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22화
그 쓸모없는 아이템을 어디에나 쓰나 했더니, 이런 데에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르바노그의 징표:
카르바노그의 힘이 담긴 징표입니다. 성스러운 이 징표가 있는 땅에는 토끼가 감히 접근하지 않습니다.
‘일단 이 징표를 땅에 깔기만 해도 되려나?’
농부들이 농사를 짓겠다고 온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는 평생 그렇고 그런 놈들만 우글거릴 줄 알았는데…….
농부와 농지라니.
뭔가 좀 그럴듯한 영지 같지 않은가!
물론 태현 본인이 영지를 어중간하게 발전시켜봤자 효과 보기 힘들 것 같아서 특화형 영지를 노리기는 했다.
그래도 이렇게 다른 뜻 있는 사람들이 와서 영지를 발전시켜주겠다고 하다니.
‘역시 착하게 살면 복이 오는 건가!’
태현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이 토끼 난리가 태현 때문이기는 했지만!
* * *
-용용아, 네가 할 일이 생겼다.
-오오, 무슨 일인가, 주인이여!
오랜만에 듣는 용용이의 목소리.
요즘 불러낸 일이 없어서 그런지 용용이의 목소리는 활기찼다.
사실 용용이를 불러내지 못한 데에는 사정이 있었다.
일단 투기장에는 용용이를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소환수를 쓰는 것도 일단은 가능했지만 일단 투기장 안에서 스킬을 써야 하는 것이다.
용용이처럼 한 번 소환해서 영원히 데리고 다니는 경우는 불가능!
게다가 던전에서는 기습을 하느라 용용이를 꺼내지도 못했고, 그다음에는 토끼를 공격할까 봐 용용이를 못 꺼냈으니…….
한동안 용용이가 할 일 없이 안에서 심심해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인가! 가능하면 멋지고 보람찬 일이었으면 좋겠다!
-어…… 음. 멋지고 보람찬 일이지!
-오오, 무엇인가?!
-……토끼 좀 잡아줄래?
-…….
갑자기 싸늘해지는 분위기.
-토끼?
-그래. 토끼.
-아, 혹시 저번 던전에서처럼 그 강력한 토끼들인가?
-아냐. 그냥 중앙 대륙의 약한 토끼들이야.
-……어째서! 어째서인가! 왜!
-토끼 잡는 것도 중요한 일이야!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 골드 드래곤의 고귀한 혈통을 잇는 내가 그런 일이나 해야 하겠는가!
-야, 신의 화신이 직업인 나도 더러운 짓 하면서 살잖아! 드래곤 정도면 축에도 못 낀다!
혈통 이야기를 꺼내니 태현도 혈통 이야기를 꺼냈다.
-주인이여, 나를 조금 더 여기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거다.
-이미 나 싫어하는 신들 많아서 별로 안 무섭다.
아키서스의 이름을 말하면 좋아하는 신보다 싫어하는 신들이 더 많을 것 같았다.
거기에 악마들까지 추가로!
무슨 놈의 신이 이렇게 원수들만 잔뜩 만들어놨는지…….
-신이 아니라 골드 드래곤 장로님께서 천벌을 내리실 거다.
-!
그 말에는 태현도 움찔했다.
드래곤.
판온의 최강 몬스터 중 하나였다.
아직까지 드래곤을 잡은 파티는 없었고, 한동안도 없을 예정이었다.
가볍게 잡아도 추정 레벨이 500은 넘는다는 게 정설!
그런 드래곤 이름을 갖고 오니 태현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장로님이 너를 많이 챙겨주나?
태현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물론 용용이는 그걸 깨닫고 이용할 만큼 영악하지 못했다.
그랬다면 골드 드래곤이 아니라 블랙 드래곤이었을 것!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일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면 장로님이 나한테 천벌을 내리지는 못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만약 아신다면 화를 내실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가서 토끼 잡아라.
장로고 뭐고 간에 별 위험 안 된다는 걸 깨닫자 바로 차가워지는 태현의 목소리!
-…….
이걸로 용용이는 세상을 조금 더 배우게 되었다.
* * *
-주인이여! 이동 수단! 내가 가면 이동 수단이 없지 않은가!
-오토바이 있다.
-부숴버리겠다!
끝까지 저항했지만 용용이는 태현을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저주에 가까운 푸념과 함께 용용이는 영지로 떠났다.
그 슬픈 뒷모습에는 태현도 살짝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용용이만 한 인재가 없는 것!
갈락파드가 데리고 온 놈들이 어떤 수준인지는 아직 몰랐기에 전력을 평가할 수 없었다.
그리고 태현 일행은 다 여기에 있었고, 쉽게 써먹을 수 있는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대체로 전투력이 부족했다.
사용 기회가 한 번 남은 귀족 기사단과 영지에 있는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쓰고 싶지 않았다.
귀족 기사단은 아까워서,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은 못 미더워서!
즉 지금 당장 할 일이 없고 영지를 지킬 능력이 되는 건 용용이 정도밖에 없었다.
강력한 번개 마법을 쿨타임 없이 닥치는 대로 퍼붓는 강력함.
보통 마법사는 방어력이나 HP가 부족해서 근접전이 힘들었지만 용용이는 그것도 아니었다.
드래곤다운 맷집까지 보유한 것이다.
마계에서 그렇게 태현의 경험치를 뺏어 먹으며 레벨 업을 한 덕분에, 몬스터로 따지면 레벨 200 정도는 예전에 넘긴 상태였다.
‘용용이를 쓰기가 애매하긴 해…….’
용용이는 정말 강력한 소환수였다.
이렇게 다루는 게 양심에 찔릴 정도로.
어지간한 소환수는 친밀도 개념이 있어서, 주인이 멋대로 다루거나 마음대로 다루면 소환수도 반항을 하거나 말을 안 듣거나 했다.
그런데 용용이는 신수라 그런지 그런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강력함은 무시무시할 정도고, 다루는 건 플레이어 마음대로.
소환수 관련 직업 플레이어가 본다면 군침을 질질 흘릴 것이다.
문제는…….
‘안 그래도 경험치가 부족해 죽겠는데 용용이가 있으면 경험치를 나눠야 한단 말이지.’
소환수 직업이라면 소환수와 같이 성장하는 스킬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태현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경험치를 용용이와 같이 싸우면 용용이와 나눠 먹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용용이 같은 경우에는 워낙 스킬 범위가 넓어서 경험치 먹기에는 최적화!
즉 어지간한 사냥 때에는 용용이를 꺼낼 수 없었다.
용용이를 쓸 만한 상황은 정말 위험한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거나, 작정하고 목숨 건 PVP를 할 때 정도?
‘미안하다. 나중에 데리고 와줄게.’
* * *
“어…… 도와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저, 저건 대체 뭐죠?”
파워 워리어 길드원(할 일 없는)들과 같이 밭을 갈던 농부 플레이어들은 참을 수가 없어서 손을 들었다.
뒤에서 빤히 노려보고 있는, 황금색 드래곤 때문이었다.
“태현 님이 데리고 다니는 소환수입니다.”
“근데 왜 여기 있는 거죠?”
“우리를 엄청 노려보는데…….”
그러나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태연했다.
“하하. 안 문다고 하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 물까봐 걱정한 게 아닌데……!”
농부 플레이어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왜 저 길드원들은 저렇게 태연한 거지?
“일, 일단 농사나 짓자.”
“맞아…….”
영지가 적응이 안 되기는 했다.
다른 도시와 달리 광장에는 약간 미친 것 같은 플레이어들이 ‘히히 강화 발싸!’ 이러면서 돌아다녔고, 몇몇 필요 시설들은 없고, 교단 NPC들은 돌아다니면서 ‘아키서스 믿어라! 아키서스 믿어라!’ 하고 외치고 다니는 영지였으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자유롭게 땅을 주는 영지는 드물었다.
농사지을 땅 하나 얻으려고 해도 골드를 내고 퀘스트를 깨야 하는 게 대도시!
농부 플레이어들이 어지간하면 이동을 안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맞다. 기껏 아키서스 믿었는데 골드 좀 내고 사제 부를까?”
“그럴까. 가입도 했으니…… 근데 아키서스 효과가 뭐지?”
“어…… 운이 좋아진대. 뭐 만들 때 더 좋은 거 나오고, 성공 확률도 높아지고…….”
“그럼 밭작물도 더 좋아지고 그러나? 데메르 교단이랑 비슷한 건가?”
교단에 적당량의 골드를 기부하면 사제들을 부를 수 있었다.
땅에 축복을 하는 것!
농부 플레이어들은 이런 걸 애용했다. 골드 좀 내고 농작물에 버프를 거는 건 남는 장사였다.
그렇지만 교단마다 축복의 특성이 달랐고, 아키서스 교단은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확한 효과를 모르는 교단이었다.
행운에 눈이 먼 일부 플레이어들만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는 정도!
“사제님. 사제님. 저희 기부 좀 할 테니까 밭에 가서 축복 좀 해주실래요?”
“무슨 소리십니까!”
“??”
“기부라니. 아키서스를 믿는 신도를 위해 그 정도는 그냥 해드릴 수 있습니다! 당장 가지요!”
“?!”
길가에서 만난 아키서스 사제의 눈빛은 뭔가 이상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광신도의 눈빛!
플레이어들은 당황했지만 공짜로 해준다니 일단 받았다.
뭐든 간에 공짜는 좋은 것!
그렇게 농부 플레이어들은 영지에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각종 도움 덕분에 빠르게 적응에 성공한 그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레이어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여기…… 토끼가 안 나온다?”
“그렇지?”
토끼 때문에 이사를 하긴 했지만 토끼가 아예 없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지에는 토끼가 보이질 않았다.
거의 없는 수준!
용용이가 갖고 와서 땅에 심은 징표 덕분이었다.
물론 플레이어들은 그것까지는 몰랐다. 그저 뭔 이유 때문에 안 보이나 싶었을 뿐.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 * *
-어르신! 지금 팔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르신! 지금 가격이 꽤 뛰었습니다! 지금 팔아도 몇 배는 나옵니다!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비장한 목소리로 유 회장에게 간언했다.
주제는 ‘사재기한 아이템을 언제 파느냐!’
이미 몇 가지 악재로 인해 고급 농작물들의 가격은 팍팍 뛴 상태였다.
랭커 농부 플레이어 몇 명이 그 악조건에서 농사를 성공시키긴 했지만 물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 팔아도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유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버틸 때다.
-하지만 어르신! 랭커 중 몇 명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답니다! 언제 해결될지 모릅니다!
-교단 내부에서도 퀘스트 나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퀘스트가 생기고 언젠가는 해결되기 마련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대륙에 퍼진 냉기도, 미쳐 날뛰는 토끼도 언젠가는 해결될 것이라는 것을.
이제까지 계속 그래왔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판온 플레이어들이 있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은 아니다. 버텨라.
-어르신……!
유 회장의 인내심에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지금 여기에 쏟아부은 골드는 모두 다 유 회장이 낸 골드였다.
그런데도 이 정도 인내심이라니.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
-절대로 그렇게 빨리 해결되지는 않을 거다.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유 회장의 목소리에는 듣는 사람을 홀리는 묵직함이 있었다.
수많은 전장을 뚫고 온 남자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따른다!
이 사람이라면 믿고 따를 수 있다!
-아. 어르신. 그러고 보니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에서 농사짓고 있는 거 아십니까? 토끼 때문에 농부 애들이 거기로 모이고 있다는데요.
-그 골짜기로? 토끼 때문에 정말 곤란한가 보군. 아무리 갈 곳이 없어도 그런 곳으로 가다니.
유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보기에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는 농사를 지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리 상황이 급하더라도 거기 가는 농부 플레이어가 많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요?
-거기서 농사를 지어봤자 얼마나 나오겠느냐. 경매장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할 거다. 걱정할 필요 없다.
* * *
“장비 다 주시죠.”
“????”
태현의 말에 대회 담당 직원은 당황해하는 표정이었다.
장비를 다 달라고?
“여기 있는 거 다 들고 가시려고요?”
“규정에는 상관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긴 하지만…….”
“그러면 다 주시죠.”
“여기 있습니다.”
직원은 얼떨떨했지만 일단 달라니까 넘겼다.
‘저거 다 들고 가봤자 쓰지도 못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