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318화
이제까지 어떤 도발에도 울컥하지 않았던 태현이 순간 살짝 울컥했다.
물론 작고 괴상한 영지기는 했다. 그래도 여기에 들인 공이 얼마인데!
그러나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태현의 말을 무시했다.
아니, 태현의 말을 귀담아들을 여유가 없었다. 생각했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진 것이다.
사디크 교단의 마수들이 영지 밖에서 난리를 피우고, 사디크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나뉘어져서 영지 안에서 날뛰는 동안, 그들은 태현의 발목을 잡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태현이라도 고렙 플레이어 다수에, 사디크 교단 NPC까지 끼고 있는 그들을 빠르게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그사이 다른 사람들이 영지를 최대한 많이 부수는 게 원래 계획!
태현의 무시무시한 PVP 실력을 알고 있는 플레이어들은 태현을 정면으로 상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야, 어쩔 거야? 왜 여기 기사단이 있어?
-지금 저기 뒤에서 기사단 나타나면 우리가 튀지도 못하잖아! 다른 놈들도 다 잡혔고!
사디크 성기사나 사제면 모를까, 플레이어들은 여기서 죽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디까지나 판온 1의 김태현이 여기 태현이라는 소문을 듣고 겸사겸사 복수를 하러 온 것이었지, 같이 죽으면 본전도 못 찾았다.
“걱정 마라. 어차피 저거는 허세야!”
“허세?”
“그래. 김태현이 저런 기사단을 어떻게 데리고 있겠냐! 껍데기만 멀쩡하고 그렇게 강한 놈들이 아닐 거야! 봐라!”
플레이어 한 명이 기세 좋게 말하더니 뒤에서 나타난 기사단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이야아아아!”
그리고 튕겨 나갔다.
콰콰콰쾅쾅!
-명예의 문장, 푸른 피의 돌진!
아농 백작 옆에 있던, 단단히 중무장한 기사가 스킬을 사용하며 돌진하자 플레이어는 그냥 날아가 버렸다.
“…….”
그걸 본 플레이어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 정도 공격이라면 아무리 봐도 그들보다 낮은 레벨이 아니었다.
최소 레벨 200은 넘겼을 것 같은 위압감!
그런 기사들이 우르르 모여 있으니 보통 겁나는 게 아니었다.
태현은 그 기색을 읽고 쐐기를 박았다.
“후후. 여기 기사들의 레벨은 각자 300이 넘는다!”
“!!!!”
플레이어들도 놀랐고.
“!!!!”
이다비와 케인도 놀랐다. 이다비는 화들짝 놀라서 태현한테 물었다.
이제까지 데리고 있던 기사단이 그렇게 강한 NPC였다니!
“진짜예요?”
“당연히 구라지.”
“…….”
둘이 소곤거리며 대화하자, 가운데에 놓인 플레이어들은 불안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
“너희들은 어떻게 할지 상의하고 있었지.”
태현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그 말에 플레이어들은 움찔했다.
그러나 모두가 겁만 먹은 건 아니었다.
플레이어 중 한 명은 결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 우리가 그렇게 쉽게 물러나지는…….”
“아, 그래? 그러면 뭐 싸우자. 봐주려고 했는데 싸우고 싶다면야.”
“……!”
태현의 말에 플레이어들의 눈빛이 뒤바뀌었다. 그들은 방금 말을 꺼낸 플레이어를 내버려 두고 우르르 거리를 벌렸다.
“어, 어? 애들아?”
“뭔 친한 척이야? 언제 봤다고.”
“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가 싫었어.”
순식간에 차가워진 플레이어들의 태도!
허세 한 번 부렸다가 같은 파티원들에게 버림받게 생긴 플레이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야, 야! 너무하지 않냐?!”
“너무하긴 뭘 너무해 이 자식아. 너 때문에 다 같이 죽을 뻔했는데.”
“죽을 거면 혼자 죽으라고! 기회를 주면 사람이 감사합니다 하고 받을 줄 알아야지!”
마치 모래알 같은 팀워크였다.
팀원들에게 버림받게 생긴 플레이어는 필사적으로 그들을 설득하려고 들었다.
여기서 혼자 남으면 정말 혼자 덤터기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
“야, 들어봐! 김태현이 왜 봐주겠어! 우리가 그렇게 난리를 피웠는데! 건물도 부수고 여기 주민들도 공격하고!”
대놓고 태현 들으라고 하는 소리!
혼자 죽기 싫으니 물귀신 작전으로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이려는 속셈이었다.
실제로 그 말을 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은 당황해서 입을 다물게 하려고 했다.
“닥쳐, 이 자식아!”
“김태현 앞에서 도발하면 어쩌자고!”
“죽을 거면 혼자 죽으라니까!”
퍽! 퍼퍼퍽!
아예 공격까지 하는 플레이어가 나올 정도!
그러나 궁지에 몰린 플레이어의 말은 은근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데 말이 되긴 해. 김태현이 왜 우리를 살려 주냐?”
“차라리 싸워서 포위망 뚫자니까. 원래 계획대로 흩어져서 건물 부수면서 도망치면 김태현이라도 다 못 잡아.”
‘이 자식들이…….’
멀리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태현에게는 섬뜩한 계획!
실제로 그러면 지금 피해가 몇 배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희를 살려주는 이유는 하나다.”
“???”
태현의 말에 모든 사람이 시선을 집중했다.
“너희도 제카스한테 속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
“……!!”
“제카스 그놈이 얼마나 사악한지 이제는 알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제카스 그놈은 자기가 깨던 퀘스트 하나를 뺏겼다고 그렇게 허위 소문까지 퍼뜨려서 나를 괴롭히려고 하는 놈이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놈이 있는지…….”
태현은 최대한 불쌍하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봐도 나는 피해자!’라는 표정!
“나처럼 착하게 살려는 사람을 제카스는 자기 퀘스트 하나 방해했다고 이렇게 괴롭히고 있다. 세상에 이름 하나 같다고 몬다는 게 말이나 되냐? 응?”
“너도 딱히 착하지는 않 컥! 커허헉!”
아까 괜히 허세를 부렸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먹은 플레이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가 된통 공격을 당했다.
“이 자식은 진짜 영원히 닥치게 해야 해!”
“닥치고 있어! 김태현 님이 말씀하시잖아!”
순식간에 ‘김태현 님’으로 바뀐 호칭!
“이, 이 멍청한 놈들아! 너희는 속고 있어! 저게 약속을 지키겠냐! 나 같아도 안 봐주겠다! 양보해서 속았다고 쳐도 그 속은 놈들을 왜 내버려 두겠어! 힘을 합쳐서 빠져나가야 한다니까!”
“닥쳐! 김태현 님은 너 같은 쓰레기하고 달라!”
위기의 상황에서 구명줄을 잡은 플레이어들은 필사적으로 매달리려고 했다.
집단공격!
[HP가 0으로 내려가 사망합니다.]
반항하던 플레이어는 결국 공격을 맞고 로그아웃 당했다.
그 순간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이 맞다!”
“?!”
“김태현 님은 저런 뻔뻔한 놈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다!”
“……너희는 제발 그냥 다른 곳으로 가주면 안 되냐?”
목소리의 정체는 대장장이들이었다.
가브리엘을 필두로 한 대장장이들!
다행히 플레이어들은 정신이 없어서인지 가브리엘의 얼굴을 못 알아보고 있었다.
알아봤다면 바로 공격부터 들어갔을 것!
역병 저주 때문에 피해를 본 플레이어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태현이 진저리를 치든 말든, 대장장이들은 목 놓아 소리쳤다.
“태현 님을 너희 같은 쓰레기들과 비교하지 마라! 판온에서 피해 받는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하시는 분인데!”
“맞다! 맞다!”
태현은 그냥 대꾸하는 걸 포기했다. 옆에서 듣던 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건 뭔 다른 세계의 김태현이냐?’
“그, 그러면…… 정말 그냥 보내줄 건가?”
“항복해도 되는 거겠지?”
태현은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쁜 건 제카스잖아. 너희는 속았을 뿐이지. 안 그래?”
“맞, 맞아!”
“제카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속았지 뭐야!”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서로 마주 보고 웃는 태현과 플레이어들!
태현은 웃음을 뚝 그치더니 손가락으로 버포드 가리켰다.
“그러면 저 사디크 놈들 당장 잡아가지고 데리고 와.”
“……!”
차차차창!
순식간에 둘로 나눠지는 습격자들!
버포드는 당황한 얼굴로 플레이어들을 쳐다보았다. 설마 태현의 말 몇 마디에 이렇게 돌아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저 말을 믿냐?!”
“너보다는 믿을 만하지!”
“맞아! 김태현은 약속 지키는 플레이어라고.”
“저 정도로 유명하면 체면 생각해서라도 약속은 지키겠지!”
궁지에 몰린 플레이어들은 자기가 좋을 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태현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했다.
“쳐!”
“이 배신자 놈들! 사디크의 노여움이 두렵지도 않느냐!”
“지금 그런 소리를 할 때냐! 이 다 망한 교단 놈들이 진짜!”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싸움이 일어났다.
버포드가 데리고 온 사디크 교단의 사제들과 성기사 VS 태현을 노리고 온 플레이어들!
싸움이 일어나고 나서야 태현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후…….”
영지에 대한 공격은 예상하고 있기는 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갑작스럽게 들어와서 당황했을 뿐.
‘아무래도 지킬 게 있다 보니까 상당히 귀찮은데 이거.’
이런 기습을 이 정도로 막은 건 잘 막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지 곳곳에서 불타고 부서진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디크의 화염이 남긴 흔적들!
“죽여! 죽여!”
“이 배신자들이 감히!”
-격노의 포효!
-목숨 끊는 칼날!
-사디크의 화염 방벽! 사디크의 화염 사냥개 소환!
“크아악!”
점점 더 치열해지는 싸움!
그러는 동안 태현은 혼자 생각에 잠겨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걸 본 이다비가 말을 걸었다.
“팝콘이라도 드려요?”
“응? 무슨 팝콘?”
“싸움 구경하는 거 아니었어요?”
“……생각하고 있었는데. 잠깐, 그보다 팝콘이 있었단 말이야? 그런 걸 왜 파는 거야?”
“저희 길드에서 앞으로 많이 팔릴 거 같아서 미리 만들어놓고 있거든요.”
깔끔한 팝콘 요리:
정해진 레시피를 충실하게 따르는 요리사가 대량으로 만든 요리다.
딱히 영양은 없지만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복용 시 포만감이 아주 조금 상승함.
복용 시 기분이 좋아짐.
‘…….’
뭔가 정말 무의미한 요리!
스탯을 올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입이 심심할 때 맛을 느끼기 위한 요리였다.
그러나 이다비는 진지했다.
“나중에 유명해지면, 앞으로 이 팝콘 그릇에 광고도 붙일 수 있지 않을까요?”
“꿈이 너무 큰 거 아니야?”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태현 님이 먹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면 인기를 탈지도 몰라요! 자! 앞으로는 이렇게 남들 싸움 붙여놓고 구경하실 때마다 팝콘을 꺼내서 드세요!”
이다비의 박력에 밀려, 태현은 팝콘을 집어 들었다.
그냥 현실의 팝콘과 비슷한 맛!
적당히 맛있는 맛이었다.
‘이걸 꼭 먹어야 하나?’
태현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밑의 싸움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패배한 쪽은 사디크 교단 세력!
“헉, 헉헉…… 김태현! 이겼다! 약속을 지켜라! 우리는 그만 가도 되겠지?”
“이겼냐? 열심히 했네. 고생 많이 했으니까 나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
“보내준다며!”
태현의 말을 이해 못 한 플레이어들은 펄쩍 뛰었다.
“아니, 보내줄 거야. 기다려 봐. 임마. 안 좋게 만났지만 내 영지를 위해 싸워줬는데 보상 하나 못 주겠냐?”
“……!”
태현의 말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쳐들어온 사람한테 보상까지 준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진짜 보상 주는 건가?
-와, 이건 너무 착한데?
-판온 1의 김태현이랑 다른 놈이 분명해.
그렇게 떠드는 사이 뜨는 그들 앞에 뜨는 퀘스트창!
<제카스의 목을 가져와라–아키서스 교단 퀘스트>
모험가 제카스는 사악하고 음흉한 음모를 꾸며 아키서스 교단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자비로운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은 용감무쌍하고 정의로운 당신들을 모아 제카스를 응징하려고 한다.
아키서스 교단을 위해 제카스의 목을 가져와라!
보상:1골드.
-퀘스트 실패 시 <아키서스의 저주>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이야. 퀘스트 만드느라 힘들었어. 받아줄 거지?”
“…….”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