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376화
삼촌과 조카가 흉흉한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 태현은 집으로 돌아왔다.
김태산이 아닌 척하면서 힐끗힐끗 태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버지?”
“너 진짜 악마 더 풀 거냐?”
복수는 좋았지만 이제 다시 태현의 차례가 돌아오니, 김태산도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오스턴 왕국에 갈그랄이 강림한 것도 이미 충분히 문제였다.
주변의 영지를 갖고 있는 길드들은 벌써 비상이 걸린 것이다.
쑤닝 길드의 카달타 성과 가까운 곳은 필사적으로 공성 준비에 들어갔고, 좀 거리가 있는 곳들도 불안한 눈으로 쳐다봤다.
몇몇 길드는 아예 선제공격으로 레이드를 가자고 제안했지만 거기에 쉽게 나서는 곳은 없었다.
그랬다가 지기라도 하면 잃는 게 너무 많았던 것!
“하하. 마계의 문을 아예 오스턴 왕국이랑 연결시켜 버릴 생각인데요. 어디가 좋을지 지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야, 야!”
“아랄타 성이 그렇게 마계랑 풍수지리적으로 좋다는데.”
“아니야! 아랄타 성은 안 좋아!”
최강지존무쌍 길드가 점령해서 골드와 현질로 번성시켜나가고 있는 아랄타 성!
그런 성에 태현이 마계의 문을 연결시켜 버린다고 하니 김태산은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태현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마계의 악마를 더 불러와 봤자 결국 나중에 위험해지는 건 태현이었으니까.
지금 당장 갈그랄도 위험해 보여서 처리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이러고 있는데…….
물론 그것과 별개로 김태산을 괴롭히는 건 할 생각이었다.
“아이고. 오늘 SI 엔터 갔다가 들은 말 때문에 생긴 마음의 상처가 너무 아파서…….”
“뭔 마음의 상처?! 내가 준식이한테 물었는데?!”
SI 엔터 쪽에서 태현을 모욕하는 말이라도 했다면 김태산이 먼저 달려가서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정준식의 말을 들어보니, SI 엔터는 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태현한테 내민 모양이었다.
-태현이의 뭘 보고 저렇게 좋은 대우를 해주는지 모르겠다니까?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가더라.
정준식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지금 저건 태현의 엄살!
“와. 지금 아들은 못 믿고, 다른 사람 말은 믿는다는 겁니까? 저 기분 상했습니다. 마계 문이나 열어야지.”
“아니야!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구나, 아들아!”
“할 거 다 하셔놓고 엄살은…….”
태현이 SI 엔터에 가서 계약서 찍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다가, 다 끝나고 나니 이제 와서 잘 타일러 보려는 저 뻔한 속셈이 얄미웠다.
간장 종지보다 얄팍한 속셈!
“그러면 뭐 악마 사냥하는 거나 도와주세요.”
“응?”
“갈그랄 잡으러 갈 거거든요.”
“어…….”
“뭐, 싫어요? 싫으면…….”
“아냐! 도와줘야지! 아들이 이렇게 열심히 한다는데!”
김태산은 태현의 등을 치며 호탕하게 외쳤다.
‘이 자식이 갈그랄 잡으면 그건 그거대로 불길한데…….’
김태산은 찜찜했다.
태현이 악마를 잡는 건 잡는다고 쳐도, 더 강해지면 김태산이 게임 내에서 위험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발을 뺄 수 없었다.
그의 아들이지만 태현은 충분히 마계의 문을 요새 가운데에 열어버릴 사람이었다.
능력도 되고 의지도 강한 또라이!
“음. 아버지가 제 욕을 속으로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
* * *
접속하자, 이다비가 신이 나서 만세 자세로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쟤 왜 저래?”
“직접 물어봐라.”
케인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빠졌다. 이다비는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대박 났어요!”
“네가 그러면 되게 무서운 거 알지? 제발 내가 없는 사이에 사고 쳤다고는 하지 말아줘.”
“그런 거 아니거든요? 저번에 악마들 난리 치고 나서 바로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 시켜서 대(對) 악마용 아이템들 싹 모으라고 했었거든요. 가격이 오를 거 같아서.”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고?”
“제 직업이 상인이잖아요.”
이다비는 ‘엣헴’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랑스러워했다.
계산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갈그랄과 악마 군세를 대비해야 하는 길드들은 각종 소모품을 싹 긁어모으기 시작했던 것!
케인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넌 근데 접속 안 하고 뭐했냐? 원래 이 시간에는 접속해 있었잖아.”
“아버지 때문에 속아서 SI 엔터랑 계약한 다음 또 속아서 이세연한테 호구 잡히고 왔다.”
“……뭐? 내가 잘못 들었나 봐. 다시 말해볼래?”
“됐어, 인마. 뭐 좋은 거라고 다시 들으려고 그러냐.”
“방송 나가세요!?”
이다비는 눈을 반짝거리며 태현을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무슨 방송이요? 너네 결혼했어요 같은 방송?”
“너 미쳤니?”
“……농담 한 번 한 건데…….”
“농담도 할 농담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농담이 있는 법이지. 거기에 게임만 할 줄 아는 내가 나가서 뭐해?”
옆에서 듣던 케인이 끼어들었다.
“맞아. 그리고 상대는 또 무슨 잘못이…… 컥!”
이다비는 이세연을 꺼내려다가 말았다. 꺼내면 정말 태현이 PK를 할 것 같았던 것이다.
“에이, 그래도 태현 님은 할 줄 아는 거 많잖아요.”
“어떤?”
“남 파악하는 거, 남 괴롭히는 거, 남 부수는 거, 남 삥 뜯는…… 아! 아야야!”
태현은 이다비의 양쪽 볼을 손으로 잡아 늘리며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뭐, 방송에 나가서 몇 번 실패하면 회사 쪽에서도 ‘아,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하고 후회하겠지. 내가 알 바 아냐.”
“그렇다고 억지로 망하게 하시면 안 돼요!”
“내가 애냐? 그런 짓은 안 해. 방송이 장난도 아니고, 내가 열심히 해도 안 먹히겠지.”
“전 먹힐 것 같은데요…….”
“넌 날 너무 고평가할 때가 있단 말이지. 그리고 보통 그런 고평가를 할 때는 나한테 뭘 부탁하려고 하더라고.”
“방송 나가서 게임 이야기 나오면 제 이야기도 해달라고요!”
“알겠다. 꼭 해주마.”
이다비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공중파든, 케이블이든, 정규 방송은 그 파급력이 차원이 달랐다.
개인 방송에서 뭘 하든 간에 결국 대다수의 사람이 보는 건 정규 방송인 것이다.
거기에 태현이 나가게 된다니.
이다비에게는 기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저나 어르신. 저희와 같이하실 겁니까?”
“물론이지. 그런데 날 끼워줘도 괜찮겠냐?”
유 회장은 이미 어엿한 한 사람의 게이머가 되어 있었다.
갈그랄 토벌 같은 큰 퀘스트에 참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회, 회장님. 낚시를 하러 가시려는 게 아니었……?”
유 회장이 낚시는 안 가고 또 사냥을 가려 하자 옆에 있던 김 전무가 당황해서 물었다.
그러자 바로 쏟아지는 호통!
“가만히 있게, 이 사람아! 낚시는 나중에 해도 돼! 악마를 잡고 대륙을 지킨 다음에 해도 되는 게 낚시야! 대륙이 악마에게 짓밟혀도 낚시 이야기를 할 생각인가 자네는!”
“예, 예…… 죄송합니다…….”
김 전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 회장이 말하는 걸 보면 무슨 천하의 대역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둘의 대화를 미묘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태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어르신이야 이제 한 사람 몫은 넘치도록 하시니 저는 같이해 주시면 좋죠.”
레벨도 레벨이지만 각종 현질로 맞춘 장비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런 장비를 상황에 따라서, 기분에 따라서 몇 종류씩 세트로 갖고 있었다.
이다비가 그걸 보고 ‘심, 심장 마비가 올 거 같아요……!’ 같은 반응을 할 정도!
“후후. 달라진 내 실력을 보여주마. 저번처럼 눈 뜨고 코 베일 일은 없을 거다.”
‘저번에 눈 뜨고 코 베인 건 결국 김태현 때문 아니었나?’
케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구박만 쏟아질 테니까!
“그런데 언제 출발할 거냐? 다른 놈들이 악마를 먼저 잡아버리면…….”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태현은 여유만만했다.
이 주변에서 갈그랄에게 먼저 레이드를 걸러 가는 파티나 플레이어는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갈그랄은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는 보스 악마 몬스터.
이런 보스 몬스터를 공략하는 데에는 보통 몇 개의 파티가 희생되기 마련이었다.
몇 개의 파티가 먼저 들어가서, 보스 몬스터의 정보를 알아내고, 이런 정보들을 기반으로 공략 방법이 만들어지는 것!
즉 처음에 레이드를 시도하는 파티는 어지간히 겁이 없거나, 정말 욕심이 많은 파티 정도뿐이었다.
‘아니면 자신이 있거나.’
태현은 마지막 경우에 속했다.
이세연과 그.
게다가 랭커 사제인 김철수도 오고, 피해가 컸지만 나름 규모가 있는 우드스탁 길드의 지원도 뜯어낼…… 아니, 받아낼 수 있었다.
갈그랄이 아무리 강해봤자 마계에서 대륙으로 오는 악마는 약해져 있기 마련!
‘갈그랄을 오스턴 왕국에서 처리하면 추후 내 영지로 오는 걸 막을 수도 있고, 퀘스트 처리도 가능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 적기야.’
악마 에슬라의 봉인을 해제하는 퀘스트!
강력한 악마의 세 징표를 모아야 하는 초 고난이도의 퀘스트였다.
현재 태현이 갖고 있는 건 <에다오르의 뜨겁게 끓어오르는 진홍빛 대검> 하나뿐.
갈그랄이 무기 하나를 드랍해 준다면 2/3을 채우는 셈이 된다.
그리고 태현은 갈그랄의 무기를 뜯어낼 자신이 있었다.
아이텝 드랍이라면 행운 스탯이 활약하는 영역!
‘마지막으로 이세연이 권능 스킬을 쓰도록 만들어서 그것까지 복사한다!’
일석이조가 아닌 일석삼조까지 노릴 수 있는 완벽한 계략!
태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먼저 온 건 김철수였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제 플레이어가 와서 꾸벅꾸벅 인사를 하자 유 회장은 관심을 보였다.
“꽤 인상이 괜찮은 청년이로군.”
“그렇죠.”
“그에 비해…….”
유 회장은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을 느낀 태현은 유 회장을 쳐다보았다.
“뭡니까?”
“아, 아니야. 아무것도.”
“오랜만이에요, 태현 씨!”
“반갑습니다. 도와주러 오셔서 고맙네요.”
태현과 김철수는 악수를 나눴다.
사실 이세연과 달리 김철수는 여기 올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여기 온 이유는 순전히 태현의 부탁 때문!
‘같은 팀인데 이번에 합 맞춰서 퀘스트 깨보죠~ 도와줘요~’라는 말에 그냥 와준 것이다.
정말 보기 드문 착한 사람!
‘남자 주현영이군!’
태현은 빠르고 간단하게 김철수의 판단을 끝냈다.
“이야, 지금 다들 갈그랄 레이드하는 걸 꺼려 하고 있는데 이렇게 와주시다니.”
“별거 아닙니다. 이세연 씨나 태현 씨가 있는데 레이드를 겁낼 이유가 없지요. 이 전력으로 못 깨면 다른 파티로도 절대 못 깨지 않을까요?”
둘이 대화하는 도중, 지나가던 플레이어들이 김철수를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어, 저거 김철수 아냐?”
“그러면 옆에 있는 건…… 케인? 김태현이잖아!”
“와, 오스턴 왕국 왔다고 했는데 정말이었어? 나 처음 봐!”
태현과 달리 김철수는 그를 알아보는 플레이어들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해줬다.
“모두들 안녕하세요.”
“안, 안녕하세요! 여기는 무슨 일로?”
“갈그랄 레이드를 하러 왔습니다.”
“……!”
“!!!”
별생각 없이 인사를 건넸던 플레이어들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김철수를 쳐다보았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갈그랄을 잡으러 가는구나!
김철수 정도 되는 랭커가 태현과 케인하고 모여 있으면 당연히 무슨 목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갈그랄을 바로 잡으러 가다니.
제대로 된 정보가 없어서 다른 길드들도 망설이고 있는 지금에!
그리고 이 사실은 빠르게 퍼졌다.
-김태현이 갈그랄 잡으러 간다는데?
-김철수도 부르고 아예 작정을 했나 봐.
-와, 역시 일반 플레이어들 생각해주는 건 김태현밖에 없지 않냐? 주변 길드 놈들은 영지에서 세금은 오지게 뜯어가면서 이런 일에는 안 나서요.
다들 망설이는데 먼저 레이드를 하러 간다는 게 워낙 임팩트가 커서 다른 사실이 묻히고 있었다.
애초에 갈그랄이 나타난 건 태현 때문이었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