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307화
“…….”
갑자기 태현이 조용해졌다.
정말 드물게 급소를 찔린 것!
그 모습에 제카스는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역시 맞았군.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내가 잊을 것 같았냐! 그 싸우던 방식!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내 눈을 숨길 수 없지!”
판온 1 때에도 그랬다.
태현과 싸우던 제카스는 탐험가 특유의 스킬로 함정을 파서 태현을 유도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태현은 위험을 눈치채고 돌아서 버렸다.
그 모습에 제카스는 확신했다. 저런 플레이어는 둘이 있을 수 없었다.
판온 2의 김태현은 판온 1의 김태현과 동명이인이라고? 그건 완전히 헛소리였다.
그 둘은 분명 같은 사람이었다!
“사람 잘못 봤다니까.”
“헛소리하지 마라! 그런 거짓말이 통할 거 같냐!”
태현은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든 잘 달래서 넘어가 보려고 했는데, 상대방을 보니 그런 게 전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이미 백 퍼센트 확신한 상황!
‘뭐 어떻게 눈치를 챈 거야? 눈치도 좋네.’
한 번 싸운 걸로 태현을 떠올렸다는 게 신기했다.
물론 태현 입장에서는 제카스와의 싸움이 별거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제카스 입장에서, 태현과의 싸움은 몇 번이고 되새김질을 할 정도로 강렬한 기억이었다.
그 이후로 태현이 다른 랭커들과 싸우는 영상을 다 찾아서 볼 정도로, 기억 속에 깊숙이 각인된 싸움!
그 정도의 집념이 있었기에 오늘 싸움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크크…… 접은 줄 알고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아주 잘 됐어. 아주 잘 됐다고! 드디어 복수를 할 수 있게 됐구나!”
제카스는 신이 나서 외쳤다.
판온 1의 태현이 접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아쉬워한 사람 중 하나가 제카스였다.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러나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음…… 미안한데 네가 판온 1에서 누구였지?”
“……이 XXX—XXXX가!”
제카스는 울컥해서 욕설을 퍼부었다. 저 모습은 정말 기억을 못 해서 물어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빈틈!”
“?!”
콰콰쾅!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일격에 HP의 50% 이상이 깎여나갑니다. 출혈 상태에 빠집니다.]
“잠…….”
탐험가 직업은 HP가 그렇게 높지 않았다. 즉, 태현처럼 폭딜을 주무기로 삼는 플레이어 상대로 몇 대만 허용하면…….
퍽! 퍼퍼퍽! 퍽!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제카스는 그대로 넘어졌다.
‘끝났군.’
‘끝났다!’
서로가 이 싸움의 승패를 깨달았다. 제카스는 이를 악물며 태현을 노려보았다.
“여전하군! 그런 식으로 날 방심하게 만들다니!”
제카스는 태현의 말에 울컥한 것 때문에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
태현의 속임수에 또 넘어갔다고 생각한 제카스는 매섭게 태현을 노려보았다.
반드시 복수하리라!
“응? 아니, 너 기억 못 하는 건 진짜였어. 딱히 속임수는 아니었고…….”
“…….”
“그러게 방심을 하지 말았어야지. 나 그리고 진짜 김태현 아니야.”
“누가 믿을 거 같냐!”
“에이. 증거도 없잖아.”
“내 느낌이 증…….”
[HP가 0으로 내려가 사망합니다.]
[악명이 오릅니다.]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로그아웃 당하는 제카스!
태현은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긁적였다.
‘괜찮으려나?’
아무리 봐도 죽기 전 제카스의 표정이 신경 쓰였다.
태현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자기 믿는 대로 행동할 것 같은 모습!
‘으음…… 이 자식이 떠들고 다니면 골치 아파지는데…….’
현재 태현이 판온 1의 태현이 아니라는 거짓말은, 꽤나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서 있었다.
정체를 숨기고 있었어도 말이 나왔을 텐데, 태현은 판온 2의 한국 플레이어 중 손꼽힐 정도로 유명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한 수작들과 행운이 아니었다면 진작 들켰을 것이다.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인터넷에서 가짜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고, 또 태현이 ‘나는 판온 1 김태현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한 게 나름 효과가 있긴 했다.
일반인들은 ‘어? 판온 1에서 그렇게 유명한 플레이어였다면 굳이 자기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잖아? 판온 2의 김태현은 진짜 판온 1의 김태현이 아닌가 보네’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태현이 쌓은 수많은 원한 관계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순진한 발상!
태현도 적당히 원한을 쌓았으면 이렇게 정체를 숨기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태현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원한을 쌓아서 그렇지!
‘과거 일을 후회해 봤자 늦었고, 제카스 저놈 해외에서 유명한 놈 같던데. 젠장. 그냥 기도할 수밖에 없나?’
다행히 제카스는 증거가 없었다.
위험한 건 제카스의 명성!
랭커에다가, 유명 플레이어로 개인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도 많았다.
그런 제카스가 ‘저놈 김태현이다! 저놈 김태현이다!’이러면 아무리 증거가 없어도 사람들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건 누가 끝까지 우기냐의 싸움!
‘아, 진짜…… 별 같잖은 놈이 걸려 가지고…….’
고민하던 사이, 에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이겼군, 모험가여.
“하하, 에슬라 님. 저놈보다 제가 더 에슬라 님을 존경하고 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겁니다. 세상은 원래…….”
-……아키서스의 화신인가?
“?!?!?!”
태현은 깜짝 놀랐다.
방금 저 악마가 뭐라고 한 거지?
-신성한 기운이 느껴지니 분명 어느 신과 관련된 모험가겠지.
“저는 사실 사디크 신을 모시는 사람인…….”
-아니, 사디크의 기운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너무 미약해. 아키서스의 힘이 확실하군.
“……아키서스가 저한테 저주를 건 겁니다! 그래서 느껴지는 겁니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기운이 정돈되어 있군. 아키서스의 저주는 신들의 저주 중에서 가장 악랄하고 짜증 나는 저주일 텐데.
[화술로 에슬라를 속이는 데 실패합니다.]
“…….”
태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포기했다.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못 속이는 놈도 있는 거겠지.”
-크하하, 인정하는 건가?
“그래. 아키서스의 화신이면 뭐 그쪽이 어쩌겠어. 그렇게 묶여 있는데.”
-맞는 말이다, 모험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설마 아키서스의 화신이라고 보상을 안 준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내가 왜 그러겠나?
“악마들은 아키서스 이름만 들으면 경련을 하더라고.”
-아, 그럴 법도 하지. 아키서스 때문에 영원히 마계에 갇히게 되었으니…….
“…….”
아키서스와 관련된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고른 것 같은 직업!
-그렇게 아키서스를 싫어해도 이상할 것 없지.
“그쪽은 악마 아닌가?”
-나는 아키서스에 별 감정 없지. 이미 그 전부터 여기에 갇혀 있었으니까.
“그건 좀 다행인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현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내가 아키서스의 화신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저 모험가를 상대할 때 보여준 스킬들은 권능이었지. 그걸로 화신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아키서스는 어떻게 안 건데?”
-아, 그건 혓바닥을 교묘하게 놀리고 성격이 교활해 보이길래 찍어서 맞춰봤네.
“내가? 성격이 교활해?”
-아닌가?
“허, 참. 나만큼 성격 좋고 진실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악마라고 말 함부로 해도 되나? 응?”
-내가 여기 묶여 있지만 눈까지 가려진 건 아닌데…….
“됐고 보상이나 내놔. 역병 저주 내놓으라고.”
-이렇게 봉인된 내 정체가 궁금하지는 않나?
“별로 안 궁금해. 악마가 악마짓 하다가 잡혔겠지. 보상 내놔.”
-사실 내가 이렇게 된 데에는 긴 이유가 있지.
“안 궁금하다니까. 야. 안 들리냐?”
아키서스의 화신인 걸 들킨 태현은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봉인되었다지만, 풀리면 단번에 태현을 죽일 수도 있는 몬스터한테 이놈 저놈 하는 배짱!
-내가 아무리 인간들의 세상이라지만, 드워프들에게 붙잡힌 데에는 배신 영향이 컸지.
“보상 내놓으라고. 나 지금 그렇게 시간이 많은 편이 아닌데.”
서로 자기 할 소리만 하는 둘!
-믿었던 악마 놈들이 나를 배신하고 드워프들에게 팔아넘길 줄이야.
“악마를 믿으니까 그렇지. 나처럼 악마를 의심하면서 살지 그랬냐. 그건 그렇고, 보상은 언제 줄 거야?”
-그래. 그렇지.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모험가 너 같은 인재를.
“아니, 보상 내놓으라고!”
[칭호:악마를 속인 자를 갖고 있습니다.]
[칭호:악마의 혓바닥을 갖고 있습니다.]
[퀘스트 획득 조건을 모두 만족하고 있습니다. 퀘스트가 강제로 발동됩니다.]
<에슬라의 봉인 해제>
고대 드워프의 미궁에 봉인된 악마 에슬라는 봉인에서 풀려나 그를 봉인한 악마들에게 복수하고 싶어 한다.
에슬라의 봉인을 풀어낸다면 그에게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아낼 수 있을 테지만, 그게 대륙의 알려질 경우 모든 사람이 당신을 욕할 것이다.
보상:?, ??, ?????, ?????, 알려질 경우 대륙 모든 교단과의 관계도가 대하락.
“…….”
달라는 보상은 안 주고 이상한 퀘스트만 주는 에슬라!
-아, 그리고 자격이 되니 굳이 시험할 필요는 없겠지. 여기 역병 저주가 담긴 병이 있네.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마치 덤으로 주듯이 건네주는 보상!
“…….”
태현이 입을 다물고 빤히 쳐다보았지만 에슬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태현이 악마처럼 뻔뻔하다고는 하지만, 에슬라는 악마 그 자체!
-그러면 너를 믿도록 하지, 모험가.
“그래. 그래. 열심히 믿어.”
건성으로 대답하는 태현!
태현은 에슬라를 꺼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전혀 아쉬운 게 없는데 뭐하러 위험 부담을 잔뜩 안고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꺼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의욕이 좀 생기게 해주지.
“왜. 골드라도 주게?”
-아니. 보아하니 에다오르도 그렇고, 다른 악마들의 원한을 좀 산 것 같은데. 안 그런가?
“…….”
아픈 곳을 찔린 태현이었다.
-설마 악마들을 속였다고 안심하고 있지는 않겠지. 한 번이야 통하겠지만 속았다는 걸 깨닫는다면 악마들은 금방 네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에다오르 정도 되는 악마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그런 악마들이 너를 죽이려고 덤벼들면 과연 네가 무사할까?
정신이 확 드는 충고!
돌아서서 나가려던 태현은 멈칫했다.
-그런 악마들을 상대하려면 절대로 혼자서는 무리일 텐데. 인간들 사이에서는 이런 속담이 있지 않나? 적의 적은 친구라고?
‘이 자식이…….’
아픈 곳을 정확하게 찔러 들어오는 에슬라!
-다른 교단들하고 힘을 합친다고 해도…… 아, 아키서스 교단은 다른 교단들하고 사이가 안 좋지?
결정타!
태현은 멈춰 서서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에슬라에게 손을 뻗었다.
“하하, 에슬라. 그러고 보니 묻는 걸 까먹었는데, 봉인은 어떻게 풀어주면 되지?”
-크하하. 바로 그거야. 모험가!
서로 손을 잡는 두 악마!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악마 하나와 신의 화신이었다.
* * *
“언제 나오려나…….”
이세연은 하품을 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주변에 있는 살벌한 언데드 군단은 주인을 따라 축 늘어져 있었다.
황야에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는 언데드 군단들!
누가 보면 기겁을 할 괴상한 모습이었다.
‘김태현이 들어간 던전의 출구는 여기밖에 없는데? 설마 다른 곳으로 간 건 아니겠지?’
보통 이세연은 스스로가 내린 판단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를 믿을 수 있으려면 자신감이 있어야 했고, 이세연은 그게 충분했다.
그러나 태현과 관련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아무리 100% 확신을 했어도 언제나 예상을 뚫고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태현!
판온 1 때도 그랬다.
‘아니야. 분명 여기로 나올 거야.’
덜컥-
그 순간, 던전의 출구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