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309화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투기장 리그에 나가는 것보다, 이세연이 어떤 짓을 할지…….
‘내 등을 찔러도 열 번은 넘게 찌르겠지!’
태현이 이미지 메이킹을 안 하려고 해도 어쩌다 보니 인성 좋은 사람으로 이미지가 만들어진 케이스라면…….
이세연은 아주 의도적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한 케이스였다. 행동 하나하나 철저하게 조심하면서 행동하는 그녀!
태현은 판온 1에서 맞붙어봤기에 알고 있었다.
이세연은 결코 방송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아니었다.
태현처럼 웃으면서 남의 뒤를 찌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태현이 생각해 보니, 이세연이 태현에게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이세연이 하자는 건 다 거절해 왔지 않은가!
‘아니, 생각하니까 억울하네. 판온 1때 이겼으면 된 거 아닌가? 내가 뭐 승패에 불복하기라도 했나? 깔끔하게 접었는데 왜 이렇게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는 거야?’
다른 수많은 랭커들은 태현의 피해자라고 쳐도, 이세연은 절대 피해자가 아니었다.
태현이 안심하는 사이, 이세연이 옆에서 따뜻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면 같이 나갈 거지?”
“미쳤니?”
“…….”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나오는 대답!
그러나 이세연도 만만치 않았다.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대신 태현의 팔을 잡고 있는 손의 힘만 늘어났을 뿐!
“야, 아프거든?”
“판온인데 아플 리 없잖아.”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왠지 모르게 그러니까 좀 놔라.”
태현은 슬며시 이세연의 손에서 팔을 빼놨다. 내버려 뒀다가는 팔을 뽑을 것 같은 기세!
“정말 안 나갈 거야?”
“정말 안 나갈 건데.”
“그래. 그럴 줄 알고 설득할 방법을 생각해 왔지.”
“뭐 어떻게 하려고?”
“여러 가지 생각했었는데…… 네 영지에 언데드 군단 총공격을 가하거나…….”
오싹!
태현은 순간 움찔했다.
지금 막 오크 대공세의 수습을 끝내고 이제 좀 뭔가 지어 올리고 있는 영지에 언데드 대습격이라니!
“그런데 그건 좀 비효율적이잖아? 게다가 아키서스 교단의 총본산이기도 하고. 내 언데드들 다 거기에 쏟아붓는 건 너무 손해가 크다고 생각했어.”
“…….”
“그래서 그냥 너하고 네 주변 사람들 공격하겠다고 협박하려고 했는데…….”
“하! 잘못 생각했군. 난 내 주변 사람들을 아무리 공격해도 절대 흔들리지 않으니까.”
“……쓰레기 같은 소리를 너무 당당하게 하지 마…….”
이세연은 황당하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저런 소리를 멋있게 말하는 것도 재주였다.
“그리고 사람 말은 좀 끝까지 들어줄래?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
“생각해 보니까 더 좋은 게 있더라고. 여기 기다리면서 방송 봤거든? 내가 뭘 봤게?”
이세연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방송 창을 켰다. 그걸 본 태현은 갑자기 불안해지는 걸 느꼈다.
뭐지?
“짜잔!”
이세연이 킨 건 제카스의 방송이었다.
원래라면 판온 내에 접속해서 플레이어 시점으로 방송을 하고 있었겠지만, 태현한테 죽은 페널티 때문에 접속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 얼굴로 방송 중!
-여러분! 제가! 이렇게! 외칩니다! 저 김태현이 판온 1의 김태현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판온 1 때 플레이어들은 모이십시오! 김태현을! 잡읍시다!
“…….”
침을 튀겨가며 열렬하게 연설하는 제카스!
죽은 지 한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벌써부터 태현을 레이드할 파티를 모집하고 있었다.
태현은 갑자기 골치가 아파 오는 느낌이었다.
“왜, 머리 아파?”
“…….”
이세연한테 속마음을 들킨 태현은 슬며시 이마에서 손을 뗐다.
“지금 보니까 증거가 없어서 반응은 반으로 나뉘고 있거든?”
아무리 제카스가 유명 플레이어라고 하더라도, ‘내 감에 따르면 저 놈은 판온 1의 그 김태현이다!’라는 말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힘들었다.
반반으로 나뉜 것만으로도 대단한 수준!
“그런데 여기에 나까지 끼어서 말하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이세연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거의 귀에 입을 붙이고 말하는 수준!
“응? 응?”
“…….”
이세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명백한 뜻!
태현은 혀를 찼다.
이번에는 그가 졌다. 그가 퀘스트에 정신이 팔린 동안, 이세연은 잔뜩 준비를 하고 온 것이었다.
이세연까지 태현이 판온 1의 태현이라고 말한다면, 정말 여론은 손 쓸 수 없이 악화될 것이다.
탁!
태현은 이세연의 손을 붙잡았다.
“예전부터 너하고 같이 팀으로 싸우고 싶었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 진작 그러지 그랬어!”
“하하! 하하하!”
“까르륵!”
서로 마주 보고 화기애애하게 웃는 둘!
“아예 내 길드에도 들어오는 게 어때?”
“작작해라.”
“알겠어. 그건 포기할게.”
너무 밀어붙이면 태현이 자폭할 수도 있었다. 그걸 눈치챈 이세연은 순순히 물러섰다.
* * *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아자!”
“정말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수혁은 친구들과 프리카 대륙 투기장에 가서 합을 맞춰보고 있었다.
투기장 주변에는 예선을 준비하기 위해 모인 플레이어들이 우글우글!
“와, 저기 랭커 자레트 아니냐? 한국 대회인데 참가한 거야?”
“들어보니까 자기 나라 초대 팀에 못 들어가서 예선 뚫겠다고 온 거 같던데.”
“아니 왜 다른 나라 놈이 여기까지 와?”
한국 플레이어들은 해외 랭커가 예선을 준비하기 위해 온 걸 보고 투덜거렸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이 투기장 프로 리그가 크게 될 거라는 느낌을!
“수혁아, 우리가 믿는 건 너밖에 없어!”
“그래! 실력에도 밀리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고!”
“너희 그런데 그렇게 이겨도 되는 거 맞냐?”
정수혁의 질문에 친구들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기기만 하면 장땡이지!”
“맞아! 일단 이기고 생각하자고!”
[프리카 투기장에 입장합니다.]
[레벨이 100으로 고정됩니다.]
[스탯이 자동으로 변경됩니다.]
[투기장 안에서는 PK가 불가능합니다.]
[장비가 자동으로 해제됩니다.]
“와, 스탯 쫙 내려갔네.”
“이거 얼마 만이야?”
“저기 방송국 스태프들인가?”
저 멀리 같은 색의 옷을 맞춰 입은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일사불란하게 다른 플레이어들을 나누는 모습이 MBS의 스태프들 같았다.
“예선 참가하시는 플레이어분들 이쪽으로 모이세요. 장비는 여기서 받아 가시면 됩니다!”
“착용하지 않고, 들고 들어가는 소모품이나 기타 아이템들은 개수 제한이 있습니다! 목록에 없는 아이템들은 갖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중에 발각될 경우 부정 행위로 탈락입니다!”
이번 프리카 대륙 투기장 리그의 캐치프레이즈는 <순수한 실력의 싸움>이었다.
판온 1의 투기장 리그가 플레이어간의 레벨, 장비 차이 때문에 긴장감이 사라졌다고 판단한 방송국은 밸런스에 최선을 다했다.
정말 순수하게 플레이어들의 직업과 스킬, 센스, 전략만으로 승부를 보게 될 투기장!
“야, 이런 곳에서 사기 칠 사람이 있나?”
“세상에 별 사람이 다 있으니까 있을지도 모르지. 간 큰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친구들이 떠드는 걸 듣고, 정수혁은 별생각 없이 말했다.
“맞아. 태현 선배님이라면 충분히 하실 수 있을걸.”
정말, 악의는 하나도 없이 순수한 선의로만 말한 정수혁!
“……?”
“푸하하하핫!”
“수혁이 지금 농담한 거야? 방금 건 좀 웃겼다.”
정수혁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친구들!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정수혁은 굳이 다시 말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태현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친구들!
태현과 같이 다녀본다면 그 환상이 순식간에 깨질 것이다.
“좋아. 가보자고!”
“우리에게는 수혁이가 있다!”
정수혁의 친구들은 기세 좋게 외치고 투기장의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그 순간 보이는 반대편의 상대팀 플레이어들!
“…….”
“…….”
조용히, 말없이 살벌하게 있는 플레이어들!
“뭐, 뭐야?”
“왜 분위기 잡고 있는 거지?”
딱 봐도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플레이어들이었다.
장비는 다 벗고 방송국에서 지급한 장비를 입고 있어서 어떤 플레이어인지 추측할 수는 없었지만……
뿜어내는 포스는 장난 아닌 수준!
“저 아저씨들 뭐야?”
“야, 내가 찾아봤는데 판온 1에서 날렸던 플레이어들이야!”
그새 검색하고 온 정찬우가 급하게 말했다.
“판온 1에서 투기장 리그 준비하던 프로라던데?”
“뭐?! 그런 사람들이 여기 왜 있어?”
“그야 다시 열리니까 도전한 거겠지…….”
“…….”
정말 예선인데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래도 예선이니까 어느 정도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기대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분!
“쫄, 쫄지 마. 우리도 지지 않아!”
“맞아! 연습한 걸 떠올리라고!”
‘연습한 거라면…….’
최대한 정수혁을 지키면서 싸우다가, 밀릴 경우 정수혁의 랜덤 마법에 모든 걸 거는 도박!
‘……별로 위안이 안 되는데?’
* * *
“무슨 대화를 했냐? 응? 무슨 대화 했냐니까? 나 좀만 알려주라. 설마 길드 제안 받아들였냐? 그러면 나도 데리고 갈 거지?”
“…….”
케인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태현의 표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걸 본 이다비는 급히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재수 없는 놈 옆에 있으면 불똥이 튀기 마련!
아니나 다를까, 케인에게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크아악! 왜! 내가 뭘 했다고?!”
케인에게 분풀이를 하고 나서, 태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프리카 투기장 리그, 나가기로 했다.”
“뭐?! 예선?!”
“아니. 방송국 초대 팀으로. 이세연하고 같이.”
“!!!”
케인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방금 이세연이 찾아온 건, 팀으로 초대하기 위해서 찾아왔던 거란 말인가?
“나도!”
“?”
“나도 제발……! 데리고 가 주세요……!”
현실 앞에서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다. 케인은 태현을 붙잡고 애타게 외쳤다.
“거기 출전해서 뭐하게?”
태현은 의아해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다비가 대신 해줬다.
“저번에 말했었잖아요. 집에서 눈치가 보인다고.”
“아…….”
태현이 케인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레드존 길드로 쏠쏠하게 벌던 수입도 끊겨, 나름 소소하게 잘 나가던 개인 방송도 태현과 같이 다닌 다음부터는 쪽팔려서 끊어, 케인의 상황이 궁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투기장 프로 리그는 천금 같은 기회!
‘제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가족들에게 체면이 선다……!’
더 이상 ‘너도 좀 밖에 나가!’나 ‘게임 말고 직장을 구해!’라는 소리를 듣고 살 수는 없었다.
“음…… 좋아. 한번 말해볼게.”
“?!??!”
케인은 깜짝 놀랐다. 설마 태현이 진짜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진짜로?”
“뭐야, 농담이었어? 그럼 말고.”
“아냐! 아냐!!! 내보내줘!!!”
“어차피 레벨은 다 똑같이 되니까 직업하고 센스 차이일 거 아냐. 네가 탱커로 못하는 놈은 아니니까…….”
이세연이 팀에 있고, 태현이 팀에 있으니 탱커는 평균만 해주면 됐다.
게다가 케인의 직업은 태현과 같이 있을 때 그 힘이 극대화되는 직업이었다.
“PD한테 말해볼게.”
“정, 정말? 그쪽에서 받아줄까?”
“안 받아주면 나도 안 나간다고 하면 그만이지 뭐.”
“너…… 이 자식……!”
케인은 감격의 눈빛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매번 구박하고 갈궜지만 이렇게 나를 챙겨주는구나!’
‘안 받아주면 안 나갈 수 있는 거 아닌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둘! 그걸 보며 이다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둘이 뭔가 서로 착각하고 있는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