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01화
“……?”
태현은 플레이어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딱 보니 레벨이 50도 안 되는 것 같은 초보자 플레이어였다.
보통 이런 제작을 하는 플레이어들은 자기 냄비를 갖고 있었다.
제작 직업에게 냄비나 모루, 망치 같은 제작 관련 아이템은 무기와 같은 것!
당연히 가장 투자를 해야 하는 장비였다.
그런데 냄비를 빌려달라니.
‘쯧쯧. 쫄딱 망했군.’
이런 플레이어들이 종종 있었다.
자기 수준에 안 맞는 아이템을 만들려고 갖고 있던 걸 탈탈 털어서 덤비는 플레이어들!
갖고 있는 골드로는 모자라니 아이템도 팔고, 장비도 팔고…….
태현은 안쓰러운 눈으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초보자한테는 나름 친절한 태현이었다.
“쓰시죠.”
“감사합니다!”
상대 플레이어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냄비에 재료를 붓기 시작했다.
“연금술사?”
“네? 아. 연금술사입니다. 어떻게 아셨죠?”
“지금 넣는 재료가 연금술 재료인데…….”
“아직 넣지도 않았는데요?!”
연금술사 플레이어는 태현이 냄비에 붓지도 않은 재료로 직업을 맞추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상식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러나 판온 랭커 중에서는 일반 플레이어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꽤 있었다.
옷감의 색만 보고 RGB 값을 맞추는 사람이나, 요리 재료만 보고 제한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맞추는 사람이나, 사흘 내내 정확히 똑같은 부분에 망치질을 하는 사람이나…….
태현도 그중 하나!
“뭐, 별거 아니죠.”
“그…… 그렇군요.”
태현은 보통 자기 영지를 돌아다닐 때에도 가면으로 얼굴을 바꾸고 돌아다녔다.
적들이 많아서기도 했지만, 영지에서 태현을 보면 광란 상태에 빠지는 플레이어들이 많아서기도 했다.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한 번만 만지게 해줘……! 한 번만……! 널 만지면 뜰 거 같은 기분이 들어! 이번엔 뜬다!
-히힉! 히히힉!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태현이라지만, 재산을 꼬라박은 플레이어들의 광기는 솔직히 좀 무서웠다.
어쨌든 얼굴을 바꿔서인지 상대는 태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예? 아. 제작 때문에요.”
“제작은 꼭 여기서 해야 할 필요가…….”
태현은 상대를 위해 조언을 해주려고 했다.
사실,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는 초보 플레이어를 위해 좋은 곳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유 회장처럼 원하는 걸 뽑아낼 때까지 마음껏 골드를 퍼부을 능력이 있는 사람을 위한 곳!
초보 플레이어는 대도시로 가서 여러 퀘스트를 깨고 캐릭을 키우는 게 나았다.
그러나 상대는 단호했다.
“아닙니다!”
“그, 그래요?”
“아! 제작 직업이 아니셔서 잘 모르시는구나. 제작 직업은 이 <행운의 골짜기>에서 제작을 하는 게 정석이거든요. 요즘 다들 여기서 해요.”
“……뭔 골짜기?”
태현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절망과 슬픔은 어디로 갔지?
“행운의 골짜기요. 여기 영지 이름도 모르시면 어떡해요. 참! 하하하.”
“하하…… 하?”
웃는 연금술사 플레이어를 보고 태현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영주인 태현도 모르는 사이에 이름이 바뀐 영지라니!
“그보다 정석이라니, 뭔 정석이요?”
“제작 직업 플레이어들끼리는 정보를 공유하거든요. 판온 게시판 공략이나 유명한 제작 직업 플레이어들이 방송에서 정보를 공유하는데…… 이거 보세요.”
[아키서스 교단 영지에서 <매우 만들기 어려운 각성의 물약> 제작 성공!]
[행운의 골짜기에서 제작 직업이 들려야 할 곳 다섯 군데!]
[행운의 골짜기에서 받을 수 있는 행운 관련 버프 정리.]
“……그, 그렇군요.”
자기네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다 영지 이름까지 바꿔 부르다니.
태현은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보다는 <행운의 골짜기>가 나았으니까!
“게다가 제가 만들려는 건 제작 확률이 1% 미만이라서…….”
“설마 제작 확률이 1% 미만인 아이템을 만들려고 갖고 있던 장비를 다 팔아치우고 재료를 산 건 아니겠죠?”
“헉. 어떻게 아신 거죠?”
“…….”
태현의 눈빛이 한심한 놈을 보는 눈빛으로 변했다.
에라이!
그러는 사이 접속한 유 회장이 태현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뒷모습만 보고서도 태현을 알아본 유 회장. 이미 어엿한 판온 플레이어였다.
“여기서 뭐 하나?”
“이 사람 만드는 거 구경 좀 하고 있었습니다.”
“뭐 만드는데?”
“경험치 증가의 물약이요.”
“!!!”
“!!!!!!”
유 회장과 태현의 눈빛이 돌변했다.
방금 뭐라고?
“경, 경험치 증가의 물약? 그런 게 있었나? 경매장에 없었는데?”
유 회장은 벌써 지갑을 꺼내려고 하고 있었다.
“워낙 만들기 힘드니까 보통 경매장에 안 보이죠. 나오면 다들 바로 사가고.”
“그…… 그렇군. 얼마면 되나?”
“예?”
“얼마면 되냐고!”
“어르신, 아직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거 제작 확률이 1% 미만이라고요.”
날뛰는 유 회장을 제압하고서 태현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연금술사 플레이어를 쳐다보았다.
경험치 증가의 물약.
연금술사의 물약 중 가장 잘 팔리는 아이템 중 하나였다.
문제는…….
‘경험치 보너스를 많이 주는 물약일수록 만들기 힘들어진다는 거지.’
경험치 2배의 물약만 해도 거의 경매장에서 구경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나오는 순간 대형 길드부터 시작해서 랭커들까지 전부 입찰을 시도하는 것이다.
태현처럼 골드 쓸 일 많고 현질 안 하는 플레이어는 거의 볼 일 없는 물약!
‘연금술도 키워보고 싶긴 했는데 영 시간이…….’
생각에 잠겼던 태현에게 유 회장이 물었다.
“아까 보니 네 친구라는 케인은 돌아왔던데.”
“예. 돌아왔죠.”
“근데 김 전무는 어디 있냐?”
“……?!”
태현은 놀랐다.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야, 케인.
-왜?
-그 같이 갔던 아저씨는 어디 있냐?
-……두고 왔는데.
케인은 매우 양심에 찔리는 목소리로 변명을 시작했다.
그랬다. 두고 온 것이다.
김 전무까지 챙겨서 올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갈락파드와 같이 움직여야 했을 테니까.
거기에 투기장 대회에 늦을 수도 있고!
태현은 케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유 회장에게 말했다.
“두고 왔다네요.”
“그래? 그래. 알겠네.”
“……?”
동네에서 돌아다니는 들개가 사라져도 이것보다는 더 나은 반응을 보였을 것 같았다.
“뭐…… 갈락파드라는 고렙 NPC가 같이 있으니 목숨은 괜찮을 겁니다. 같이 돌아올 겁니다.”
“알겠다니깐?”
“……걱정 안 되십니까?”
“어? 아. 김 전무? 아아. 걱정되지! 물론 걱정되네!”
유 회장은 그제야 태현의 말뜻을 눈치채고 급히 걱정하는 척을 했다.
자기 일에 정신이 팔려서 김 전무가 어디서 얼어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던 유 회장이었다.
“그보다 투기장은 언제 가나? 응?”
“……어르신은 역시 친구가 없을 만한…….”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회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신이 난 유 회장이었다.
태현한테 말하지는 않았지만, MBS에서 한 방송도 몇 번이고 돌려봤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실제로 MBS 사장과 은근슬쩍 만나는 자리까지 만든 그였다.
최대 광고주 중 하나인 유 회장이 만나자는데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일은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지만.
* * *
-회장님.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번 광고는 저희가 봐도 정말 완벽한 광고였습니다. 저희가 방송하게 되어서 영광일 정도로요!
-그, 그래. 그런데 혹시 저 프로는…….
유 회장은 말하면서 은근슬쩍 벽에 걸린 투기장 대회 포스터를 가리켰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했었는데, 다행히 화제를 꺼낼 만한 물건이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그걸 본 MBS 사장은 당황해서 말했다.
-아, 판온 대회…… 죄송합니다! 회장님 같은 분이 보시기에는 애들 장난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봐! 어서 이 포스터를 치우게!
-아, 아니. 그, 그게…….
직원들이 황급히 달려와서 포스터를 떼어 가지고 갔다.
MBS 사장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웃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젊은 친구들은 저런 걸 좋아해서…… 아, 저희가 생각하고 있는 프로 중에 가상현실게임에서 낚시를 하는 프로가 있는데…….
-…….
유성 그룹이 예전에 E스포츠 게임단에 투자를 했다가 치욕만 겪고 물러선 일은 유명했다.
당연히 MBS 사장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 배려!
괜히 유 회장이 저 포스터를 보고 쓰라린 기억을 떠올릴까 봐 한 행동이었다.
물론 유 회장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 되었지만.
-골프도 되고 낚시도 되고, 회장님 정도 되는 분에게 딱 어울리는 품격 있는 프로그램 아니겠습니까? 어떠십니까?
-나를 지금 무슨 늙은이로 아나! 이만 가보겠네!
-예, 예?! 회장님?! 회장님?!
유 회장이 늙어서가 아니라, 유 회장이 좋아해서 말한 건데 저런 반응을 보이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니 더더욱 MBS 쪽에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MBS 쪽에서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사과를 해오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관련 방송을 특별석에서 보는 것도, 관객석에서 보는 것도 불가능!
보다가 MBS 쪽에 발견이라도 되면 그만한 망신도 없었다.
이제 유 회장에게 남은 건 판온 내 VIP석에서 대회를 보는 것뿐이었다.
* * *
“그래서 언제 출발하냐니깐?”
“아니, 케인도 아니고 왜 이렇게 재촉을 하세요? 좀 준비하고 갈 겁니다. 거기 한 번 가면 그 근처에 있어야 할 테니 제작 스킬 좀 올리려고요.”
태현은 치밀하게 계획을 세울 생각이었다.
그 근처에서 바로 할 수 있는 건 역시 제작 스킬이었다.
‘대장장이 기술, 기계공학, 요리도 이번에 좀 더 올려놓고. 동시에 아키서스 아티팩트도 한 번 더 만들어봐야지. 대회 시작하는 날에 쿨타임이 돌아올 테니…….’
물약 같은 쓰레기 아이템을 만들어서 그런지 쿨타임이 그렇게 길지 않았다.
대회 시작 시간에 맞춰서 한 번 더 쓸 수 있는 수준!
“저기…… 이거 구경하시려고요? 이거 별로 재미없을 텐데요.”
연금술사는 안 떠나고 붙어 있는 둘이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일 재미없는 게 제작 직업의 제작을 구경하는 것!
전투 직업이면 모를까, 제작 직업의 스킬은 보는 맛이 별로 없었다.
“뭐, 저희도 이만 가죠? 이거 받으시고 열심히 해보세요.”
“어? 감사합니다!”
태현이 주는 아이템을 받은 연금술사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뭐든 간에 이런 친절은 고마운 것!
“저는 케빈입니다! 나중에 물약 좋은 거 나오면 드릴게요!”
“아. 예.”
태현은 가볍게 대답했다. 별로 기대는 가지 않았다.
저런 식으로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는 패가망신하기 마련!
유 회장과 같이 걸어가는데 저 뒤에서 괴성이 들렸다.
“왜 저러지?”
“보나 마나 망한 게 분명하네요. 쯔쯔. 초보자가 저런 것부터 만들려고 하면 망하는데…….”
“저건 그런 목소리가 아닌 거 같은데……?”
유 회장은 의아해했다.
저 뒤에서 들리는 괴성은 뭔가 기쁨과 당황과 놀라움과…… 그런 부류의 괴성이었던 것이다.
“저런 흔한 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중요한 건 대회죠.”
“그렇지! 대회! 대회!”
“……어르신 너무 신나신 거 아닙니까?”
“커, 커험. 내가 그랬나? 아니야. 그냥…… 됐네.”
“어쨌든 이제 바로 출발할 생각인데, 어르신도 필요한 건 미리 챙겨놓으세요. 거기 구경하면서 가만히 놀 수는 없으니까.”
“나는 남는 시간에는 낚시를 할 생각인데.”
“뭐…… 어르신은 부족한 거 현질로 처리하시면 되니 다른 스킬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낚시꾼들은 낚시 미끼 제작 같은 걸 위해 요리나 연금술 같은 스킬도 좀 배워놓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유 회장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냥 돈으로 사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