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308화
나타난 것은 피곤한 표정의 세 플레이어였다.
태현과 이다비, 케인!
“아오. 앞으로는 뭐 만들 때 제발 폭발 좀 안 하게 만들면 안 되냐?”
“시끄러워. 그 폭발 아니었으면 걔네들 그렇게 쉽게 정리 못 했어.”
투덜거리는 케인을 구박하며, 태현은 받은 아이템을 확인했다.
끓어오르는 궁극의 역병이 담겨 있는 병:
끓어오르는 궁극의 역병이 담겨 있는 병이다. 기계공학 스킬이 있다면 이 병을 담아서 강력한 폭탄을 제조할 수 있다.
역병 해제의 정수:
악마가 만든 역병 해제의 정수다. 우물이나 호수에 부을 경우 영원히 저주를 해제하는 샘을 만들 수 있다.
어려운 퀘스트를 맡긴 만큼, 에슬라는 화끈하게 보상을 내주었다.
특히 역병 해제의 정수는 어디든 물이 고여 있는 곳에 부으면 영구적으로 저주를 푸는 샘이 되는 강력한 아이템이었다.
이걸 보자 태현은 바로 번개처럼 영감이 왔다.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
영지에 이 저주 해제의 샘을 만든다면?
플레이어들은 멀리 있든, 귀찮든, 알아서 찾아올 게 분명했다.
영지를 날로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
영지를 성장시키는 건 매우 어렵고 복잡한 일이었다.
지금 조그만 요새나 마을을 잡은 플레이어들은 영지를 키워보겠다고 별짓을 다 하고 있었다.
세금을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현실에서 <우리 영지에 오는 사람 중 다섯 명 추첨해서 상품을 드려요> 같은 이벤트를 할 정도로!
영지는 갖고 있으면 엄청난 이익이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크기가 되어야 했다.
정상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의 영지는 그저 돈 잡아먹는 하마일 뿐!
‘그래,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보상이 좀 나와야지. 그래야 세상이 공평하잖아?’
태현은 마음의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태현한테 당한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고혈압으로 쓰러질 소리였다.
“저기? 김태현?”
“야, 빨리 가자.”
“저기요? 여기 안 보여? 김태현?”
던전 출구로 나온 태현 일행을 보고 이세연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태현은 이세연을 발견하지 못했다.
던전 내에서 폭발 때문에 정말 죽을 뻔한 이다비와 케인은 지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빠직-
이세연의 하얀 이마 위에 힘줄이 하나 돋았다.
“누가 부르지 않았어요?”
“누가 부르긴 뭘 불러? 여기 사람이 어디 있다고.”
“……심연의 화살 삼연속!”
콰콰콰콰콰쾅!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는 짙은 암흑 화살들이 태현 일행의 발치를 향해 날아갔다.
바닥을 찢어발기는 강력한 마법 주문!
“으아악!”
“뭐야?! 기습인가?!”
“나 아까부터 여기서 있었거든?”
이세연은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기습이고 뭐고 대놓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제야 태현은 이세연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이세연은 싱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
태현은 눈을 깜박였다.
뭔가 여기서 볼 리 없는 얼굴을 본 것 같았다.
“이다비. 내가 지금 너무 피곤해서 악몽을 꾸는 것 같은데.”
“악몽 꾸고 있는 거면 퀘스트 깬 것도 날아가는 거 아닌가요?”
“아차. 그랬지.”
“그리고 꿈 아닌데요. 보세요.”
철썩, 철썩-
이다비는 태현의 양 뺨을 손바닥으로 짝짝 소리 나게 때렸다.
“어때요?”
“안 아픈데?”
“그야 판온이니까 안 아프죠.”
“그러면 넌 왜 친 건데?”
“……해보고 싶어서…….”
이다비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기회다 싶어서 했는데 생각해 보니 뒷감당이 무서워졌다.
“나도 해본다! 뺨 대봐!”
눈치라고는 없는 케인!
케인은 태현에게 복수할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손을 들고 달려들려고 했다.
“내 얼굴에 손대는 순간 넌 로그아웃이야.”
“……그냥 반가워서 하이파이브하자고 손들어 본 거다.”
케인은 살며시 손을 내렸다.
쾅!
데스 나이트 중 하나가 검집으로 바닥을 강하게 내려찍었다.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 명이 그녀만 내버려 두고 떠들자 이세연이 명령한 것이다.
“와, 나 진짜 이렇게 무시당하는 건 오랜만이야. 여러분? 저 여기 있거든요? 한 번만 더 무시하면 진짜 총공격이야.”
“네가 뭔데 우리한테 시비를 걸어? 우리가 누군지 모르냐?”
정체 모를 여자가 시비를 걸자 케인은 발끈해서 외쳤다.
누구든 간에 지금 태현-케인-이다비 이 셋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방금 저주까지 풀린 케인은 자신감이 200%인 상황!
“넌 내가 누군지 몰라?”
“몰라! 네가 누군데!”
“정말로 몰라? 내 얼굴 본 적 없어?”
“네가 누군데 얼굴을…… 어…… 어디서 본 것…….”
이세연이 위장용 장비를 두르고 있어서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허름한 장비 사이 얼굴은,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케인.”
“왜?”
“쟤 이세연이야.”
“…….”
순식간에 사라지는 자신감!
슬금슬금-
케인은 뒷걸음질 쳐서 태현 뒤로 숨었다. 그걸 본 이세연은 웃기 시작했다.
“김태현, 저 사람은 저번에도 봤지만 이번에도 재미있네. 저래서 데리고 다니는 거야?”
“아니. 나 따라다니면서 속죄하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부탁하길래 데리고 다니는 거다.”
“누가 언제 이 새…….”
-앞에 세워줘?
“……속죄하려고 따라다니는 거죠! 암요!”
케인은 눈물을 삼키며 대답했다. 이세연은 그걸 보고 더 크게 웃었다.
대굴욕!
케인은 속으로 울었다. 이세연 같은 유명 플레이어 앞에서 이런 개망신이라니.
‘크흐흑……!’
-너 왜 그러냐?
-그걸 몰라서 묻냐, 자식아! 이세연 앞에서 그렇게 개망신을 주고 싶냐!
-넌 맨날 망신당하고 다녔잖아. 저번에도 그러지 않았나?
-…….
반박할 수가 없었다. 더 슬퍼지는 케인!
-그래도 이세연은 다르잖아! 자식아!
-뭐야, 너 이세연 팬이었냐?
-판온 1 때부터 했는데 당연히 이세연 팬이지!
-저번에 죽을 뻔해 놓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그,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애초에 저번에 네가 이세연이 길드 들어오란 제안만 받아들였어도 이 꼴이 안 났을 거 아냐! 왜 그 제안을 거절해 가지고…… 그거 때문에 찾아온 거 아냐?
-그건 아닐걸.
-어쨌든 예전에는 이세연 뛰어넘는 게 꿈이었다고.
-꿈도 크다.
사실 케인은 판온 1때 태현의 팬이기도 했다.
천만다행으로, 그건 말하지 않았다.
말했다면 태현에게 1년간 놀림거리 확정!
이세연은 이다비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 본 적 있었나요?”
“하, 하하, 우리 본 적 없어요. 정말 없어요.”
이다비는 시선을 피하며 뻘뻘 땀을 흘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번 사디크 화염 퀘스트 때 멀리서 얼굴은 본 적 있었다.
그러나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목표인 이다비에게 이세연의 관심은 부담스러울 뿐!
태현과 이세연이 적대 관계인 이상, 잘못 보였다가는 이다비는 그냥 날아갈 수가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뿌리 깊은 대형 명문 길드 파워 워리어 길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파워 워리어?”
이세연도 파워 워리어의 길드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상한 놈들의 총집합!
이상한 걸로 유명한 길드!
“파워 워리어 우습게 보지 마라. 걔네들한테 당한 애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태현의 말에 이다비는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세연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누구하고 어울리든 그건 네 자유지. 그렇지만 좀 신기하네. 판온 1때는…….”
“어허! 어허허!”
“……아하. 그렇구나?”
이세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눈치챈 것이다.
태현이 이다비와 케인에게 판온 1 때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냥 더 아름다운 미소로 보였겠지만, 태현에게는 아니었다.
사악한 미소 그 자체!
“우리 다른 곳에 가서 잠시 이야기할까? 그게 너한테도 좋지?”
“쯧. 좋아. 그러자고.”
“!!!”
케인은 놀라서 태현을 쳐다보았다.
그 태현이 남의 말에 고분고분히 따르다니!
아무리 상대가 이세연이라지만!
저번에 만났을 때도 이세연이 한 ‘길드 들어올래?’ 한 제안을 거절하고 냅다 싸우지 않았는가!
‘미쳤나? 약점 잡혔나? 약점 잡혔으면 나한테도 알려줘!’
“너 뭔가 기분 나쁜 생각 하는 눈빛인데.”
“누, 누가.”
속마음을 들킨 케인은 말을 더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세연은 스르륵 다가와서 태현의 팔을 붙잡았다.
“자, 그러면 이야기하러 갈까?”
“저, 혹시 저놈 약점 있으시면 저한테도 공유 좀…….”
망설이다 꺼낸 케인의 말은 둘에게 닿지 않고 조용히 흩어졌다.
이다비는 그걸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안 돼요! 싫어요! 이러지 마세요!”
“저기, 나 방송 꺼놔서 그런 짓 해봤자 아무 타격도 없는데…….”
“젠장.”
태현은 연기를 멈췄다.
“여전하네.”
“왜 불렀어? 참고로 <잊혀진 망자의 왕관>은 못 준다.”
“와, 말하지도 않았는데 당당하고 뻔뻔한 거 봐. 화가 나려고 그러는데?”
“내 손에 들어왔으니까 내 거지.”
“그러면 지금 내가 너 잡고 있으니까 넌 내 거야? 응?”
이세연은 태현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어디서 낡은 개그를…….”
“누가 먼저 해놓고 그래?”
이세연은 어이없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원래 그녀는 이렇게 유치하게 말싸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태현만 상대하면 어쩐지 유치하게 싸우게 되는 이런 상황!
“잊혀진 망자의 왕관은 나중에 이야기 하자구. 지금 그거 때문에 온 거 아니니까.”
“?”
태현은 살짝 놀랐다.
잊혀진 망자의 왕관 때문에 온 게 아니었다고?
그게 아니라면 이세연이 이렇게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뭐지?’
태현은 이세연이 잊혀진 망자의 왕관을 찾아온 거라고 예상했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대비법도 미리 준비해 놓은 상태.
태현은 직업 특성상 죽어도 좋은 아이템은 거의 뿌리지 않았다.
<잊혀진 망자의 왕관>이 태현의 손에 들어간 이상, 이세연은 강제로 뺏을 방법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태현이 마음먹고 도망친다면 이세연이 태현을 잡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생존력만 따지면 서버에서 손꼽히는 태현!
남은 건 협박밖에 없었는데, 태현은 이세연이 협박한다면 잊혀진 망자의 왕관으로 맞협박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니.
“못 들었나 보네?”
“……뭘?”
“프리카 대륙 투기장 리그.”
“?”
투기장 리그야 태현도 당연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건 아는데.”
“아니, 내 말은 출전 이야기였어. 출전은 못 들었지?”
“……뭔 출전?”
태현은 말하면서 뭔가 점점 불길해지는 걸 느꼈다.
등 뒤에서 올라오는, 불길한 감각!
이세연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그녀와 태현을 번갈아 가리켰다.
너랑 나!
“……설마, 설마 아니지. 그게 말이…….”
“짜잔! 그런데 그게 정말로 일어났습니다!”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배장욱 PD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그런 짓을 할 리가…….”
태현은 멈칫했다.
저번에 배장욱이 태현에게 부탁 하나 해도 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설마, 설마?!
“아니,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정말 드물게 볼 수 있는 태현의 당황하는 모습!
그걸 본 이세연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즐거움이 샘솟는 걸 느꼈다.
너무 즐겁다!
더 즐기고 싶었지만,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이세연은 진실을 털어놓았다.
“물론 배장욱 PD가 억지로 출연시킬 사람은 아니지. 그러지도 못할 거고. 그래서 내가 직접 설득하려고 왔어. 안 그러면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거였나?”
태현은 일단 안도했다.
배장욱 PD가 모르는 사이 정말로 함정을 꾸민 줄 알았던 것이다.
이세연과 같이 팀으로 투기장 리그에 나가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