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26화
“…….”
에반젤린 뒤를 따라오며 지원하려던 창술가는 입을 떡 벌렸다.
스르릉-
그리고 태현이 천천히 다가왔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압박감!
“으, 으, 으, 으아아아!”
창술사는 반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덤벼들었다.
물론 세상은 냉정했다.
* * *
캡슐에서 나와, 두 팀은 서로 마주보았다.
경기가 끝나고 이어지는 훈훈한 악수 시간!
물론 패배한 팀의 마음은 전혀 훈훈하지 않았지만, 방송국에서 그런 걸 신경 쓰지는 않았다.
에반젤린은 웃으면서 태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주 잘~ 하더라. 아주 잘~ 응? 좋냐? 좋냐?!”
얼굴은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었지만 말은 정반대!
물론 화면만 잡고 있는 카메라는 둘의 대화는 잡아내지 못했다.
-명경기였던 만큼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이게 프로게이머의 우정인 거죠. 저도 현역 때 많이 느꼈습니다. 경기 때에는 죽어라 싸워도, 경기가 끝나면 느낌이 확 달라지거든요.
에반젤린은 손에 힘을 꽉 주고 살벌하게 속삭였다.
물론 태현이 그런 압박에 굴할 사람은 아니었다.
“죽어. 두 번 죽어. 세 번 죽어.”
빠르게 영어로 저주를 내뱉는 에반젤린의 모습에, 케인이 궁금하다는 듯이 속삭였다.
“저거 뭐라는 거냐?”
“넌 ‘die’도 못 알아듣냐?”
“…….”
케인은 부끄러운 얼굴로 물러섰다.
한바탕 쏟아내고 나자 시원해졌는지 에반젤린은 한숨을 푹 쉬더니 저주를 멈췄다.
“좀 제대로 치고받고 하고 싶었는데…….”
“네가 강한데 뭘 제대로 치고받아. 내가 ‘우리 한 대씩 서로 때리기로 승부 내자’라고 했으면 받아줬을 것도 아니면서. 너무 치사하지 않냐? 자기 유리한 대로 싸우자니 이거 완전 양심 없…….”
“…….”
말이나 못 하면!
에반젤린은 필사적으로 손에 힘을 더 주려고 했지만 태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윽! 윽! 으으윽!”
“그거 해봤자 의미 없어. 내가 너보다 힘 스탯 높거든.”
“여긴 현실이거든?!”
“현실이라고 딱히 달라지는 건 없는데…… 그보다 네가 좋아할 만한 소식이 있지.”
“너 판온 접을 거야?”
“흠. 불운 페널티를 막는 아이템을 만들었는데…… 알겠다. 아이템은 파괴해야지.”
“잠, 잠깐만! 잠깐만!!”
에반젤린은 다급히 말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불운 페널티를 막는 아이템을 만들었다고?”
“네가 날 위해 기껏 사디크 교단과 싸워줬는데 얻은 건 불운 페널티라서 내가 마음이 좀 아팠지.”
“……아. 그러셔.”
전혀 믿기지 않았지만 에반젤린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못 믿는 것 같은데 알겠다. 아이템은…….”
“아냐! 믿어! 믿어요! 믿고 있어요!”
“어쨌든 내 교단이 뭐냐. 행운의 교단이잖아.”
“그리고 도박의 교단…….”
“시꺼. 그래서 이것저것 찾다가 불운 페널티를 막는 아이템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
“으아앗……! 줘! 줘! 주세요!”
“어허. 방금 나한테 접으라고 한 사람이 누구더라?”
“잘못 들은 거야!”
“나보고 죽으라고도 하지 않았냐?”
“경기장 내에서 죽으라고 한 거지! 경기 도중에는 그런 소리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너 좀 뻔뻔해진 거 같다.”
태현은 감탄했다.
사람은 성장하는구나!
처음 만났을 때는 완전히 아싸 그 자체였던 에반젤린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말할 때 매우 어색해하던 에반젤린이 이렇게 변하다니.
게다가 저 뻔뻔함까지!
“누구와 싸우면서 많이 배웠지.”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훌륭한 사람 같군. 많이 배우는 게 좋겠네. 뭐 어쨌든…… 교환하자.”
“응?”
“설마 이걸 그냥 받아가려는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설마? 정말로? 와, 양심 없냐?”
“…….”
‘저 자식한테는 절대로 약점을 잡히면 안 돼!’
정말 끝까지 뽑아내는 태현이었다.
“……뭘 원하는데?”
“별거 아니야.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리고 태현은 3분 정도 원하는 걸 길게 말했다.
“……간단하게?”
“간단하잖아. 반지 내놔. 영지전 붙을 때 뱀파이어들 좀 데리고 와.”
“영지면 네 교단일 텐데 뱀파이어들 데리고 가도 되나……?”
“뭐 어때. 사디크 교단 NPC들도 있는데.”
“영지에 사디크 교단 NPC들이 있다고?!”
에반젤린은 깜짝 놀랐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긴 이야기가 있지.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네가 제안한 거는 다 받아줄 수는 있어. 근데…….”
“?”
“그 반지는 내가 퀘스트 맡기고 강화하고 그러느라 교환불가 아이템 되어서 이제 못 주는데…….”
“…….”
갑자기 싸늘해지는 분위기.
태현은 재빨리 에반젤린의 손을 놓으려고 들었다.
꽉!
그러나 이번에는 에반젤린이 태현의 손을 붙잡았다. 태현은 정색하며 말했다.
“왜 이러세요? 손 놓으세요. 고객님.”
“우리 친구잖아?”
“친구 아닌데? 난 날로 먹으려는 친구 없는데? 그보다 언제부터 네가 이렇게 친근하게 사람을 대하고 그랬지? 아싸였던 때로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태현의 정신 공격은 무시하고, 에반젤린은 자기 할 말에 집중했다.
저 아이템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지 말자! 뱀파이어들 데리고 가서 도와줄게! 뭐든 도움이 될 거야! 걔네 진짜 세다고!”
“아, 안 사요. 안 사.”
“다른 거! 다른 거 원하는 거 없어?!”
쿡쿡-
케인이 태현의 옆구리를 찔렀다.
“?”
“너희 언제까지 악수할 거냐?”
“…….”
주변을 둘러보니 해설자부터 시작해서 관중석에 있던 모두가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다른 선수들은 다 악수했고, 거기에 해설자들이 대회 관련 이야기까지 마무리 지었는데 아직도 악수한 채로 떠들던 둘이었다.
* * *
“크큭, 크크큭, 크크크큭…….”
케인은 실실 웃으면서 캡슐에 접속했다.
판온을 하고 나서, 케인은 감히 지금을 전성기로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레드존 길드?
그건 전성기도 아니었다.
그냥 착각이었을 뿐!
지금 위치를 생각해 보면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PK 플레이어로 푼돈 뜯고, 개인 방송으로 자잘하게 관심을 받는 것에 만족했었다니.
지금을 보라!
새롭게 태어났고,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투기장 대회에서도 결승에 진출했다.
게다가 평가도 좋았다.
-이번 경기에서는 케인 덕분에 이긴 거지. 봤냐?
-1경기 때 에반젤린한테 계속 두들겨만 맞던데?
-그게 다 함정인 거야. 케인이 그냥 싸울 수 있는데 그러면 상대가 안 속으니까 맞는 척 했던 거지. 아니면 왜 그렇게 맞기만 했겠냐? 설마 케인이 실력이 딸려서 그랬겠어?
“…….”
-어쨌든 3경기 때 플레이 보고 난 감동 먹었다.
-난 2경기가 좋던데.
-아. 도동수도 대단했지. 연기 대단하지 않았냐? 좀 무시했었는데.
-캐나다팀이 그냥 속아서 덤벼들었잖아.
-함정 파고, 언데드 소환 취소해서 상대방 끌어들이고…… 진짜 함정 제대로 팠다 싶더라.
-케인 정도면 세계 최고 탱커 아니냐?
-케인 정도면 그럴 법하지.
‘세, 세계 최고 탱커? 그, 그런…….’
듣기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칭호!
-케인 근데 너무 싸가지 없어서 재수 없어. 다른 팀한테 시비나 걸고 다니고.
-실력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아니야, 이 새끼들아……!’
케인의 이미지는 대충 ‘실력은 있지만 싸가지 없고 성격 더럽고 나대기 좋아하는 놈’이 된 것 같았다.
덕분에 이런 걸 좋아하는 팬들은 확실히 생겼지만, 케인은 뭔가 분했다.
저건 다 김태현이 한 짓인데……!
‘후. 아니야. 나는 지금에 만족해. 나는 지금에 만족해…… 더 욕심을 부리지 말자…… 도동수 꼴 난다…….’
나날이 느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실력.
케인은 마음을 다스리는 데 성공하고 고요하게 숨을 내쉬었다.
일단 대부분의 팬들이 그의 실력은 인정해주고 있었으니까.
대회 결승까지 진출하자 주변 사람들의 태도도 확 달라진 게 느껴졌다.
-아들, 이것 좀 먹으면서 해. 엄마는 아들을 응원한단다.
-덕수야. 나도 판온 하는데 같이 하지 않…… 어? 내가 누구냐고? 우리 같은 고등학교 나왔잖아! 나 기억 안 나?!
-여보세요. 덕수니? 나 다혜야. 응. 기억나지? 이번 대회 결승에 진출한 거 축하해. 다름이 아니라 좋은 보험이 있는데…….
생각해보니 뭔가 좀 이상한 것들도 있었지만 일단 긍정적인 반응이긴 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프로게이머 팀 제안이 안 온다는 건데. 왜 안 오는 거지? 올 법도 한데…….’
케인은 그게 의아했다.
본선 진출한 팀의 플레이어들에게는 벌써 소문이 돌고 있었다.
새로 창단할 팀에 들어오라는 제의가 오가고 있다고.
그런데 케인에게는 한 번도 오지 않는 것이다.
태현에게 이걸 물어봤더니 태현이 안쓰러운 눈으로 케인의 어깨를 두드리고 가버렸다.
‘음, 결승 전이라 괜히 방해될까봐 연락을 안 하는 걸까? 그래. 기다려봐야겠다! 안 올 리가 없지!’
자기가 ‘아, 핸드폰 안 바꿔요! 뭐든 간에 안 사요!’로 끊어버렸다는 건 모르고 있는 케인이었다.
“좋아. 오늘도 연습이다!”
케인은 주먹을 부딪치며 무기를 들었다.
요즘 접속하면 하는 건 스킬 연습이었다.
투기장 대회 때문에 퀘스트를 하거나 필드에 나가는 건 좀 조심스러웠다.
저번에 팬인 척 하고 습격당했던 건 아직도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는 김태현 같은 놈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이다.
“흡! 흡! 흐읍!”
노리는 건 스킬 레벨.
도중에 <아키서스의 노예>로 전직한 케인이었기에 스킬 레벨이 좀 불리한 편이었다.
다행히 아키서스의 노예 직업이 이름만 좀 그럴 뿐이지 직업 자체는 좋아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케인은 원래 스킬 레벨을 높이는 것보다 레벨업을 우선시했다.
그게 보통 정석이기도 했고.
그러나 태현의 조언은 달랐다.
‘스킬 레벨 올려 이 멍청한 놈아. 레벨 낮은 놈한테 지고 싶냐.’
간단하지만 와닿는 조언!
어쨌든 태현은 판온에 있어서는 케인보다 뛰어난 놈이었고, 케인은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스킬 훈련을 하고 있었다.
폼은 좀 안 나지만…….
“이야앗! 검술 스킬! 검술 스킬 올라라!”
지나가는 사람들은 케인을 보며 수군거렸다.
“저거 누구야?”
“케인 아니야? 케인같이 생겼는데.”
“케인이 저러고 있겠냐. 그냥 투기장 놀러 온 초보자겠지. 케인 비슷하게 입었네. 현질했나?”
남들의 말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케인은 움찔했다.
그러나 멈추지는 않았다.
에반젤린이 아싸에서 인싸로 성장했듯이, 케인도 태현과 같이 지내면서 얼굴의 철판 두께가 두꺼워진 것이다.
저 정도 비난은 아무렇지도 않다!
“야.”
“?”
케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여자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나 알지?”
“모르는데요?”
“……아오 진짜! 저번에도 그래놓고 끝까지! 선배인 내가 먼저 말을 걸어줬는데도! 너 진짜 뭐가 문제야?!”
울컥한 여자가 분노를 터뜨리자 케인은 당황했다.
왜 처음 보는 사람이 이러는 거지?
찬찬히 여자를 훑어보니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파이브 걸즈의 하연이랑 닮은 거 같은데, 외모 커스텀을 비슷하게 한 건가? 실력이 대단하네.’
물론 파이브 걸즈의 하연이 맞았지만 케인이 그렇게까지 상상력이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 상상할 능력은 더더욱 없었고!
“진짜 누군지 모르겠는데요?”
케인은 일단 조심했다.
혹시 그의 팬이나, 현실에서 아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 이 자식이 진짜……!”
“아니, 진짜 누구냐고요!”
“네 선배! 네 선배라고!!”
여자가 목소리를 높이자 케인도 억울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뭔 선배! 어디 선배! 나 졸업한 지가 언젠데!!”
“회사 선배라고!!!”
“나 백수거든!!! 취직한 적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