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될놈이다-282화 (282/1,826)

§ 나는 될놈이다 282화

“알고 있는 놈이 못 잡아서 낚시 같지 않다는 소리는 왜 해!”

그 도발 때문에 이런 내기까지 하게 된 것 아닌가.

그러나 태현의 대답은 유 회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어르신 강태공 흉내 내는 거 아니었어요? 그래서 재밌다고 한 거였는데.”

“……!”

유 회장은 순간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놈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구나!’

강태공, 옛날 옛적 관직에 나가지 않고 호숫가에서 시간을 낚은 유명한 현자!

실제로 유 회장이 여기서 미끼도 바늘도 없는 낚시를 하는 건 저 강태공 이야기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그런데 저 김태현이란 놈은 여기 와서 힐끗 본 것만으로도 유 회장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왜 이러고 있는지를 다 알아맞힌 것이다.

‘눈이 보통이 아닌 놈이다. 정말로!’

거기에다가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가 유 회장이 알아서 무덤을 팔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음흉한 꿍꿍이까지!

능력도 능력이지만 저 꿍꿍이가 더 기막혔다.

‘김태산이 아들이어서 성격이 비슷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군.’

얼핏 보면 비슷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김태산은 직선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이라면, 태현은 직선적이고 저돌적으로 보이는 것일 뿐 그 속은 아주 음흉한 놈이었다.

가볍게 말 하나하나를 해도 속으로는 다 계산하고 있는 놈!

유 회장은 패배를 인정했다. 태현을 너무 얕본 그의 패배였다. 이런 놈인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진지하게 대했을 것이다.

“그래, 내가 졌다. 뭘 원하냐?”

“예? 생각 안 해놨는데요.”

“…….”

“나중에 생각나면 말하죠, 뭐.”

유 회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 저놈은 왜 이렇게 얄미울까?’

분명 능력 있고 괜찮은 놈인 건 알겠는데, 자꾸 무언가 얄밉게 만드는 무언가!

유 회장의 본능은 놀라웠다.

유지수가 요즘 좋아하는 상대가 누군지 생각해 본다면 더더욱 정확한 본능!

* * *

“넌 왜 바지가 다 젖었어?!”

김태산은 기가 막혀서 외쳤다. 산책하러 간 놈이 왜 바지가 다 젖어서 돌아온단 말인가.

“아, 웬 어르신하고 만나서 내기를 하는 바람에…….”

“뭔 내기?! 바지에 물 적시는 내기라도 했냐?!”

“그런 내기는 아니고…….”

“근데 이겼냐?”

내기는 왜 했냐, 내기는 누구랑 했냐, 무슨 내기를 했냐, 이런 걸 묻기 전에 ‘이겼냐’부터 물어보는 김태산!

“당연히 이겼죠.”

“그래. 그러면 됐다. 내기든 간에 뭐든 이겨야…… 아니, 이게 아니지! 너 이 자식. 오늘 어르신한테 인사드리려고 데리고 왔는데 이렇게 다 젖어서…….”

“의자에 앉아서 인사를 드리면 안 들키지 않을까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됐어. 어르신께서 바지 젖은 걸로 신경 쓰실 분은 아니니까. 따라와.”

김태산은 태현의 어깨에 굵은 손을 올리고 끌고 갔다.

더 내버려 뒀다가는 어디 가서 무슨 사고를 칠지 두려워지는 아들!

“아, 저기 계시네.”

저 멀리 유 회장이 다른 몇몇과 인사를 나누는 게 보였다.

유 회장에게 인사를 올리는 사람들은 보기 과할 정도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김태산은 그러거나 말거나 가서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어르신, 생신 축하드립니다.”

“자네 왔나? 그래. 잘 왔네.”

유 회장의 따뜻한 태도에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눈빛이 변했다.

‘저 사람 누구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여기, 제가 말한 아들놈입니다.”

“…….”

“…….”

“??”

유 회장과 태현이 서로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김태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둘이 저러고 있는 거지?

“아니, 잠깐만요. 회장님께 인사를 드리는데 그 꼴이 뭡니까?”

옆에 있던 남자 중 한 명이 태현의 바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의가 없…….”

“됐네.”

“예?”

“됐다고 했네.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 끼어들 필요 없네.”

칼 같이 잘라내는 유 회장!

그 냉정한 태도에 끼어들었던 남자는 무안한 얼굴로 물러섰다.

유 회장의 성격은 이미 유명했다. 한 번 거스르면 벼락처럼 응징하는 불같은 성격!

괜히 점수를 따려고 나섰다가 욕먹은 남자. 주변 사람들은 그를 보며 쯧쯧거렸다.

‘저렇게 찍혀서는 앞으로는 글렀군.’

‘괜히 나섰다가 저런 꼴을 당하다니.’

‘내가 안 나서서 다행이다.’

그리고 김태산과 태현, 두 부자를 향한 시선이 더욱 달라졌다.

‘생각보다 많이 아끼시는 것 같은데?’

‘뭐하는 사람들이지?’

‘아까 이야기를 했을 때는 그냥 부동산 거부인 줄 알았는데…… 그것만으로 회장님하고 친할 이유가 있나? 회장님한테 건물이라도 선물했나?’

사람들이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김태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현에게 물었다.

“너 설마 어르신하고 내기를 한 거냐?”

“네. 그런데 이분이 그 친구분이셨습니까? 아버지, 아무리 친구가 없어도…….”

태현이 측은한 눈빛으로 김태산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친구가 없어도 그렇지 이런 사람을 붙잡고 친구해달라고 하다니’라는 눈빛!

“뭐?! 아니야, 인마! 뭔 오해를 하고 있는 거야?”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를 끼치면 안 되죠.”

“어르신이 나한테 친구하자고 한 거야!”

둘이 계속 얼굴을 맞붙이고 속삭이자 다른 사람들은 무슨 대화를 저렇게 하나 궁금해했다.

‘우리가 들으면 안 되는 대화인가?’

‘얼마나 중요한 대화길래?’

정작 가까이 있어서 둘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던 유 회장에게는 어이가 없는 일일 뿐이었다.

“크흠, 크흠.”

“아, 죄송합니다, 어르신. 그보다 오늘 주인공이시면서 아닌 척 계시다니, 생각보다 은근히 음흉하시네요.”

“?!?!”

태현이 유 회장에게 말하는 걸 보고 다른 사람들은 기겁했다. 지금 저놈이 뭐라는 거야?

그러나 유 회장은 떨떠름한 표정만 지을 뿐 별로 화를 내지 않았다.

“너한테 들을 소리는 아니다.”

“에이, 제가 뭘.”

“어르신하고 이야기하게 넌 좀 저리 가 있어.”

김태산은 쉭쉭 소리를 내며 태현에게 저리 가라고 손짓했다.

더 가까이 있다가는 뭔가 사고를 칠 것 같은 태현!

이미 인사는 시켰으니 목적은 대충 달성한 것 아닌가.

“그러죠, 뭐. 회장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 그리고…….”

“……?”

“판온 2 하실 거면 꼭 타이럼 시에서 시작하세요. 거기가 최곱니다.”

“그래?”

유 회장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의 사악한 마음은 눈치채지도 못하고.

물귀신 작전!

내가 타이럼에서 고생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고생해 봐라!

태현은 씩 웃었다.

* * *

“아버지,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래. 고맙다.”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유 회장.

아들인 사장 앞에서도 표정 하나 풀지 않는 그 위엄에 모두들 감탄했다.

“할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오냐, 우리 지수. 뭐 필요한 거라도 있니?”

그러나 손녀인 유지수 앞에서는 풀어지는 얼굴!

“아, 아니요.”

“저런, 왜 이렇게 욕심이 없어?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가져도 괜찮을 텐데. 넌 성우하고 달리 너무 욕심이 없다니까.”

“제가 뭘…….”

유성우 사장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매번 구박을 받는 건 아들인 그의 몫이었다.

“시끄럽다, 이놈아. 과징금으로 내 명예에 먹칠을 해?”

“그, 그건 실수였습니다!”

“네 아랫사람 실수는 네 탓이지!”

두 부자가 평소처럼 싸우자, 유지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발걸음을 살며시 옮겼다.

매번 만나면 똑같이 싸우는 저 둘!

‘지겹지도 않나?’

유지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평소에 자주 봤던 얼굴들만 있었다.

언제나 와서 인사하고,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 게다가 이런 자리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지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또래 찾기는 거의 불가능!

‘그냥 들어가서 쉴…… 어????’

유지수는 눈을 깜박거렸다. 분명히 여기 있을 리 없는 사람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봐도 멀쩡하게 서 있는 그 사람!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 * *

쿡쿡-

“……?”

누군가가 태현의 등을 찔렀다. 혼자 조용히 구석에 앉아서 아싸임을 증명하고 있던 태현은 고개를 돌렸다.

뒤에 서 있는 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여학생!

태현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유지수는 순간 두근거렸다.

‘설마 알아차린 걸까?’

“혹, 혹시 김태현…… 맞아요? 판온 2 하고…….”

“맞는데. 나한테 이렇게 말을 거는 걸 보면 너는…….”

“……!”

유지수는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드디어!

“혹시 지수의 누나니?”

“…….”

사람을 때려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유지수였지만, 그 순간은 정말로 태현의 명치에 한 방을 넣고 싶어졌다.

“……제가 유지수인데요.”

“응?”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눈앞의 여학생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판온의 유지수와 비슷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판온의 유지수가 좀 더 보이시한 느낌이라는 것 정도?

그렇다면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아, 이름이 같은 쌍둥이니?”

“……저 외동인데요?”

“그렇다면…….”

태현은 한 가지 결론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유지수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

“네 취향은 잘 알았다.”

“네?”

“여장하는 취미가 있는 거지? 녀석. 난 취향을 존중하는 사람…….”

“대체 왜 거기로 흘러가는 거예요!”

빡!

경쾌한 소리와 함께, 유지수는 점프해서 태현의 턱을 들이받았다.

* * *

“상상도 못 했다. 네가 남장을 하고 있었을 줄은…….”

“남장한 적 없거든요?! 그쪽이 오해한 거거든요?!?!”

그냥 분위기만 살짝 바꿨는데 알아서 남자로 착각한 게 누군데!

유지수의 눈빛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하하, 뭐 착각할 수도 있지.”

“오빠 말고 그렇게 착각한 사람 없어요!”

“네가 말했으면 됐잖아.”

“읏…….”

유지수는 머뭇거렸다. 자기 입으로 ‘저 남자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건 뭔가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그, 그건 조금…….”

“조금 뭐?”

“잠깐, 그런데 오빠는 여기 어떻게 있는 거예요?”

화제를 돌릴 겸, 유지수는 물었다.

태현이 여기 있다는 것 때문에 당황해서 못 떠올렸지만, 생각해 보니 이상한 상황이었다.

여기 왜 태현이 있지?

“오늘 생신이신 그…… 유 회장님이었나? 그분하고 아버지하고 친해지셔 가지고. 나까지 같이 오게 된 거지.”

“정말요?!”

유지수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그녀 모르는 사이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니.

‘할아버지, 고마워요!’

요즘 자꾸 있지도 않은 남자친구를 의심하며 귀찮게 하는 것 때문에 불만이 많았는데, 이번 일로 그런 불만이 싹 사라졌다.

물론 유 회장이 알게 된다면 가슴을 치고 탄식할 일이었지만!

“그러면 여기 자주 오겠네요?!”

“어? 아니. 생신이 일 년에 두 번 이상 있지는 않잖아?”

“……친하잖아요! 친한 사람들은 자주 만나야죠!”

“아니, 아버지하고 회장님하고 친한 건 알겠는데 난 아무하고도 안 친하잖아.”

“저하고 친하잖아요!”

유지수의 눈빛에서는 불꽃이 번쩍였다. 순간 태현이 뒤로 물러설 정도!

“그…… 런가?”

“그렇죠! 친한 사람들끼리 자주 만나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에요!”

“그, 그래?”

뭔가 납득되지는 않았지만 유지수의 분위기는 반론을 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앞으로는 자주 오시고, 또 자주 같이 놀고…… 하여튼 약속이에요, 약속!”

얼떨결에 태현은 유지수와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을 하게 되었다.

‘어? 뭔가 당하고 있는 기분인데?’

태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찜찜함을 느꼈지만, 고민하기도 전에 유지수는 일을 끝내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