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07화
승자와 패자.
보통 승자 팀에는 기분 좋은 승리감이 흐르고, 패자 팀에는 우울한 패배감이 흘러야 했다.
그런데 1경기가 끝나고 나서, 두 팀의 대기실은 모두 다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서로 눈치만 보면서 말을 꺼내지 않는 태현 팀!
이럴 때 손해 보는 역할을 맡는 건 역시 이세연이었다.
“모두 잘했어. 정말 잘했는데…… 대체 불은 뭐야?!”
아무리 이세연이라도 감정을 완전히 다스리지는 못했다.
이세연과 김철수는 1경기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다른 팀원들을 믿으며.
상대측 마법사와 사제도 만만치 않았기에, 이세연은 언데드들을 불러서 앞세우며 뒤에서 다양한 저주 조합으로 상대를 견제했다.
그런데 갑자기 옆의 숲에 웬 거대한 산불이 난 것이다.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태현을 쳐다보았다.
태현이 ‘내가 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런 걸 할 사람은 태현밖에 없었으니까!
“뭘 새삼스럽게. 고맙다는 인사는 안 해도 괜찮아. 팀이잖아. 그치?”
“뭐가 그치야?! 왜 말도 안 하고 해?!”
“말했으면 말렸을 거 아니야.”
태현은 대답하며 도동수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그 모습에 도동수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XXX-XXXX-XXXX!’
“쟤 보니까 일대일로도 못 이기고 허덕이더라. 내가 불 안 질렀으면 아래 진영 밀리고 바로 너희 쪽도 밀렸을걸.”
묵직하게 팩트를 쏘아대는 태현.
보통 반박을 했을 도동수였지만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전부 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만큼 이번 경기에서 추태를 보인 것이다.
이세연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기긴 했는데 점점 불씨가 커지는 기분!
“좋아. 좋아. 그러면 두 번째 경기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똑같이 불 지르자.”
태현의 말에 도동수가 고개를 홱 돌려 태현을 노려보았다.
“뭐 이 자식아?”
대놓고 면전에서 ‘네 뒤에 불 지르겠다’는 말을 하다니!
그러나 태현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네가 마음대로 하는데 왜 나는 마음대로 하면 안 되냐? 나도 마음대로 할 건데?”
당당한 선언. 네가 하면 나도 한다!
도동수는 입을 떡 벌렸다.
팀 내에서 멋대로 행동하면서 협박할 수 있는 건 그 혼자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것도 태현이 한 수 위!
“으으…… 으으으…….”
이세연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고 괴로워하는 동안 케인과 김철수가 옆에서 위로했다.
“이해하세요. 저놈이 좀 또라이라 그래요.”
“그,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다 생각이 있으셔서 한 거 아니겠어요? 이기셨잖아요.”
그러는 동안 도동수와 태현은 사납게 대화하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난 아예 안 움직일 거다!”
“그러시든가. 나중에 인터뷰 때 ‘도동수는 왜 안 움직였죠?’라고 물으면 내가 아주 잘 대답해 주마.”
“…….”
홱!
말문이 막힌 도동수는 고개를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다 해결됐지? 두 번째 경기에서도 불 지른다?”
* * *
-팀 블루는 1경기의 패배가 좀 충격이 컸던 모양입니다. 표정이 밝지가 않네요.
-그에 비해 한국 팀은 신기할 정도로 긴장한 모습입니다. 1경기를 압도적으로 이긴 팀 같지가 않아요. 왜 저러는 걸까요?
-프로 의식이죠. 끝날 때까지는 절대 긴장을 풀지 않는 프로 의식. 제가 선수일 때도 저런 선수들이 잘 나갔습니다.
욕만 안 나왔지 증오와 저주를 눈빛으로 말하는 태현 팀이었다.
그걸 밖에서 보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 팀으로 보이는 게 문제였지만.
경기가 시작하기 전 케인은 낮게 속삭였다.
“야, 그런데 정말로 두 번째 경기에서도 이 방화가 통할까?”
“방화가 아니라 화공이라고 하자. 폼 안 나잖아.”
“……어쨌든 그 화공이 통할까?”
“잘 모르겠다.”
“야!”
“이 자식은 내가 신인 줄 아나? 내가 어떻게 다 알아?”
태현의 말에 케인은 움찔했다.
1경기 도중 태현이 예측한 게 다 맞았기에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이 똑똑하면 대책을 세워 올 거고, 나보다 더 똑똑하면 역으로 이용하겠지. 그거까지 내가 어떻게 아냐.”
“그, 그렇군.”
“근데 뭐 대충 2경기까지는 통하지 않을까 싶은데. 상대방이 1경기를 워낙 어이없게 져서 충격이 클 거고, 거기에 진영에서 일어난 싸움은 다 한 끗 차이로 진 거나 마찬가지니…….”
결과는 어이없게 졌지만, 과정을 보면 매우 아슬아슬했다.
실제로 차원철은 도동수를 거의 잡을 수 있었고, 중앙 진영에서도 태현과 케인을 쫓지 않았다면 두 명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태현은 2경기까지는 팀 블루가 전략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나올 것 같았다.
사람은 저런 식으로 지면 스스로를 잘 바꾸지 않았으니까.
“5전 3선승제니까 2판만 이기고 들어가면 상당히 유리해지지.”
“그래도 2판이 어디야?”
“맞는 말이야. 2판이 어디냐. 거의 날로 먹는 거지.”
태현도 이 화공이 2경기 넘어서 먹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방도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두 번 당하면 어떻게든 막겠지!
그러는 동안 팀 블루도 어떻게든 회의를 끝내가고 있었다.
태현이 예상한 대로, 그들은 1경기 전략을 그대로 가지고 갈 생각이었다.
“한 번만 더 믿어줘. 이번에는 이길 수 있어. 아까는 몰라서 당황했지만 알고 있다면 안 흔들린다고.”
차원철이 간절하게 말했다.
실제로 그럴 만했다.
정말 도동수를 이기기 직전까지 갔다가 실수로 놓쳤으니까.
이주형도 이를 갈면서 스스로 자책했다.
“내가 멍청했어! 그 케인 자식한테 도발당해서 덤벼들다니. 끝까지 버티면서 기다렸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1경기를 날리지 않았을 거야!”
딱히 케인이 도발하지는 않았지만 이주형의 머릿속에서는 그렇게 남아 있었다.
“진정해, 주형아. 다음 경기에서 안 그러면 되지.”
“고마워요. 형. 이번에는 절대 안 넘어갈 거에요. 어떤 도발을 하든 끝까지 버틸 겁니다.”
차원철이 도동수를 잡는다.
다른 두 듀오는 시간을 끈다.
일명 ‘니가와’ 전법!
아까는 불길이 치솟고 태현과 케인이 도망치는 모습에 속아 덤볐지만, 이번에는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이주형은 단단히 각오를 굳혔다.
* * *
2경기가 시작되고, 도동수가 머뭇거리다가 결국 움직였다.
계속 있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도동수! 파이팅! 힘내라! 도동수!”
-김태현 선수가 도동수 선수를 격려하는데요? 왜 갑자기 저러죠?
-아마 1경기에서 팀킬을 한 것 때문일 겁니다.
-아, 하하하하! 그거네요! 그거 때문이었어요. 은근히 소심한데요, 김태현 선수?
-맞아요. 그 상황에서는 그게 파인 플레이였죠. 만약 없었다면 도동수 선수만 잡혔을 겁니다. 전혀 미안해할 필요가 없는 플레이에요.
-그렇지만 당사자들끼리는 또 다른 문제니까요. 어쨌든 보기 좋네요.
-도동수 선수도 약간 감동한 거 같아요. 지금 어깨를 떨고 있는 거 같은데…….
아까처럼 태현은 불을 질렀다. 그걸 본 케인이 말했다.
“새삼 느끼는 건데 신성 관련 스킬은 다 사기 같단 말이지.”
“쓰레기도 많다.”
주로 아키서스 관련해서!
물론 태현은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슬퍼지니까.
‘여차하면 데메르의 시간 되돌리기도 쓸 생각이었는데 정작 쓸 각이 안 나오네.’
1경기에서 일이 꼬이면 회복 계열 권능을 믿고 전면전으로 붙을 생각이었는데, 그냥 쉽게 끝나서 쓸 일이 없었다.
김철수와 같이 <데메르의 시간 되돌리기>를 번갈아 쓰면서 회복하는 건 시스템상 불가능했지만,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데메르의 권능은 충분히 강력한 권능이었다.
“끝났냐? 그러면 가자!”
케인은 기세 좋게 중앙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태현이 케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
“중앙 안 갈 거야. 도동수 따라가자.”
“??”
* * *
도동수는 차원철과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아까처럼 얕보고 덤벼들지 않았다. 그건 스스로 자멸하는 짓이었다.
네 HP가 얼마나 많든 간에, 차근차근 깎아낸다!
이 주변에 화염이 번져도 상관없었다. 어지러운 환경이라면 도동수가 더 유리할 테니까.
‘자. 어디 한 번 아까처럼 덤벼보시지?’
단단히 각오한 도동수의 위압감은 엄청났다. 차원철도 다시 긴장할 정도로.
차원철은 심호흡을 했다.
‘겁먹을 필요 없다. 어차피 도동수가 덤벼봤자 내 방어를 뚫지는 못할 테니까.’
열 대 맞더라도 한 대 친다.
그게 차원철의 계획이었다.
‘와라!’
‘와라!’
둘 다 그렇게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동안…….
“……!”
차원철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걸 본 도동수가 피식 웃었다.
‘겁을 먹은 거냐? 짜식.’
“어, 어떻게 여기를!”
“……?”
뒤에서 태현과 케인이 달려오고 있었다.
“저거 잡아!”
“오케이!”
“?!?!?!”
* * *
보통 진영 하나를 비워놓고 움직이는 건 위험한 전략이었다.
적이 오지 않으면 상대방은 그냥 점령한 다음 바로 다른 곳으로 지원을 가면 됐으니까.
그러나 이번 경기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가운데로 간 이주형이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텅 빈 공터를 노려보았다.
절대 넘어가지 않으리라!
“안 보이는데, 어디 숨어 있는 거지?”
“상관없어. 기다리다가 접근하면 박살 낸다. 그뿐이야!”
이주형도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적이 들어오면 이길 자신은 충분했다.
‘자, 와라! 언제까지 버틸 거냐! 이번에는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다! 불이 여기까지 오더라도!’
화염이 오더라도 뒤로 후퇴하면 후퇴했지 앞으로 들어가 함정을 밟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태현과 케인은 신나게 차원철을 두들겨 팼다.
차원철 혼자서는 태현과 케인을 절대 당해낼 수 없었다.
그저 HP 많은 샌드백일 뿐!
“억! 커헉!”
“잡았다. 이세연 쪽으로 가자!”
왔을 때처럼 태현은 빠르게 사라졌다. 케인도 그 뒤를 바람처럼 따랐다.
혼자 남은 도동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을 깜박일 뿐이었다.
* * *
2:0.
5전 3선승제 경기에서 2판을 졌다는 건 매우 절박한 상황이었다.
팀 블루의 상황이 바로 그랬다.
태현과 케인이 도동수와 힘을 합쳐 바로 차원철을 제압할 줄이야.
그런 도박 수를 던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더 분한 것은 그런 도박 수를 던지는 동안 중앙 진영에 있던 둘은 가만히 있었던 것!
있지도 않은 적을 경계하며 버틴 걸 생각하니 굴욕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완전히 갖고 놀아진 것이나 마찬가지.
모두 다 분한 얼굴을 한 채 앉아 있었다.
그걸 본 태현은 케인에게 말했다.
“3경기는 긴장해야겠다. 아마 화공에 대한 대책도 세우고 나올 거야. 1, 2 경기와는 다르게 어려울 거다.”
케인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선까지 올라온 상대였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다른 팀원들도 모두 태현의 말에 동의했다.
1, 2경기를 원하는 대로 이끈 태현이 그렇게 말하니 신뢰가 갔다.
분명 3경기에서는 이를 갈고 나온 저들의 진정한 힘이 나올 것이다!
* * *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두 경기를 털리며 멘탈까지 탈탈 털려버린 팀 블루는 세 번째 경기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연발하며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뚜렷한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질질 끌려다니다가 전멸!
결국 태현의 팀은 3전 전승으로 그 날의 경기를 끝냈다.
“……긴장해야 한다며?”
“시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