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324화
시끄럽게 고함을 지르는 선원 NPC들!
그러나 다른 플레이어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뭐야, 해적이야?”
“잘됐네. 가는 길에 경험치나 먹자.”
“난 선실에서 쉴래. 그거 잡는다고 얼마 주지도 않는데.”
“야, 이런 걸 다 모아야 레벨 업을 하는 거야. 게다가 해적들 전리품은 좋은 거 나올 때가 있다고.”
“그거 될 놈만 되는 거야. 우리는 안 돼.”
에스파 왕국의 항구에서, 프리카 대륙까지 가는 항로에는 그다지 강한 해적들이 없었다.
즉, 지금 나타난 해적들은 가끔 나타나 주는 약한 해적들에 불과했다.
경험치와 전리품을 공짜로 챙겨주는 고마운 돌발 이벤트!
“해, 해적이라고?”
“별거 아닌 놈들이겠죠. 애초에 여기 강한 해적들이 나왔으면 그렇게 많은 플레이어가 프리카 대륙 갈 수도 없었을 거고요.”
“내가 해적에 좀 안 좋은 추억이 있어서 말이야…….”
“……?”
“예전에 계약한 곳의 배가 소말리아 해적 놈들한테 납치당한 적이 있지.”
“…….”
태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유 회장을 쳐다보았다.
“어르신, 여기는 게임이거든요?”
“해적 놈들을 얕보지 말라니까! 빨리 도망칠 방법을 찾아보게.”
“아니, 도망칠 필요가 없다니까요. 겁먹을 이유가 없어요. 여기 배 위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고렙이라고요.”
프리카 대륙으로 가는 플레이어들은 보통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플레이어들이었다.
투기장에 참가하거나, 아니면 프리카 대륙의 퀘스트를 노리거나. 둘 다 고렙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들이었다.
물론 유 회장처럼 저렙 플레이어들도 있기는 했다.
이번에 열릴 투기장 대회를 직접 구경하려는 목적으로 오는!
그러나 그걸 제외하더라도 이 배의 전력은 충분히 강했다.
어설픈 해적 NPC 정도는 그대로 갈아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래? 그게 정말인가?”
“네. 네. 보시면 알겠지만 경험치나 골드 좀 벌어보려는 플레이어들이 알아서 싸울 겁니다.”
케인이 물었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
“그냥 가만히 있자. 괜히 눈에 뜨이기 싫으니까.”
영지에서의 습격 이후로 태현은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일단 판온에서 만나는 사람은 내 적이라고 생각하고 보자!’
처음 보는 사람이 태현에게 ‘판온 1의 원한을 갚겠다!’라고 덤벼들어도 태현은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해적이다! 모험가분 중 같이 싸워주실 분들 있으십니까!
“나 싸운다!”
“나도.”
“저요!”
플레이어 중 돌발 퀘스트를 깨려는 사람들이 손을 들기 시작했다.
태현과 케인, 이다비는 그걸 보며 조용히 선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스르륵-
“??”
“배가…… 늘어났다?”
저 멀리 나타난 해적선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 척이었던 해적선이 두 척이 되고, 네 척이 되더니…….
이윽고 나타나는 대규모 해적 함대!
“…….”
“…….”
모두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 * *
“이게 뭐야?!?!”
“아, 아니. 말이 안 되는데. 진짜 말도 안 돼! 왜 여기에 저런 해적들이 나타나지?”
“저 깃발, 갈르두의 깃발이다!”
플레이어 중 에스파 왕국의 바다에서 오래 돌아다닌 플레이어가 해적 깃발을 알아보았다.
대해적 갈르두의 깃발!
그 말을 들은 태현이 움찔했다.
갈르두라면 분명…….
태현이 <해적왕의 저주받은 보물 지도>를 가져다 바치겠다고 해놓고서 튀어버린 상대!
당연히 태현을 향해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두 번이나 사기를 당했으니까.
태현은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망했군.’
하도 요즘 다양하게 일들이 터지다 보니 갈르두를 잊고 있었다.
에스파 왕국 앞바다에서, 별생각 없이 배를 타다니.
이건 그냥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가짜 지도를 만들기는 했는데…… 이게 지금 통할까?’
태현은 머리를 굴렸다.
저번에 언젠가 써먹기 위해서 가짜 지도를 여러 장 만들긴 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쓰려고 만든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조금 더 안전하게, 조금 더 통할 것 같은 상황에서 만들려고 쓴 것!
지금 갈르두한테 잡힌 다음에 지도를 내밀어봤자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화술 스킬이 고급이기는 한데…… 통할까? 아니, 아무래도 그건 너무 도박 같다.’
태현은 일단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사기를 치기 위해서는 태현이 상황을 주도해야 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역효과였다.
지금은 일단 도망!
-싸워주실 모험가분들은 앞으로 나와주세요!
“미쳤냐?! 저걸 어떻게 싸워!”
“싸울 생각 하지 말고 밟아! 밟으라고!”
“재수가 없어도 어떻게 이렇게 없냐? 갈르두를 왜 여기서 만나는 거지?”
플레이어들은 선원들에게 속력을 내라고 화를 냈다.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태현 때문에 갈르두가 여기 찾아왔다는 것을!
“그래도 지금 거리가 좀 있어! 멀어지면 안 쫓아올 수도 있다고!”
“맞, 맞아! 무슨 갈르두랑 원한을 진 것도 아닌데 갈르두가 계속 쫓아오겠어? 보통 거리 멀어지면 그냥 포기하고 갈 거야!”
행복회로를 돌리는 플레이어들!
그러나 진실을 알고 있는 태현은 거기에 낄 수가 없었다.
“…….”
도주를 위한 두뇌 풀가동!
“용용이를 타고 도망치는 건 어떨까요?”
이다비가 속삭였다. 태현은 그 말을 듣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예전이면 힘들었겠지만, 용용이는 마계를 다녀오고 나서 급성장한 상태였다.
여기서 프리카 대륙까지 태현 일행을 태우고 날아갈 수준은 되는 것!
그러나 태현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갈르두 정도 되는 보스 몬스터면 날아서 튀기도 힘들 것 같은데…….’
괜히 혼자 날아올랐다가 집중 공격만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들었다.
지금 이 배에 있는 장점 중 하나가, 다른 플레이어들이 잔뜩 있다는 것!
인간 방패…… 아니, 도움을 줄 수 있는 플레이어들을 버리고 날아오르는 건 위험할 수 있었다.
-신의 예지!
이럴 때 쓰는 사기 스킬이 바로 신의 예지!
그리고 태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슬프게도 스킬이 말해주고 있었다.
하늘로 날아오르면 죽는다!
“아오…….”
“무리예요?”
“무리일 거 같은데.”
이제 남은 건 이 배가 갈르두의 해적 함대를 잘 따돌리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상황을 모르는 유 회장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별거 아닌 놈들이라며?”
“하하, 원래 인생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저런 해적한테 설마 당하겠어?’ 하다가 당하는 거고. ‘설마 과징금 물겠어?’ 하다가 무는 거고.”
“과징금은 내 잘못 아니라고 했잖으냐! 이놈이 정말!”
아주 시도 때도 없이 기회만 나오면 과징금을 꺼내는 태현!
유 회장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 태현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군. 다른 사람들하고 너희들의 반응이 좀…….”
“……!”
유 회장은 역시 보는 눈이 있었다.
게임은 잘 몰라도, 다른 플레이어들이 보여주는 반응과 태현이 보여주는 반응이 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혹시 너희 때문에 저 해적 놈들이 쫓아오는 건 아니겠지?”
날카롭고 예리한 추측!
“하하하하, 설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가?”
유 회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속력을 내며 해적선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걸 본 태현은 이다비에게 속삭였다.
“이야, 저 어르신 날카로운 거 봐라. 케인하고는 다르네. 2케인은 되겠다.”
“3케인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너희들…… 사람이 옆에 있는데 사람을 지능 단위로 쓰지 마……!”
케인이 울컥해서 따지는 동안, 해적 함대는 점점 속력을 올리고 있었다.
-이, 이런…… 해적선들이 쫓아온다!
-바람을 타! 바람을 타라고!
-해적 마법사들이 마법을 쓰고 있습니다! 너무 빨라요!
절망 섞인 선원들의 목소리.
간단히 들어도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따라잡힐지도 모른다!
그러자 플레이어들의 반응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야, 잡힐 거 같은데?”
“차라리 싸우는 것보다 협상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판온에서 문제를 꼭 전투로만 해결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아무리 강한 보스 몬스터하고 마주치더라도 꼭 죽으리라는 법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은 딱히 갈르두와 원한이 없었다.
갈르두에게 굽신거리면서 원하는 걸 바치고 풀려나는 것도 방법 중 하나!
그러나 태현은 아니었다.
갈르두와 협상으로 들어가면 무조건, 100% 망한다!
여기 플레이어들을 어떻게든 끌어들여야 했다.
태현은 재빨리 도약해서 돛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매우 불안정한 원시 드워프의 머스킷>을 꺼냈다.
거기에 <행운 부여>까지 사용!
철컥!
‘누가 너를 싫어한다면, 너를 더 확실하게 싫어하도록 만들어줘라!’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밑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태현이 위에 올라가서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타아앙!
“?!?!”
갑자기 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모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야!!! 뭐하냐!!!”
“먼저 공격을 하면 어떡해!”
그러나 태현은 당당하고 뻔뻔하게 말했다.
“해적 놈들이 오는데 싸워야지!”
어떻게든 너희들을 방패로 써먹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
“싸우긴 뭘 싸워!”
“저거랑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거 같냐!”
“빌어도 모자랄 상황에 먼저 선공을 날리면 어쩌자는 거야?!”
“야, 야. 괜찮아! 어차피 아직 멀어서 저런 공격은 안 맞을…….”
맞는 말이었다.
태현은 사격 스킬도 낮고, 갖고 있는 무기도 저번 던전에서 급조한 무기였으니까.
그러나 태현에게는 다른 무기가 있었다.
바로 무지막지한 행운 스탯!
쉬이이이익- 팍!
날아가던 탄환이 그대로 해적선의 깃발을 뚫고 갈르두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챙!
물론 갈르두에게는 흠집도 내지 못했지만, 도발로는 넘치고도 충분했다.
[<행운 부여> 스킬로 장비에 무작위 버프가 부여됩니다.]
[<매우 불안정한 원시 드워프의 머스킷>에 <이중사격> 스킬이 부여됩니다.]
[원거리에서 맞출 수 없는 표적을 맞추는 데 성공합니다. 사격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그리고 자리에 있던 플레이어들에게 전원 메시지창이 떴다.
[대해적 갈르두의 해적 깃발을 공격했습니다. 갈르두가 매우 분노합니다.]
[대해적 갈르두가 총공격 명령을 내립니다!]
-모두 바다 밑으로 묻어버려라!
그걸 본 모두가 한마음으로 외쳤다.
“야!!!!!!”
“하하. 싸우자! 해적들한테 항복할 수는 없지! 모두 다 같이 싸우자고!”
“저런 미친놈! 너 뭐하는 놈이야? 너 해적 스파이지!”
“저놈부터 잡아!”
그러나 태현은 이미 잽싸게 내려온 다음 은신 스킬을 사용해 사람들 사이로 숨어든 상태였다.
정말 귀신 같은 물귀신 작전!
유 회장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데에는 정말 재주가 하늘에 달한 놈이구나!’
“이렇게 된 이상 나라도 튄다!”
“작은 배 어디 있어?”
“같이 거북이 펫 타고 도망치실 분 구합니다! 골드 선 제시!”
풍덩! 풍덩!
순식간에 갑판은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먼저 도망치려고 바다에 빠지는 사람들까지!
태현이 바라는 게 바로 이런 분위기였다.
‘좋아. 이렇게 가면 나는 튈 수 있겠지!’
이렇게 흩어지는 플레이어들을 방패로 써서 혼자 빠져나가겠다는 속셈!
쾅! 쾅쾅!
갈르두가 이끄는 해적 함대에서 마법 대포가 굉음을 내며 불을 내뿜었다.
바다에 빠져서 헤엄을 치는 플레이어들은 기겁하며 발버둥 쳤다.
“어쩔 수 없군.”
“……?”
“저, 저 사람은…… 크로포드다!”
“크로포드! 크로포드!”
상황을 엿보고 있던 태현은 갑자기 들리는 환호성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걔가 누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