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84화
“신기하네요?”
“뭐가?”
“저는 태현 님이 아이템을 써서 설득할 줄 알았어요.”
“나야 고급 화술 스킬이 있으니까 굳이 아이템을 쓸 필요도 없지.”
“?!”
이다비는 깜짝 놀랐다.
아니, 무슨 상인 직업보다 화술 스킬 레벨이 높아!?
“화술 스킬 레벨이 왜 그렇게 높아요?!”
“글쎄…… 그냥 NPC들 좀 속이다 보니까 이렇게 되더라고. 나도 이해가 안 간다.”
“아, 전 이해가 되네요.”
태현 말고는 모두가 이해 가능한 스킬 성장 속도!
“잠깐, 근데 아이템을 써서 설득한다는 게 무슨 소리지? 내가 그런 아이템이 있나?”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다비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기사들을 설득할 수 있는 아이템이 있었나?
“네? 저번에 받은 거 있잖아요. 그거 쓰실 줄 알았는데.”
“……?”
“그 에다오르의 투기장에서 우승했을 때, 에다오르한테 총독의 부관 자리를 상징하는 검 받으셨잖아요. 그거 있으면 기사들 설득하기는 쉬우니까…….”
“……그런 건 진작 말해!”
태현은 이다비를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죄, 죄송해요?!”
“아니…… 이건 내 실수야. 잊고 있었어.”
그랬었다.
총독으로 변신한 에다오르는 투기장에서 우승한 태현한테 일단 보상으로 아이템을 줬던 것이다.
그중 하나가 <총독의 부관 자리를 상징하는 검>!
이런 아이템 하나만 있어도 NPC를 설득하는 게 매우 쉬워졌다.
태현처럼 고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는 플레이어가 쓴다면?
대형 사기도 가능!
“아…… 받은 걸 잊고 있었네. 너무 정신이 없어가지고.”
태현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고 지금 이걸 쓰겠다고 에스파 왕국으로 돌아가는 건 계산이 맞지 않았다.
에랑스 왕국에서 보상을 챙기고, 기계공학 비전 스킬 퀘스트도 찾아야 했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그런데 다른 교단 NPC들은 제대로 돌아갔을까요?”
“레벨 높은 NPC들이니까 알아서 잘 갔겠지.”
태현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공적치 포인트는 이미 받았기 때문에, 길가에서 죽든 말든 태현의 알 바가 아니었던 것!
* * *
“헉, 허억…… 위대한 타이란 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시다니…….”
“시끄럽고 뛰세요!”
정수혁은 앞장서서 달렸다.
오크들은 잠잠해졌어도 여전히 온갖 몬스터들이 돌아다니는 우르크 지역!
거기에 갑자기 떨어진 교단 NPC들은 좋은 먹잇감들이었다.
대륙의 각 교단들을 싫어하는 적들은 우르크 지역에 많았던 것!
“아니, 왜 갑자기 나와서 이 고생을 시키냐?!”
나름 혼자서 꾸준히 여기 있는 부족들과 친밀도를 올리던 정수혁에게 이 교단 NPC들은 짐덩이에 가까웠다.
-저기 저 몬스터는 거대불꽃긴목공룡입니다. 저놈은 먼저 공격하지 않으니까, 그냥 내버려 두고 이쪽으로 돌아서 움직이면 됩니다. 절대 저 놈을 놀라게 해서는 안…….
-타이란 님을 위하여! 돌격!
-야타는 지지 않는다!
-아니, 이 XX들아!!
레벨은 다들 높아서 어떤 짓을 해도 쉽게 죽지는 않았지만, 따라다니는 정수혁은 미친 듯이 피곤해졌다.
무슨 몬스터만 보이면 신의 이름으로 돌격!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는 조용히 돌아다녀야 할 때도 있는 법인데, 이래서는 뭘 할 수가 없었다.
태현이야 쥐잡듯이 교단 NPC들을 잡았지만, 정수혁한테는 무리인 일이었다.
‘빨리 돌려보내야지…….’
정수혁은 고개를 저었다.
최대한 빨리 우르크 지역 바깥으로 가서 이들을 돌려보내는 게 그의 목표!
태현과 관련된 퀘스트가 아니었다면 벌써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뒤의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정수혁의 어깨를 토닥였다.
* * *
“이런 기분이었군.”
유 회장은 앉았다 일어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가상현실의 세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생동감 넘쳤다. 이건 그냥 현실이라고 해도 차이가 없었다.
“기술이 이 정도일 줄이야…… 역시 뭐든지 실제로 해봐야 알 수 있는 거였나.”
유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기술이라면 그의 손녀가 푹 빠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집 안에서 전 세계를, 아니, 그보다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저런…… 저분 왜 하필 여기서 시작하신 거지?”
“불쌍해라…….”
“……?”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유 회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있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살면서 ‘불쌍하다’란 소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그였다.
‘잘못 들은 거겠지.’
유 회장은 다시 자신의 캐릭터에 집중했다.
현실 그대로 들어오면 들킬까 봐, 종족도 일부러 엘프로 바꿨고, 이목구비도 적당히 만진 상태였다.
일부러 나이를 늙게, 어리게 만드는 플레이어들도 많았으니 이런 중년 엘프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
“좋아. 그러면 낚시를 하러 가볼까. 이보시오. 낚시는 어디서 할 수 있습니까?”
“……?”
사냥꾼 어거스트는 미친놈 보듯이 유 회장을 쳐다보았다.
타이럼 시는 산골에 위치한 도시!
그런데 새로 온 모험가 놈이 하라는 초보자 퀘스트는 안 하고 ‘낚시는 어디서 해요’라고 묻다니.
[사냥꾼 어거스트가 당신을 이상하게 여깁니다.]
[계속했다가는 도시에 당신의 소문이 퍼질 수 있습니다.]
“?!?!?!”
유 회장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어거스트를 쳐다보았다.
대체 왜!?
‘일, 일단은 물러나자.’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유 회장은 어거스트가 어이없어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를 챘다.
지금은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선 유 회장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플레이어처럼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말을 걸었다.
“저기, 여기 낚시는 어디 가서 할 수 있습니까?”
“네? 아저씨 낚시꾼 직업 얻으실 거에요?”
“그렇습니다만……?”
“그러면 여기서 시작하시면 안 되죠!! 적어도 바다, 바다는 아니어도 큰 강은 끼고 있는 곳에서 시작을 하셨어야죠! 게다가 왜 하필이면 여기서 시작을 하신 거예요?”
“맞아요! 하필이면 잘츠 왕국에서도 최악인 타이럼 시에서 시작을 하시다니.”
“……??”
유 회장은 순진하게도, 아직까지 태현한테 속은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재계의 황제로 있던 시간이 얼마였던가.
감히 그에게 장난을 치는 놈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
“……누가 나한테 여기서 하라고 추천했는데…….”
“아이고, 속으신 거예요!”
“맞아요. 예전부터 초보자들한테 타이럼 시에서 시작하라고 하는 낚시가 많았는데, 아직도 걸리시는 분이 있네!”
“……!”
그제야 유 회장은 깨달았다.
태현이 그를 낚았다는 것을!
‘이놈이?!’
화나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그를 상대로 이런 짓을 할 줄이야!
배짱 하나는 정말 타고난 놈이었다.
“누가 속인 건지는 몰라도 아는 사람이면 인연을 끊으세요. 아주 나쁜 놈이네.”
“맞아요. 보증 서달라는 친구랑 타이럼 시에서 시작하라고 하는 친구랑은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해요.”
두 플레이어는 타이럼 시에서 먼저 시작한 플레이어들이었다.
덕분에 쌓인 게 엄청나게 많았다.
타이럼 시를 욕할 기회만 주면 세 시간은 기본으로 욕할 수 있는 플레이어들!
“여기는 기본 시설도 부족해서 제작 직업이 스킬 레벨 올리려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하고요…….”
“NPC들 친밀도, 평판 올리기 더럽게 어려운데 삐지기는 또 쉽게 삐져요. 진짜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데 여기서 한 게 억울해서 이러고 있어요.”
다다다다 쏟아지는 플레이어들의 고발!
유 회장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느꼈다.
“아저씨, 여기서 시작하신 것도 인연인데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세요.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아, 나 나무 낚싯대 있다. 이거 그냥 드릴 테니까 쓰세요. 너 초보자 장비 있지? 그것도 좀 드려라.”
“맞다. 그냥 드릴게요. 이거도 쓰세요.”
쏟아지는 선물들!
태현이 타이럼 시를 떠난 뒤, 타이럼 시에서 시작하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점점 동지 의식이 싹텄다.
같은 사기에 당한 피해자들!
유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고맙네. 내 이 신세는 반드시 갚지.”
“??”
뭔가 고풍스러운 유 회장의 말투에 두 플레이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뭐 갚으실 필요는 없는데요.”
“아니야! 내가 살면서 빚지면서 산 적이 없어.”
“이게 무슨 빚이라고. 어쨌든 타이럼 시가 최악이긴 한데…… 그나마 낚시하시려면 저기 산으로 올라가서 연못 가보세요. 작은 연못이긴 한데 낚시는 할 수 있을 거예요. 거기서 레벨 좀 올리시고 골드 모으면 바로 다른 도시로 마차 타고 튀세요!”
튀어라! 라는 말에는 진심 어린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유 회장은 살짝 감동했다.
이런 이해타산 없는 따뜻한 정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
“아, 그리고 뒷산 올라가실 때 토끼 조심하세요.”
“알겠네.”
유 회장은 별생각 없이 ‘토끼 조심하세요’를 흘려 넘겼다.
아직 타이럼의 무서움을 모르는 그였다.
주섬주섬 장비를 하나씩 챙겨 입고 산으로 떠나려는데, 멀리서 NPC들이 지르는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이벤트의 일종이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 누가 대단한 퀘스트를 해냈네? 누구지?’ 하고 반응했지만, 유 회장은 잘 몰랐기에 무시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유지수! 유지수! 유지수!”
“제발 좀…… 조용히…… 창피하니까…….”
“위대한! 타이럼! 레인저! 세 살 때부터 화살을 집고 일곱 살 때부터 오크의 머리를 날려버리신!”
“닥쳐! 좀!”
유지수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타이럼 레인저인 그녀는 대부분의 퀘스트가 타이럼과 관련되어 있었다.
덕분에 대형 퀘스트를 깰 때마다 들어야 하는 타이럼 사냥꾼들의 부끄러운 환호성!
다른 플레이어들이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부끄러웠다.
‘제발 좀 소리라도 줄여줘!’
뒤에서 일어나는 소란은 무시한 채, 유 회장은 초보자용 장비를 입고 낚싯대를 어깨에 멘 채로 출발했다.
퍽!
그리고 토끼한테 맞아 쓰러졌다.
* * *
에랑스 왕국에 도착한 케인은 매우 얌전해져 있었다.
“왜 그러냐?”
“내, 내가 예전에…… 에랑스 왕국에서 PK를 몇 번 했었거든…….”
순간 이다비와 태현에게서 동시에 쏟아지는 한심하다는 눈빛!
“시간 꽤 지났으니까 현상금 풀렸을 거야! 몇 번 밖에 안 했었고!”
태현은 케인을 무시하고 이다비에게 말했다.
“저놈 잡히면 버리고 가자.”
“그래요!”
죽이 척척 맞는 둘!
케인은 애절하게 손을 내밀었다.
“야, 그러면 안 되지!”
“농담이야. 그런 거 가지고 걸리지는 않지. 네가 에랑스 왕국에서 떠난 지가 언제인데…….”
“그, 그렇지? 그렇겠지?”
둘의 대화를 들은 이다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케인이 뭔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런데 코랑 귀에 달고 있는 거 때문에 더더욱 안 걸리실 것 같은 읍읍!”
“쉿. 쟤 지금 모르고 있잖아.”
태현은 이다비의 입을 막았다.
긴장해서 그런지 자기가 무슨 장비를 달고 있는지도 까먹은 케인!
“자, 그러면 보상받으러 가자!”
에랑스 왕국은 중앙 대륙의 왕국 중에서도 가장 잘나가고 강력한 왕국이었다.
길거리만 지나가도 중무장한 기사들이 보이고, 마법사 플레이어라면 꼭 필요한 마탑도 여러 군데 있으며, 제작 직업들을 위한 시설들도 다양하게 있는 플레이어들의 천국!
그런 곳을 내버려 두고 잘츠 왕국의 타이럼 시에서 시작하는 건 이상한 사람들밖에 없었다.
“김태현 백작님! 돌아오셨군요!”
태현의 모습을 발견한 데메르 사제들이 신전의 입구에서 뛰쳐나왔다.
무척 반가운 태도!
‘역시 데메르 교단이 참 착해.’
태현도 반갑게 사제들의 손을 맞잡았다.
“하론 사제님과 다른 분들은 다 어디 계십니까?”
“…….”
태현은 슬며시 손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