요. 사실 프로게이머 하면 육체적인 것과는 거리가 좀 있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렇긴 한데 김태현 선수는 덩치부터가…….”
뒤에서 방송용으로 떠드는 대화는 무시하고, 김상철은 눈빛을 불태웠다.
상대를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체육관에 오래 다녔고 선배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니 분명 실력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보다는 아닐 거다!’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김상철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재빠른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바로 원투!
퍼퍼퍽!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드기어와 글러브까지 서로 끼고 있었지만 제대로 작정하고 치면 충격이 없을 수가 없었다.
“??”
김상철은 놀랐다.
‘뭐야? 이걸 그냥 맞아?’
피할 줄 알고 가볍게 들어간 건데 바로 맞다니.
김상철은 곧바로 기어를 올렸다. 숨 쉴 틈 없이 주먹이 치고 들어갔다.
“상철아! 1절만 해라!”
“너 그러다 죽는다!”
선배들의 진심 담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 왔지만 김상철에 귀에는 닿지 않았다.
당황한 건 PD였다.
PD는 양성규에게 물었다.
“저거 저래도 되는 겁니까? 말려야 하지 않아요? 김태현 선수가 다치겠습니다!”
PD 눈에는 전문 운동선수가 김태현을 두들겨 패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치긴 누가…… 됐으니 그냥 보기나 해요.”
쉭-
‘마무리!’
김상철은 태현의 턱을 노리고 일격을 찔러 넣었다.
이미 충분히 두들겨 맞은 상황에서 급소까지 당한다면 다리가 풀려 그대로 넘어지리라.
“어?”
그러나 손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들려오는 건 나지막한 목소리.
“다 했냐?”
오싹!
두려움을 느낀 김상철은 곧바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충격이 몸에 들어왔다.
“컥!”
제대로 들어간 바디 블로우. 김상철의 몸이 ‘ㄱ’ 자로 꺾였다.
‘말도 안 돼……!’
원래 이런 몸통을 치는 공격은 꾸준히 때려야 데미지가 쌓이는 공격이었다.
일격에 숨통을 끊는 공격이 아닌 것!
게다가 지금 평소보다 두꺼운 글로브까지 끼고 있는데도 이런 충격이라니.
“아이고!”
“끝났다!”
“저 멍청한 놈! 1절만 하라니까!”
선배들의 탄식이 어질어질한 귓가로 이제야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 방에 선수가 비틀거리자 PD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물었다.
“저, 저건 뭐 한 겁니까?”
“태현이 저놈이 갖고 논 거지 뭐겠습니까.”
양성규는 한숨을 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김상철이 신나서 덤비는 동안 태현은 공격을 다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김상철을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김상철이 숨을 들이쉬는 타이밍에 몸통에 정확히 카운터!
“원래 여기는 맞아봤자 크게 타격이 없기는 합니다. 상철이 정도로 단련되었으면 더더욱. 그렇지만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부분을 치면 훅 가는 거죠.”
“그런……!”
PD는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보다 김태현 선수는 뭐 저런 걸 알고 있는 거야?’
이쯤 되면 프로게이머 선수가 아니라 격투기 선수 아닌가 싶을 정도!
PD가 감탄하자 양성규는 더 설명을 시작했다.
이런 고급 기술을 실제로 보고 설명해 주는 건 언제나 기쁜 일!
PD는 고급 기술 설명에 감탄했는지 입을 벌리고 더듬거렸다.
“어, 어어…….”
“아니, 아직 어려운 건 시작도 안 했는데 뭘 그리 감탄을…….”
“저,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태현이는 괜찮다니…… 잠깐!”
양성규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지금 말려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다면 그 상대는 뻔했다.
퍼퍼퍼퍼퍼퍽!
김상철이 경쾌하게 구타당하고 있었다.
“어딜 쓰러지려고, 일어서, 인마!”
무릎이 풀려서 쓰려지려는 김상철에게 붙어서 몸으로 밀어 세운 후 다시 때리는 태현!
그걸 본 선배들이 혀를 내둘렀다.
“저, 저거 또 눈 돌아갔다!”
“저 미친놈 저거!”
“저러면서 뭘 적당히 해준다는 거야! 저 쓰레기 같은 놈!”
싸우기 전에는 ‘하하 적당히 할게요’ ‘하하 선배님인데 제가 어떻게 때리겠어요’ 이러던 놈이, 시작만 하면 눈이 돌아가서 덤벼드니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달달달달-
아까까지만 해도 방송국 사람들을 보고 신이 나서 행복해하던 김세형은 다리를 떨고 있었다.
아까는 정말 봐주면서 한 거였구나!
“수, 수혁아. 나는 이만 가볼 테니까…… 선배님한테는 잘 말…….”
“제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전 말 못 합니다!”
전에는 말 잘 듣던 정수혁이 정색하며 거절!
“너 왜 이렇게 차가워졌냐?!”
그사이 양성규가 재빨리 올라가 태현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만해, 인마!”
“아. 아저씨 오셨습니까?”
“오긴 뭘 와! 아오, 이놈 진짜! 적당히 하는 걸 모르냐!”
“하하. 아까 한 사과 지금 다시 하실래요?”
“내려가!”
양성규가 태현의 귀를 잡고 끌고 내려가는 걸 보며, PD는 작게 말했다.
“야, 이건 편집하자.”
PD가 원한 건 프로 선수를 상대로 멋지게 싸우는 태현이었다.
물론 이기는 건 무리라고 해도, 최선을 다해서 버티면 알아서 다른 선수들이나 관장인 양성규가 ‘태현이가 참 잘하지. 일반인인데 저 정도야!’라고 말해줄 것 아닌가.
그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그림이 나왔다.
게임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겉모습과도 어울리는 캐릭터 아닌가.
근데 이건 좀…….
이미 맛이 간 프로 선수를 상대로 넘어지지도 못하게 하고 두들겨 패는 건 좀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태현이 악당!
“어떻게 잘 쓸 방법 없을까요?”
“야. 저걸 어떻게 잘 포장해. 그냥 편집해. 편집.”
* * *
“김태현이 다른 방송에 나왔다고요?”
“그렇다니까. 생각지도 못하게 연락을 받아서 깜짝 놀랐네.”
“아. 그쪽 PD 만났을 때 제가 김태현 이야기를 하긴 했어요. 판온 좋아하는 거 같아서 김태현하고 같이 하라고 말했었거든요.”
“그랬어, 우리 조카? 정말 똑똑하다니까.”
이세연은 이동팔과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PD한테 연락을 받은 이동팔은 감탄했다.
정말 알아서 일을 물어오는구나!
연락을 해온 PD는 태현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물론 판온을 같이 하려는 욕심 때문에 저러는 거 같기는 했지만, 저 칭찬이 모두 다 겉치레는 아닐 것 아닌가.
“김태현이 독립해 살면 바로 내보낼 테니까 연락 달라고 하던데. 그리고 운동 좀 하면 재밌을 프로도 추천하더라.”
“김태현이 운동 잘할 거 같긴 해요.”
이세연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봐도 운동 잘할 것 같은 겉모습 아닌가.
“그런데 좀 자제를 시켜야 할 거 같다는데 그건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
둘 다 PD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다는 거니까 나쁜 건 아니겠지. 다음에 <생존의 법칙>도 내보낼 생각이었는데 잘됐어. 운동 잘하면 거기서도 잘하겠지.”
“어…… 김태현이 근데 거기 나간다고 했나요?”
“아직 말 안 했는데, 나간다고 하면 좋은 거 아니야? 거기 인기 얼마나 좋은데. 다른 사람들은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잖아.”
‘김태현은 아닐 거 같은데’라고 말하려던 이세연은 멈칫했다.
괜히 말해봤자 그녀만 귀찮아질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네요!”
“그렇지? 그래서 우리 조카. 대회는 결승만 남았지? 어떻게 될 거 같아.”
“어렵네요. 반반 정도?”
이세연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현재 남은 건 결승전뿐.
그리고 결승에 올라온 상대는 같은 한국 팀인 팀 에이트였다.
덕분에 해외에서는 ‘게임 대회는 전 세계가 참여해서 결국 한국인이 우승하는 대회’, ‘한국은 밸런스 맞게 팀 좀 줄여서 내보내자’ 같은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반반 정도? 왜?”
“상대는 나름 치밀하게 전력을 숨겨서 올라왔거든요. 하는 거 보면 알 수 있어요. 몇몇 스킬들은 숨겨놓은 게 분명해요. 그런데 우리는…….”
이세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도동수란 친구가 그렇게 속을 썩여?”
“도동수도 그렇고 그냥 팀워크 자체가 없으니까…….”
“신기하단 말이야. 나도 그렇고 관중들은 다들 팀워크 대단하다고 생각하던데.”
겉으로만 보면 정말 치밀한 계획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
“결과적으로 그렇게 보이게 만드니까 어이가 없는 거예요! 김태현은 정말 그런 거 생각 하나도 안 하고 하거든요. 이미지 같은 건 신경도 안 쓰는데 사람들은 알아서 다 좋게 봐주고…… 아. 정말. 도동수랑은 계속 더 사이가 안 좋아지고. 가끔은 팀원 중에서 저 혼자만 고민하는 거 아닌가 싶다니까요.”
이세연은 투덜거리며 불평했다. 이동팔은 속으로 웃었다. 완벽에 가까운 조카가 저렇게 감정을 보여주는 일은 드물었던 것이다.
“우리도 숨겨놓은 스킬이야 있겠지만 우리 약점은 너무 명백해요. 이건 숨길 수도 없고요.”
따로 노는 팀워크.
상대방이 안다면 너무 노리기 쉬운 약점이었다.
이제까지는 기발한 비책과 운으로 어떻게든 헤쳐 나왔지만 과연 결승전에서도 통할까?
상대방도 이제까지 경기를 전부 다 돌려보고 전력을 다할 텐데?
“그러면 반반 수준이 아니지 않을까? 훨씬 더 힘들 거 같은데.”
“……김태현도 있으니까 반반은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