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87화
당연히 저 시종이 당황할 법도 했다.
지금 국왕 앞에서 요리사들이 심혈을 기울인 요리를 먹고 심사를 해야 하는데, 길가에 놓인 요리들을 먹겠다고 말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태현은 멈추지 않았다.
[바짝 구운 새고기 요리를 먹었습니다. 지구력이 영구적으로 1 오릅니다.]
[심해의 물고기 회 요리를 먹었습니다. 요리 스킬이 오릅니다.]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알짜배기만 골라 먹는 눈!
시종은 앞에서 달려가면서 깜짝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면서 잽싸게 집어먹을 수 있는 거지?
주변 플레이어들도 놀란 눈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이건 단순히 민첩이 높아서 빨리 먹는 게 아니었다.
움직임 자체는 그렇게 빠르지 않은데, 누군가가 집으려고 하는 요리를 알아챈 다음 최단거리로 먼저 집어버리는 괴물 같은 솜씨!
마치 마술 같은 움직임이었다.
“저, 저거 뭐하는 놈이야?”
* * *
“아, 잘 먹었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종은 무시하고, 태현은 옷깃을 매만졌다.
귀족이 입고 있던 옷답게 제법 폼이 났다.
“테란드 남작, 오랜만이군.”
“……?”
대로 끝 광장에 도착하자, 뚱뚱한 귀족 한 명이 태현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할 줄 알았지. 에랑스 왕국의 보석 같은 혀로 유명한 네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을 리 없으니까 말이야.”
“어…… 음…… 그래! 나도 너를 여기서 만나서 반갑다!”
“???”
귀족은 태현의 말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뭐냐? 무슨 생각이냐? 그렇게 말하면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냐?”
“아니, 그냥 인사한 건데…….”
“됐다! 무례한 놈! 오늘 누가 진정한 미식가인지 국왕 폐하 앞에서 보여줄 생각이니 단단히 각오하도록!”
원래 사이가 안 좋았는지, 태현이 기껏 친절하게 말해줬는데도 귀족은 화를 내며 가버렸다.
‘그런데 요리사들이야 승부를 한다고 쳐도 미식가들은 어떻게 승부를 하지?’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리야 먹고 평가를 하면 된다지만, 누가 진정한 미식가인지는 어떻게 구분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곧 알 수 있었다.
* * *
“국왕 폐하 납시오!”
광장에 앉아 있던 귀족들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저 멀리 높은 계단에서 풍채 좋은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오늘…… 이 좋은 자리에…… 와준…….”
“……뭐 이리 느리게 말해?”
“이놈! 테란드 남작! 국왕 폐하의 말이 지겹기라도 한 것이냐!”
태현의 옆좌석에 앉은 뚱뚱한 귀족은 아까의 원한을 풀겠다는 듯이 속삭여댔다.
그러나 그 귀족은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었다.
이런 진흙탕 싸움이야말로 태현의 주무대!
“예? 국왕 폐하의 말이 지겹다고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
“???”
갑자기 쏟아지는 시선!
태현에게 속삭인 귀족은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태현은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매우 미안한 목소리로 다시 말하는 태현!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 없게 크게 말해서…….”
“그, 그게 아니라…… 이놈 테란드 남작! 어디서 모함을!”
[고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귀족을 상대로 말싸움에서 승리합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악명이 오릅니다.]
고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는 태현을 상대로 말로 승부를 건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저 멀리 에랑스 국왕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내 말이 지루했나 보군.”
“아, 아닙니다!”
상대 귀족은 사색이 되어 손을 저었다. 그러나 태현은 멈추지 않았다.
넙죽 고개를 숙이는 태현!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눈치 없게 크게 말해버리는 바람에 이 자리의 분위기를 해쳤습니다!”
“괜찮네, 테란드 남작. 지루할 수도 있지. 조금 더 빠르게 말하도록 하겠네. 같은 동료 귀족을 감싸주려는 그 갸륵한 마음은 내가 기억해 두도록 하지.”
[왕궁 내 테란드 남작의 평판이 오릅니다.]
[변장한 상태기 때문에 당신의 평판은 오르지 않습니다.]
“크으읏……!”
죽일 듯이 노려보는 뚱뚱한 귀족! 그러나 태현은 귀를 파며 딴청을 부릴 뿐이었다.
“테란드 남작,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응? 국왕 폐하를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아, 아니! 내가 언제!”
뚱뚱한 귀족은 재빨리 입을 다물어버렸다.
더 이상 말을 걸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피해를 입을 것 같았던 것이다.
* * *
한바탕 다툼이 끝나고, 국왕의 느릿느릿한 연설이 끝나자,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이 자리에 그대들을 부른 이유는, 오늘 내가 모은 요리사들을 시험해보기 위해서네.”
<진정한 요리사를 찾아라–귀족 미식가 퀘스트>
풍요로운 에랑스 왕국은 대대적으로 요리사들을 불러서 축제를 벌인다.
특히 이번 에랑스 국왕은 맛있는 요리에 관심이 많은 왕.
그는 왕궁으로 불러모은 요리사들을 시험해 보려고 한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왕국의 미식가로 이름 높은 사람들이다.
요리사들의 요리를 맛보고, 어떤 요리사가 가장 뛰어난 요리사인지를 맞춰라.
그 평가가 제대로 되었을 경우 국왕이 매우 만족하리라.
보상:?, ???, 국왕이 손수 만든 미식가 메달.
‘……저건 쓰레기 아닌가?’
<국왕이 손수 만든 미식가 메달>이라니. 아무리 봐도 별로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태현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퀘스트가 뭔지는 대충 알았다.
국왕이 데리고 있는 요리사들의 요리를 먹고, 어떤 요리사가 좋은지 알아맞히면 되는 것 아닌가.
태현에게는 쉬운 퀘스트였다.
‘아니…… 아닐 수도 있겠군.’
생각해보니 여기 올 정도의 요리사라면 기본적으로 요리 스킬이 높을 것이다.
중급은 기본이고 고급 정도도 가능.
그러면 만들어져서 나오는 요리 차이는 재료나, 다른 추가 스킬 정도.
그렇다면?
‘요리도 요리지만 왕의 눈치를 봐야하는 퀘스트군!’
태현은 깨달았다. 이건 요리보다는 왕의 눈치를 봐야 하는 퀘스트였다.
국왕이 심사를 할 테니, 당연히 국왕이 좋아하는 요리를 좋다고 칭찬을 해줘야 고평가를 받을 것이다.
둥둥둥-
북소리와 함께 뒤에서 요리사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다 제각각 다른 생김새였지만,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
‘어? 두 명 빼고 나머지는 다 플레이어잖아?’
태현은 순간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여기 플레이어들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요리사 플레이어들에게 이런 왕궁으로 들어가 국왕의 요리사가 되는 건 엄청난 기회였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퀘스트를 깨서 간신히 공적치 포인트를 모을 때, 국왕의 요리사로 들어간 요리사 플레이어는 손쉽게 공적치 포인트를 모을 수 있었다.
판온에서 강해지는 방법은 다양했으니까.
“……!”
요리사들이 점점 가까워지자, 태현은 요리사 플레이어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태현이 본 적 있는 사람들이었다.
* * *
“파즈, 용케 여기까지 왔군. 도중에 떨어질 줄 알았는데.”
“흥. 너 같은 놈의 비겁한 수단에는 더 이상 당하지 않는다.”
파즈.
그는 판온의 유명 요리사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대형 길드 하나와 계약을 맺고 지원을 받으며 돌아다니는 요리사 플레이어!
현실에서도 유명 셰프인 걸로 화제가 된 적 있는 플레이어였다.
이번 요리 대회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
그걸 알고 있었기에 다른 플레이어들도 견제의 시선이 가득했다.
“비겁한 수단이라니. 그 정도 견제를 극복 못 하면 여기 올 자격이 없지. 안 그래?”
“더 이상 너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차오.”
그랬다. 태현이 얼굴을 알아본 플레이어 중 한 명, 차오.
<레스토랑>길드의 길마!
도시의 요리 재료를 전부 사버리는 견제 방법으로 태현과 악연을 맺었고, 그다음에는 에다오르의 투기장에서 만났다.
요리에 독을 풀어서 팔려다가 오히려 태현에게 역공을 당한 그들!
‘이크.’
태현은 멈칫했다. 차오는 당연히 태현에게 이를 갈고 있었던 것이다.
대형 길드 연합에 들어가서 ‘뭐든 고용해서 김태현 죽이죠!’를 외치고 있는 길드 중 하나가 바로 <레스토랑> 길드였다.
물론 차오는 태현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무리였다.
설마 미식가 NPC 중 한 명이 납치당해서 플레이어로 바꿔치기 당했다는 걸 누가 예상했겠는가!
‘심지어 나도 예상 못 했지!’
태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요리사 플레이어들을 훑어보았다.
서로 노려보면서 의욕을 불태우는 파즈와 차오, 그리고 다른 요리사 플레이어 몇몇. 마지막으로…….
“후후. 그래도 신경 쓸 수밖에 없을걸. 우리 둘 중 한 명이 여기서 이길 테니까.”
“……아니, 그건 아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기 있는 놈들은 다 떨거지잖아.”
차오의 말에 다른 요리사 플레이어들은 발끈했다.
물론 그들은 스킬이나 명성, 세력 모두 차오나 파즈한테 밀리기는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실력!
이렇게 무시당하고서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파즈는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저 요리사 플레이어, 저번 퀘스트에서 봤는데 실력이 대단하더군. 그렇게 쉽게 방심할 수는 없을걸.”
“뭐? 무슨 저런 듣보잡을…….”
“계속 방심하려면 마음대로 해라. 난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그리고 파즈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사람은…….
주현영이었다.
‘……넌 왜 또 거기 있냐?’
* * *
생각해 보니, 저번에 주현영을 만났을 때 말한 게 있었다.
에랑스 왕국에서 국왕 요리사 퀘스트를 깨고 있다고.
설마 이게 이렇게 연결될 줄은 몰랐지!
‘어떻게 해야 좋을까…….’
태현이 머리를 굴리는 동안, 요리사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주현영에게 향했다.
차오와 파즈, 이 두 사람이 가장 위협적인 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새로 나타난 것이다.
차오와 달리 파즈는 더러운 수법이나 가볍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주현영의 실력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
‘뭐하는 플레이어야?’
‘아는 사람? 본 적 없는데.’
‘나도 본 적 없어. 길드도 없는 거 같은데.’
보통 그렇게 시선이 쏟아지면 당황하거나 좀 주눅이 들어야 하는데, 주현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올곧은 시선으로 앞만 바라볼 뿐!
역시 태현이 ‘눈부셔!’라고 평가했던 사람!
주현영은 외유내강 그 자체였다.
-티 내지 말고 들어.
“……!”
주현영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갑자기 태현의 귓속말이 날아온 것이다.
-지금 네 앞에서 두 번째에 있는 귀족 있지?
-네? 네.
-그게 나야.
-…….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주현영이었지만, 오랜만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태현을 향해!
-대체 어쩌시다가……?
-과거는 됐고, 지금 일에 집중하자고. 지금 보니까 요리사들 대회 같은데. 맞아?
-네. 맞아요.
-저기 있는 놈은 그…… 이름이 뭐였지? 어쨌든 더티하게 노는 놈이고.
-차오예요.
그렇게 많이 뜯어내 놓고 이름도 기억 못 하는 태현!
차오가 들었다면 욕이 나왔을 소리였다.
-네가 명백하게 불리한 상황이잖아. 내가 도와줄게.
현재 태현이 앉아 있는 자리는 평가위원의 자리!
이것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강점이었다.
태현은 설마 이런 제안을 거절할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태현의 기준에서 이런 건 당연히 해야 할 방법!
그러나 주현영은 아니었다.
-네? 아뇨. 괜찮아요. 저 혼자서 해볼게요.
-…….
‘얘 성격을 까먹고 있었군…….’
태현은 그제야 주현영의 성격을 다시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