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303화
태현은 씩 웃었다. 이렇게 주제를 아는 사람은 싫어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관대한 마음으로 봐주거나 그러는 건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대가가 필요한 법!
“할 거 다 해놓고 항복이라고?”
“저희는 한 대도 안 쳤습니다!”
“공격도 쟤네들이 했습니다!”
“너희들이 친구잖아. 친구가 한 일은 너희들도 책임이 있는 거 아닌가?”
“친구 아닙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여기서 처음 본 놈들입니다! 그냥 오늘 만난 놈들입니다!”
훈훈하게 서로 책임을 미루는 모습! 그걸 본 태현은 케인에게 말했다.
“저거 보니까 네 친구들 생각난다.”
“……?”
“레드존 길드원들.”
“…….”
케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태현은 바위 위에 털썩 앉았다. 그 모습에 김병국과 최은철의 자세가 자연스럽게 낮춰졌다.
어디서 삥 좀 많이 뜯어본 것 같은 모습!
뒤에 있던 태현의 파티원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아직도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래, 살려줄 수 있지.”
태현은 말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
“뭡니까?”
“뭐냐니. 기브 앤 테이크 몰라? 내가 너희를 살려줬으면 너희도 뭔가를 줘야 할 거 아니야!”
“…….”
너무 당당하게 내놓으라는 태현의 선언에, 뒤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태현의 이미지는 저런 게 아니었던 것!
‘어라? 김태현은 저기서 훈계를 하고 저 사람들을 반성시키는 사람 아니었나?’
‘저기 옆에 있는 케인도 그렇다고 들었는데……?’
누가 보면 태현이 악역이고 무릎 꿇은 두 플레이어가 선한 역인 줄 알 것이다.
“어, 가진 골드라면…….”
“골드는 나도 있어 이 자식아. 너 영지 있냐? 영지 있냐고. 난 영지도 있거든?”
두 플레이어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P, PVP 아이템이 있는데…….”
“너희들이 갖고 있는 아이템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을 거 같은데. 그리고 그건 죽이면 나오잖아.”
둘의 얼굴색이 더 창백해졌다. 더 이상 말하지 못하자, 태현은 칼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없냐? 진짜 없어? 10초 줄 테니까 생각해 봐라. 10, 9, 2, 1…….”
“10초라면서!”
“원래 사람은 급해야 머리가 더 잘 돌아가는 법이야. 시간은 정직하게 기다려주지 않는 법이고. 없냐? 그러면 잘 가라!”
궁지에 몰린 머리는 때때로 원래 이상의 성능을 발휘했다.
지금이 바로 그때!
김병국이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있, 있습니다!”
“뭔데?”
“퀘스트! 지금 태현 님께서 역병 저주를 깨러 온 거 아닙니까!”
“그래. 잘 맞췄네.”
“지금 그 퀘스트에 관한 아주 고급 정보가 있습니다!”
“네가?”
태현의 눈빛은 ‘너같이 대기 타면서 PVP나 하는 놈이 퀘스트 정보가 있다고?’라고 말하고 있었다.
김병국은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고급 정보 맞습니다! 제카스가 진행하고 있는 퀘스트입니다!”
“제카스? 제카스가 누구지?”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원래 필요 없는 플레이어들의 이름은 잘 기억하고 다니지 않는 태현이었다.
그래서 판온 1 때도 쓰러뜨린 랭커들 이름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제카스면 유명한 탐험가 플레이어잖아. 랭커고.”
“그래?”
퀘스트를 깰 때, 탐험가란 직업만큼 믿음직스러운 것도 없었다.
밝혀지지 않은 곳에 가고, 밝혀지지 않은 퀘스트를 깨면서 성장하는 직업!
“저번에 사디크의 화염 퀘스트에도 참가했다고 들었어요.”
“사디크의 화염은 내가 다 깼는데. 그거 믿을만한 놈 맞아?”
태현은 갑자기 제카스가 못 미더워졌다.
사실 태현 때문에 제카스가 헛발질하게 된 거지만, 태현이 그걸 알 리 없었다.
일단 마저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태현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제카스고 박카스고…… 어쨌든 그놈 퀘스트 정보는 어떻게 아는데?”
“음, 그러니까, 그게…….”
“말하는데 5초 이상 고민하면 사기 치는 걸로 간주한다. 5, 1, 땡!”
“아, 아닙니다! 그게! 여기 주변에 퀘스트 깨러 오는 플레이어들이 많아서, 좀 만만한 놈들 찾아보려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아. 그런 거였군.”
척이면 척이라고, 태현은 김병국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전형적인 PVP 플레이어의 수법 중 하나!
인기 있는 퀘스트가 뜨면 그 주변에 가서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린다.
먹잇감을 물색하는 것이다.
쓰러뜨릴 수 있고, 쓰러뜨렸을 때 좋은 장비를 떨어뜨릴 것 같은 플레이어를.
두 플레이어가 그렇게 기다리다가 제카스 파티를 발견한 게 분명했다.
“그래서 제카스 뒤를 쫓아갔나?”
“어, 네? 어떻게 아셨…….”
“제카스 뒤를 쫓다가 잡기에는 무리 같아서 그냥 빠진 거겠지?”
“???”
김병국은 귀신에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직 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맞춰버리다니.
“네, 네…… 멀리서 보다가 빠졌습니다. 제카스 파티가 되게 신중하게 들어간 걸 보니까 퀘스트를 꽤 많이 깬 게 분명합니다. 들어갈 때 입구도 숨기고 자기들이 온 것도 숨겼습니다.”
제카스 정도 되는 플레이어는 퀘스트를 깰 때 흔적을 남기지 않게 조심했다.
워낙 관심을 많이 받으니, 다른 플레이어들이 몰래 따라와서 퀘스트를 방해하거나 낚아채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두 플레이어가 던전에 들어가는 제카스 파티를 본 건 정말 우연의 일치!
“아쉽네요. 다른 파티가 먼저 들어갔다니.”
뒤에서 김병국의 말을 듣던 파티장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태현과 이다비, 케인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
“뭐라는 거지?”
“왜 아쉽다는 거예요?”
동시에 터져 나오는 세 명의 반응!
그 반응에 파티장은 당황해서 대답했다.
“네? 아니, 그 던전에 다른 파티가 먼저 들어갔으니까 우리는 못 들어가는 거 아닙니까.”
“그런 고정관념에 얽매이면 안 돼.”
“예?”
“남이 퀘스트를 깨려고 먼저 던전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왜 우리가 못 들어가지? 들어가면 되잖아.”
“그, 그건 비매너 아닌가요?”
“뭔 비매너는 비매너야. 던전 전세 냈냐?”
“우연히 겹친 게 아니라 대놓고 알고 따라간 건데…….”
“억울하면 그쪽도 대놓고 따라가라 그래.”
얼굴에 철판 몇 겹은 깐 것 같은 태현의 반응에, 파티장은 더욱 당황했다.
‘김태현이 이런 사람이 아닌데?’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의 파티에 태현이 들어와 있다는 것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잊어버린 그였다.
* * *
“김태현 맞지? 진짜 김태현이다!”
“여기 와있다는 게 사실이었어!”
태현이 던전 안에서 싸운 사실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로그아웃 당한 플레이어들이 정보를 풀어버린 것이다.
덕분에 주변에 있던, 퀘스트를 깨기 위해 모여 있던 다른 플레이어들은 구경을 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온 상태였다.
퀘스트를 깨는 건 어려우니 보기 힘든 유명한 플레이어나 구경하자!
그게 이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의 마음가짐이었다.
“잠깐, 저거 아까 우리 파티에 들어오겠다고 한 사람인데? 저게 김태현이라고?”
“김태현은 외모 바꿀 수 있는 스킬 있나 보더라. 저기 들고 있는 장비랑 데리고 다니는 펫 보라고. 김태현 맞아.”
“말도 안 돼! 레벨 100도 안 되는 게 김태현 맞아? 거짓말 아냐?”
그리고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 중에는, 아까 태현이 들어가려고 했던 파티의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태현이 정체를 밝히고 들어가겠다고 했으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OK를 했을 플레이어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나오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사칭 아냐?”
“맞아. 사칭일 수도 있잖아.”
“사칭인 놈이 어떻게 혼자서 PK 플레이어들을 썰어 버리겠냐? 진짜 김태현 맞아. 너희는 김태현한테 시험당한 거야.”
“시…… 험?”
“김태현이 아무 파티나 들어가겠냐. 들어가더라도 다 생각을 하고 따져보고 들어가겠지. 레벨 가리고 깐깐하게 구는 파티는 자기하고 같이 파티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게 분명해. 김태현이잖아.”
“그런…… 깊은 뜻이…….”
“…….”
멀리서도 크게 들리는 플레이어들의 목소리. 태현은 그걸 듣고 움찔했다.
그냥 레벨 제한에 걸려서 아무 말 없이 물러난 거였는데…….
옆에서 이다비가 물었다.
“정말 저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야, 조용히 해.”
* * *
사람들을 따돌리고, 태현 일행은 김병국과 최은철의 안내를 따라 던전의 입구에 도착했다.
물론 다른 던전처럼 입구가 보이는 던전이 아니었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황야와 절벽!
‘입구를 숨기고 들어갔군.’
경험 많은 플레이어들은 당연히 하는 일이었다. 태현도 했을 것이고.
자기가 혼자 찾은 던전에 누군가 공짜로 들어오는 건 아까운 일이었으니까.
-신의 예지.
휙-
스킬은 절벽을 향해 일직선으로 길을 만들었다.
‘응?’
다른 곳도 아니라 그냥 절벽을 향해 나 있는 길.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태현은 오랜만에 고대의 망치를 꺼내 들었다. 그걸 본 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뭐하냐?”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망치를 꺼내는 모습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콰콰콰콰콰콰콰쾅!
“…….”
자리에 있던 파티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김병국과 최은철도 마찬가지였다.
일격에 두꺼운 절벽의 암석을 부숴버리는 강력함!
‘저거 대체 힘 스탯이 몇이야?!’
‘뭔 직업인데 저 정도 데미지가 나오는데?!’
고대의 망치가 가진 비밀을 모르는 플레이어들은 당연히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아, 여기 길 있군.”
절벽의 아래쪽이 부서져 나가자, 그 안쪽에 숨겨진 던전의 입구가 드러났다.
“저희는 이제 가도 됩니까?”
태현은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그걸 본 김병국은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으려고 했다.
탁-
“어…… 악수하자는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 아까 말한 PVP 장비랑 골드 내놓으라고.”
“…….”
* * *
[잊혀진 기계골렘의 미궁에 입장하셨습니다. 당분간 로그아웃이 제한됩니다. 로그아웃 시 던전에서 강제로 퇴장당하며,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먼저 지나간 게 확실하군.”
강철로 된 통로 위에 깔려진 아이템들이 보였다. 먼저 지나간 파티가 줍지도 않고 간 것 같았다.
던전의 몬스터들을 쓰러뜨렸지만 잡템은 주울 필요도 없다!
고렙 플레이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저, 저런…… 이런 걸 버리고 가다니! 아주 못된 사람들이네요!”
이다비는 드물게 화를 내며 잡템을 주우려고 들었다. 그러나 태현은 이다비의 팔을 붙잡았다.
“……?”
“잠깐만. 아이템 좀 보자.”
“태, 태현 님은 골드도 많이 벌면서 이런 잡템까지…….”
“……아니거든? 물론 나도 잡템을 많이 모으는 편이긴 한데.”
혼자 재료를 모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다른 플레이어들이 안 모으는 재료도 그득그득 가방에 넣고 다닐 때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보려고 한 건 그래서가 아니었다.
기계 골렘의 부서진 왼쪽 팔:
기계 골렘을 이루고 있던 부품 중 하나. 정교하게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부서진 상태다.
‘역시. 맞게 왔다.’
태현은 제대로 던전을 찾아왔다는 걸 직감했다.
가브리엘이 말한 기계 골렘. 그런 몬스터들이 나오는 던전이 흔할 리 없었다.
‘사루온한테 보상받으려면 일단 역병 저주의 정체를 갖고 가기만 하면 되긴 하는데. 먼저 간 놈들하고 나누자고 해봤자 안 통하겠지?’
태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연히 말로는 안 되고, 지금 필요한 건 실력 행사였다.
“바로 따라가야겠지만…… 일단 한 번 시도는 해봐야겠지.”
“……?”
태현이 또 자리를 잡고 망치를 꺼내자, 케인은 ‘이 자식이 뭔 이상한 짓을 하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뭐하냐?”
“기계골렘 다시 조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