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393화
모두가 뜨겁게 기대하고 있었지만 유일하게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 맞다. 케인 늦게 오면 투기장은 어쩌지?”
바로 태현이었다.
아키서스의 권능에 눈이 멀어서 케인에게 갖고 오라고 하긴 했지만, 생각해보니 투기장 대회 일정에 맞추려면 최대한 빨리 돌아와서 프리카 대륙으로 가는 게 안전했다.
“음…….”
태현은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안 늦으면 괜찮겠지!’
이세연이나 배장욱이 들으면 기겁을 할 생각!
다른 투기장 대회 참가 플레이어들은 얼마 전부터 컨디션을 조절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입장을 못 하는 멍청한 일이 있을까 봐 사망 페널티도 주의하고, 프리카 대륙에서 마지막 합을 맞춰보는 중!
그거에 비교해 보면 태현이 얼마나 막 나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응?”
“눈이 오네요?”
“뭐? 판온은 원래 여름에도 눈이 오나?”
유 회장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뇨, 계절에 맞춰서 날씨가 진행되는데…… 뭔 일이 생겼나 보군. 뭐, 이 정도는 별거 아니니까 곧 해결되겠죠. 누가 마법 스크롤이라도 썼나?”
“어…… 태현 님. 이 주변이 아니라 중앙 대륙 전체에서 눈 내리나 본데요?”
“뭐?”
태현은 놀랐다.
“퀘스트인가? 이 정도면 대륙 퀘스트 뜨려나?”
“깨시게요?”
“굳이? 지금 내 권능 찾아서 모으는 것만 해도 바쁜데. 게다가 투기장 대회도 나가야 된다고. 뭐 저건 다른 놈들이 알아서 깨겠지.”
“투기장 대회를 그렇게 가볍게 여기시는 건 태현 님밖에 없을 거예요…….”
둘의 대화를 듣던 유 회장이 솔깃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투기장 대회가 곧 시작하겠구나.”
“어라? 어르신도 관심 있으십니까?”
“크흠! 나, 나는 별생각 없다. 그냥 말이 나와서 물어본 거다.”
유 회장은 말을 돌렸다.
이미 ‘악마들의 목을 낚겠다 크하하하!’라고 외쳤을 때부터 판온에 푹 빠진 걸 들킨 유 회장이었다.
그러나 유 회장 본인만 아직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낚시를 하러 온 거지 딱히 판온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러나 유 회장이 한 가지 잊고 있는 게 있었다.
태현은 자기가 필요한 분야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
“그래요? 그러면 어르신은 필요 없겠네요. 이다비. 이거 받아.”
태현은 이다비에게 티켓을 건넸다.
투기장 경기장 VIP 관중석!
방송이 아닌, 게임 내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게 볼 수 있는 자리였다.
MBS가 주최하는 대회였기에 받을 수 있었던 티켓!
“앗, 감사합니다!”
“돈으로 바꾸지 마라.”
“……그, 그런 생각 안 했어요.”
“너 보라고 준 거잖아…… 돈으로 바꾸지 마. 돈으로 바꿔서 팔면 내가 MBS 쪽 보기가 좀 곤란해져.”
그러는 동안 유 회장은 초조한 얼굴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지금이라도 달라고 말할까?
‘아, 아니. 그럴 필요 없겠군. 그냥 돈으로 암표를 사면…….’
그런 유 회장의 생각을 박살 내듯이 태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돈으로 구하지도 못할 거야.”
“그 정도예요?”
“보통 이런 자리를 구할 정도의 일반인은 광팬 중의 광팬이거든. 돈으로 안 받고 자기가 보지. 워낙 숫자 적어서 암표상도 못 끼고.”
‘…….’
유 회장은 시무룩해졌다.
태현이 속마음을 읽은 게 아닌가 싶은 정도로 정확하게 반박한 것이다.
‘다른 방법이…… MBS 쪽에 요청을 하면…… 아, 아니. 이건 좀 아니군.’
유성 그룹의 이름으로 MBS 쪽에 요청을 하려다가, 유 회장은 멈칫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물론 유성 그룹의 이름으로 ‘티켓 좀 주세요’ 하면 MBS는 당연히 ‘아이고 무조건 드려야지요’ 하며 줄 것이다.
그렇지만 저렇게 하면 유성 그룹 내에서는 소문이 돌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이 투기장 대회 보시려고 티켓을 요청하셨다며?
-저번에는 사원들 데리고 레이드도 뛰셨다더라.
-회장님 나이에 그런 취미를 시작하시다니.
아직 스스로 인정하기에는 많이 부끄러운 유 회장이었다.
추욱-
결국 유 회장은 포기했다.
일반 관중석은 있을 테니 거기나 몰래 들어가서…….
탁-
유 회장을 구원해 준 건 이다비였다.
“여기 이분 티켓도 하나 주세요.”
“응? 어르신은 별로 관심 없다잖아.”
“그래도 같이 보면 좋죠! 태현 님 경기하는 건데 관심 없더라도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 난 안 봐도 상관없는데. 너도 별 관심 없으면 안 봐도 돼.”
“그러면 팔면…….”
“파는 건 안 되고.”
“힝…….”
유 회장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크, 크흠. 네놈 경기라면 좀 봐줘도 괜찮을지도 모르지…….”
“안 봐도 괜찮다니까요? 여기 있습니다.”
태현에게 티켓을 받은 유 회장은 감격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수십 년을 재계의 거물로 지내온 남자의 표정 관리!
이다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됐네요. 그리고 그냥 다음부터는 달라고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태현 님은 저러면 정말 관심 없나 싶어서 안 주거든요.”
“……!!!”
유 회장은 감동한 눈빛으로 이다비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친절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 있다니!
“그러고 보니 본선 경기 전에 MBS 쪽에서 뭐 하지 않나요?”
“아. 그렇지. 본선 진출 팀들 모아서 소개하고 간단하게 인터뷰하고 그럴걸.”
“실제로요?!”
“어. 실제로.”
“……그러면 되게 중요한 거 아닌가요?”
“그런가?”
시큰둥한 태현의 모습에, 이다비와 유 회장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 * *
태현은 지루한 듯이 하품을 했다.
지금 태현이 앉아 있는 곳은 SI 엔터의 회사 내 메이크업룸이었다.
‘아, 지루하다.’
오늘 다섯 시에 MBS 쪽으로 가서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바로 프리카 투기장 대회 본선 진출자들을 소개하는 방송!
원래대로라면 그냥 게임 하다가 시간 30분 전에 방송국에 쫄래쫄래 찾아갔을 태현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SI 엔터와 정식으로 계약을 한 상황.
사전에 제대로 준비를 하고 가라고 연락이 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태현 씨, 잘 지내셨나요?”
“저야 뭐 잘 지냈죠. 이거 언제 끝나요?”
“곧 스타일리스트가 올 겁니다. 지금 차례가 약간 밀려서요. 끝나는 대로 제가 직접 방송국으로 모시겠습니다.”
김 매니저는 친절하고 서글서글한 사람이었다.
“이세연은 뭐 하고 있죠?”
“이세연 씨는 오늘 다른 스케줄이 있으셔서…… 거기서 끝나시면 바로 방송국으로 향하실 겁니다.”
“그래요? 여기 왜 없나 싶었는데.”
“아, 이세연 씨는 전담 스타일리스트가 따로 있으셔서 여기에서는 보기 힘드실 텐데요.”
“……그러니까 여기는 약간 급이 안 되는 사람들만 오는 곳이라는 거죠?”
“그, 그런 게 아니라…….”
김 매니저는 말을 더듬었다.
노골적이어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
이세연처럼 탑급 연예인들은 따로 전문 팀을 데리고 다녔다.
그러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회사의 시설이 바로 여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설이 안 좋은 건 아니었다.
어지간한 근처의 미용실은 뺨을 때릴 정도의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태, 태현 씨는 방송을 아직 거의 하지 않으셔서…….”
“농담이에요. 별로 원하지도 않고요. 정말 필요로 했으면 저희 집에서 일하시는 분 데리고 왔겠죠.”
“네?”
김 매니저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집에서 일하는 스타일리스트가 있다니, 그게 말이 되나?
“이세연은 참 바쁘게 사네요. 용케 게임도 같이 하네.”
“그게 대단하신 점이죠.”
김 매니저는 이세연을 존경하는 것 같았다. SI 엔터의 간판 중 하나였으니 당연한 모습이었다.
기다리는 사이 케인에게 문자가 왔다.
[너 언제 오냐?]
[나 지금 방송국인데 너 어디 있냐? 아직 안 왔냐?]
[야. 나 지금 혼자 있는데 너무 눈치 보여! 나만 너무 일찍 왔나 봐! 방송국 직원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빨리 좀 와줘!]
“……얘는 뭐하냐?”
혼자서 시트콤을 찍는 케인!
[나 메이크업 좀 하고 갈 테니까 혼자 알아서 놀고 있어.]
[야! 야!! 치사하게 너 혼자!!]
그러는 사이 스타일리스트가 왔다. 스타일리스트는 의자에 앉아 있는 태현을 보더니 멈칫했다.
“잘생기신…… 분이시네요.”
“선생님은 정말 프로시군요.”
태현은 감탄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칭찬할 수 있는 능력!
그야말로 프로였다.
태현의 말뜻을 눈치챘는지 스타일리스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진심으로 한 말입니다. 날카롭게 생기셔서 그렇지 못생기신 얼굴 아니에요.”
“보통 잘생긴 얼굴은 그렇게 구구절절하게 사연 안 붙던데…….”
스타일리스트는 더 이상 말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머리 스타일을 만들고 간단하게 얼굴에 뭘 바르는 작업.
몇천 번을 넘게 한 동작. 스타일리스트는 자연스럽고 빠르게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거울을 본 태현은 휘파람을 불었다.
평소에 날카로운 인상이 살짝 부드러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사람이 달라 보였다. 거울로 뒤를 보니 김 매니저도 놀란 표정이었다.
태현과 눈이 마주치자 김 매니저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이게 메이크업의 힘이군요. 아버지가 왜 그렇게 찾으시는지 알 거 같기도 하고…….”
“??”
김 매니저는 또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스타일리스트는 웃으며 말했다.
“워낙 잘생기셔서 별달리 복잡한 메이크업은 안 해도 됐어요.”
태현은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끝까지 프로의 자세를 잃지 않는 사람이라고!
* * *
“긴장되십니까?”
“하아암~”
“긴, 긴장되실 수도 있겠죠. 실제 얼굴로 나서는 방송은 처음이시니까요. 게임 영상을 방송하는 것과는 다르잖습니까.”
“으하아암~”
“많은 프로게이머 분들이 실제 방송에 출연하시면 실수를 하시고 그럽니다. 판온처럼 가상현실에서 방송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지요. 그렇지만 저는 태현 씨가…….”
“매니저님.”
“예?”
“매니저님이 더 긴장한 것 같은데…….”
김 매니저는 얼굴을 붉혔다.
실제로 그랬다.
최근 유명 판온 플레이어 중 몇 명이 케이블 방송에 나갔다가 혹평을 받고 침몰했으니까!
그만큼 실제 방송은 어려웠다.
그렇기에 김 매니저도 태현을 걱정하고 있었다.
과연 잘 해나갈 수 있을까?
게임 방송에만 익숙한 사람인데?
그런데 태현은 걱정하는 기색이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긴장 안 되십니까?”
“안 되는데요.”
“다행입니다. 타고나셨나 봅니다.”
“그보다는 실패해도 별로 잃을 게 없어서 아닐까요?”
“…….”
섬뜩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태현!
“제가 방송에서 헛소리하면 저 추천한 이세연이나 저 좋게 본 이동팔 대표님이나 저 추천한…… 그 누구더라, 하여튼 오지랖 넓어서 사람 귀찮게 만든 국장님이었는데.”
“설, 설마 이종국 국장님을 말하시는 겁니까?”
“아, 그래요. 그 양반. 뭐 어쨌든 그 사람들 체면이 망가지는 거지 전 상관없잖아요.”
“전, 전국에 나가는 방송인데요? 태현 씨 체면은요?”
“전 그런 거 신경 안 쓰는데요. 방송에서 헛소리해도 잘 먹고 잘살 자신 있어요.”
태현의 눈빛은 100% 진심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남이 태현을 어떻게 말하든 정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의 모습!
그 모습에 김 매니저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태현에 대해 ‘대단한 사람이다’란 말은 이동팔 대표나 이세연에게 많이 들었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떤 의미든 간에 어쨌든 대단했다!
“그러면 갔다 오겠습니다. 어. 저기 케인이네. 덕수야!”
“케인이라고 불러, 이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