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327화
그러나 언제나 현실은 잔혹한 법이었다.
모든 사람이 한 단계씩 차근차근 퀘스트를 깨는 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그냥 모든 단계를 뛰어넘고 바로 찾아버리기도 하는 것!
* * *
“그러고 보니 사디크 교단은 어디에 있지? 내가 이 주변 지리를 잘 몰라서…….”
“아이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말 한마디에 고개를 굽신거리는 마을 촌장!
사디크 교단의 성기사라는 걸 믿게 되어버린 이상, 태현이 ‘사디크 교단 건물에 불 지르기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 아니, 내가 불을 지르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그래’라고 물어봐도 순순히 대답해 줄 것 같았다.
“사디크 교단까지 가는데 설마 걸어가야 하나?”
“아이고, 아닙니다! 성기사님이 걸어가실 수야 없지요! 마차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사디크 교단까지 가는데 설마 우리끼리만 가야 하나? 주변에 몬스터들이 나타날 수도 있는데?”
“아이고, 아닙니다! 저희 마을 사람 중 뛰어난 전사들을 모아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
태현이 창고를 뒤지고 사기를 치는 동안 해변가에서 낚시를 하던 유 회장은 황당한 눈빛으로 대화를 지켜보았다.
‘판온이 이런 게임인가?’
분명, 김태산이나 다른 사람들이 말한 판온은 조금 더 꿈과 희망이 넘치는 모험 가득한 세계였다.
그런데 지금 태현이 보여주는 건 뭔가 좀 많이 더럽고 치사한 세계!
유 회장이 황당해하는 동안, 태현은 마을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었다.
“이야, 좋네요! 이게 권력의 맛인가요?”
이다비는 신이 난 상태였다. 그녀의 상인 전용 가방은 잔뜩 부풀려져 있었다.
얼마나 한계까지 꾹꾹 눌러 담았는지 딱 보였다.
마을의 잡템이란 잡템은 모두 다 챙긴 게 분명했다.
“빨리 튀죠! 빨리!”
“야, 아직 안 돼. 여기 대장간 빌려서 폭탄 좀 만들고 가야 한다고.”
이다비야 언제 거짓말이 들통날지 모르니 챙긴 걸 빠르게 갖고 도망치고 싶어 했지만, 태현은 서두르지 않았다.
운 좋게 사디크 교단을 믿는 마을로 순간이동 되어서 많은 퀘스트 단계를 건너뛰기는 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디크 교단은 강력한 적!
수많은 성기사들과 사제들, 마수들이 있으며 아직 핵심 NPC들인 성기사단장이나 대주교도 멀쩡히 살아 있었다.
원래라면 태현 파티로 부딪힐 상대가 아니었지만…….
태현은 물러설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스스로의 힘이 부족하다면, 다른 힘을 빌려와서 쓰면 되는 것!
‘누구를 데리고 와서 싸움을 붙여야 잘 붙였다고 소문이 날까?’
정말 사악한 고민이었다.
“이놈아, 그렇게 살다가는 벌 받는다.”
“어르신이 물은 과징금처럼요?”
빠드득!
정말 약점 한 번 붙잡으면 끝까지 우려먹으려 하고 있었다.
유 회장은 간신히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게…… 다른 사람을…… 자꾸 속이면서 살면…… 원한을 사게 되고…… 원한을 사게 되면 다 돌아오게 되어 있…….”
말 사이에 들리는 빠득빠득 이 가는 소리!
“하도 원한 많이 사서 이제 좀 추가해도 티도 안 날 텐데요 뭘.”
그 순간, 태현에게 귓속말이 왔다.
-안녕?
어딘가 많이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
태현은 등골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렇게 태현을 친근하게 부르는 건, 분명…….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저번부터 느낀 건데, 그게 정말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세연이었다.
태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쉬고서 유 회장을 쳐다보았다.
“지금부터라도 착하게 살면 될까요?”
“!?”
생각지도 못한 태현의 자기반성!
유 회장은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싶어 깜짝 놀랐다.
* * *
-…….
-없는 척하지 마.
-zzz…….
-……자는 척도 하지 마.
-앗! 저기 드래곤이!
-갑작스럽게 보스 몬스터 나타난 척하지 마.
-진짜거든? 정말 위험하니까 이만 끊어야겠다! 나중에 연락…… 할 필요는 없고! 어쨌든 안녕!
-내가 지금 어디에 있게?
-……어딘데?
-프리카 투기장.
이세연은 태현에게 귓속말을 보내며,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투기장에서 이세연을 알아본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여기서 이세연이 말 한마디 할 경우 태현의 정체는 그대로 확정!
-아니, 너 스토커냐? 응? 왜 자꾸 싫다는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는 거야? 게다가 내 아이디는 어떻게 알아낸 거고?
-배장욱 씨한테 물어보니까 알려주시더라구.
-…….
배장욱!
태현은 이를 갈았다.
사실 배장욱에게는 억울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세연과 태현은 팀이었으니까.
팀에게 서로 연락처도 안 알려줄 수는 없잖은가!
태현은 짜증을 내며 이세연에게 말했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 어? 인사하려고 연락한 거냐? 그러면 난 끊어도 되지?
정말 듣는 사람이 정 떨어지게 만드는 날카로운 말투!
그러나 이세연은 저런 말투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저런 말투는 그녀의 의욕을 불태우게 만들 뿐!
이른바 ‘나한테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같은 법칙!
태현은 결사코 부정하지만, 태현은 이세연과 상당히 많이 닮아 있었다.
태현이 이세연과 귓속말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유 회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다비와 대화를 나눴다.
“저놈 갑자기 왜 저러는 거냐?”
“지금 누군가하고 귓속말을 하는 거 같아요.”
“저놈이 갑자기 회개하고 자기반성을 할 정도의 상대라니…… 대체 누구지?”
“표정으로 한 번 맞춰볼까요?”
이다비는 태현의 표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만상으로 찡그려진 얼굴!
파르르 떨리는 눈썹!
마치 숙명의 원수라도 만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일단 상대와 사이가 엄청나게 안 좋은 게 분명해요.”
“그렇지. 저렇게 대놓고 싫어하니까.”
둘의 대화를 듣던 케인도 끼어들었다.
“그리고 상대도 엄청나게 성격이 꼬여 있고 얄미운 놈이 분명해.”
“그건 왜 그렇지?”
“그게 아니라면 김태현 저 자식이 저렇게 끙끙댈 리가 없잖아.”
“그렇군요!”
이다비는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그렇다면 상대는…….”
“김태현과 사이가 안 좋은, 성격 꼬여 있고 얄미운 놈이니까…….”
셋은 상대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려지는 모습은 뭔가 많이 험상궂고 사악해 보이는 모습!
“태현 님, 지금 누구랑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어? 이다비.”
“…….”
* * *
태현의 매도에도 불구하고 이세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세연이 이렇게 연락을 한 이유는 하나.
혹시나 모를, 태현의 도주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에이, 설마 방송국에 찾아가서 계약하고 약속했는데 파토를 내겠어?’라고.
그러나 이세연은 알았다.
태현은 보통 사람들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수틀리면 태현은 그냥 위약금 내고 잠적할 것 같았다.
이세연이 태현의 정체가 판온 1의 김태현이라는 걸 밝히든 말든, 방송국과의 관계가 안 좋아지든 말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일정 한계를 넘으면 손익과 상관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바로 태현이었으니까!
‘혹시나 도망치지 않도록 잘 다독여 놔야지.’
이세연은 채찍과 당근을 사용해 태현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이제까지 채찍만 썼으니, 이제 당근을 사용해 태현을 잘 달래줄 차례!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태현이 탈주할지도 몰랐다.
-아니, 잘 지내나 해서.
-누군가가 연락만 안 했으면 잘 지냈겠지.
-이야. 그게 누굴까? 나는 아니지?
-…….
이세연의 얼굴 두께는 태현의 얼굴 두께만큼이나 두꺼웠다.
어지간한 매도로는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태현은 공격을 포기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된 이상 본론으로 들어간다!
-됐고, 할 말만 말해. 지금 바쁘니까.
-뭐하느라 바쁜데?
-사디크 교단 믿는 마을 들어가서 사디크 성기사인 척하면서 사디크 교단 재료로 사디크 교단 날려 버릴 폭탄 만드는 중이다.
-그냥 말 안 해주면 되지, 꼭 그렇게 비꼴 필요는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것까지 진심으로 들을 수는 없었다. 이세연은 태현이 비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꼬는 거 아닌데.’
태현은 떨떠름했다. 진실을 말해줘도 믿어주지 않는 이 시대!
-알겠어. 바쁜 거 같으니까 바로 말할게. 프리카 투기장으로 와서 팀으로서 합 좀 맞춰보자고 하려고 했어.
-뭐? 진짜? 그런 거 신경 쓰고 있었어?
투기장 대회를 ‘그런 거’라니. 이세연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녀니까 이해해 주는 말이지,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어이가 하늘을 뚫고 올라갔을 것!
-신경 안 쓰는 게 이상한 사람이지.
-뭘 합을 맞춰. 그냥 즉석에서 만나서 싸워.
-그러다 지면 망신이잖아.
-난 망신 아닌데? 난 신경 안 쓰는데? 아. 그냥 트롤해서 져버릴까?
-…….
다시 살아나는 태현의 얄미움!
그러나 이세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흔들리면 태현이 원하는 대로 넘어가 주는 셈!
-다른 팀은 몇 달이고 연습해서 오는데, 우리 팀은 아직 인원도 다 안 정해졌잖아. 합 정도는 맞춰봐야지.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면, 네가 도망칠까 봐 확인하는 목적도 있어.
-…….
-보통 이런 말을 하면 ‘나는 안 도망친다’고 대답해 주지 않아?
-하하. 원래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잖아.
-……꼭 투기장으로 붙잡고 와야겠네.
-어떻게 붙잡고 올 건데? 응? 어떻게 붙잡고 올 건데? 에베베~
-…….
상상을 초월하는 유치함!
이세연은 당황스럽다 못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정말 상대를 도발하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하는 태현이었다.
신나서 이세연을 괴롭히던 태현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잠깐, 이세연도 투기장에 있으면 여기에서 나름 가깝지 않나?’
이세연은 서버 최고의 네크로맨서 중 하나였다. 그리고 네크로맨서는 혼자 다녀도 그 자체가 군대!
태현의 잔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좋아. 농담은 적당히 하고. 합을 맞춰보자고?
-!
태현이 순순히 말을 들을 것 같자, 이세연은 안도했다.
아무리 그래도 역시 대회를 조금은 신경 쓰고 있었구나!
-그래. 올 거야?
-그런데 내가 지금 퀘스트를 깨고 있어서. 그 퀘스트를 먼저 깨고 가야 할 것 같거든.
-무슨 퀘스트?
-사디크 교단 퀘스트. 도와주면 순순히 투기장 가주지. 참고로 나도 프리카 대륙이야.
이세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디크 교단이라니. 프리카 대륙에서 가끔씩 나타난다는 소문은 들었었다.
‘김태현은 얼마 전까지 역병 저주 퀘스트 때문에 대륙의 자기 영지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벌써 프리카 대륙에서 사디크 교단 퀘스트를 깰 수가 있나?’
-오래 걸리는 거면 사양이야. 교단 위치 찾다가 대회 시작하겠다.
이세연도 이렇게 숨어 있는 교단을 상대하는 게 어느 정도의 퀘스트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정보부터 수집해야 하는 장대한 연계 퀘스트!
-위치는 찾았어.
-?!
이세연은 다시 한번 놀랐다.
아무리 봐도 시간상 사디크 교단 위치를 찾기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찾았다고?
‘어떻게 찾은 거야?!’
사디크 교단에 스파이라도 심어놓은 게 아니면 불가능한 속도!
-그래서 위치 부르면 올 건가?
-……그 퀘스트 끝나면 같이 손잡고 투기장 간다고 약속해 주면.
-손잡는 건 빼고.
-믿어도 되지?
-하하. 날 못 믿는 거야? 거기 투기장이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봐. 내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냐고.
-…….
다른 사람들이야 태현의 이미지에 속아 넘어가지만, 이세연은 아니었다.
‘김태현을 도망치게 못 하려면…….’
이세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