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80화
“초대했는데 거절하셨습니다.”
‘역시!’
생각이 맞았다. 이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김태현을 섭외해주세요. 저와 같이 한 팀으로요. 그게 된다면 저도 참가할게요.”
“네?”
배장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것이다.
길드를 안 만들고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에 이상하게 집착하는 태현과 달리, 이세연은 그녀가 길마인 길드가 있었다.
그런데 왜 김태현을 섭외해 달라는 것인가?
그것도 한 팀으로.
“안 되나요?”
“그, 그게…… 일단 거절을 하셔서. 한 번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김태현 플레이어하고 한 번 같이 합을 맞춰보고 싶어서요. 그리고 저도 사람인데, 프로 리그에 참가하는 이상 우승을 해보고 싶지 않겠어요?”
“확실히 그렇군요.”
배장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연의 길드원들은 다들 실력자였지만, 태현과 비교한다면 역시 급이 안 됐다.
‘역시 이세연. 철저해. 승리를 위해서 벌써부터 계산에 들어가는 저 냉정함. 판온 1의 전설이 괜히 전설이 아니야.’
배장욱은 오해하고 있었다.
물론 태현의 실력이 탑에 들어갈 정도로 대단하기는 했지만, 이세연이 이기기 위해서 정든 길드원들을 버리고 외부인과 같이 손을 잡을 사람이 아니었다.
원하는 건 하나!
태현을 손 안에 넣는 것!
‘열 번 찍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걸리겠지!’
태현이 들었다면 ‘뭐 이딴 스토커가 다 있냐’ 하고 기막혀할 생각을 하고 있는 이세연!
그리고 말려야 할 배장욱은 이세연의 생각에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다.
이세연-김태현이 팀이라니.
완전히 꿈의 팀 아닌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 * *
“아들, 준비 다 됐냐?”
“저야 언제나 준비됐죠.”
“……좀 긴장을 해라!”
“언제는 긴장하지 말라면서요!”
“넌 임마 너무 긴장을 안 해!”
투닥거리는 부자.
김태산은 태현을 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이놈이 어르신 생신 잔치에 가서 내 망신을 시키지는 않겠지?’
김태산은 태현을 잘 알고 있었다.
어디 자리에 가서 그를 창피하게 망신시킬 정도로 못 배우거나 한 태현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묘하고 치사하고 비열하게 괴롭히는 건 충분히 할 수 있지!’
누구 아들인데 그러겠는가!
김태산은 태현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태산이 방송에 나가서 태현의 뒷이야기를 하려다가 실패한 것처럼, 태현도 그 자리에 가서 김태산의 뒷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아들, 용돈 필요하냐?”
“아버지가 용돈 주신다고 하는 거 보니 갑자기 아쉬운 게 있으신 것 같은데…….”
“…….”
예리한 태현! 김태산은 등에서 진땀을 흘렸다.
“아. 거기 가서 쓸데없는 소리 할까봐 그런 거죠?”
“……그, 그런 거 아니야.”
“에이, 안 해요. 안 해. 걱정 안 하셔도 되요.”
“정말?”
“어차피 아버지는 이미 방송 나오신 거 때문에 놀리기 충분한데.”
“그건 오크 종족으로 외모 변경해서 나인지 모른다고!”
“아, 그래요? 그러면 그건 꼭 말해줘야겠네.”
“안 돼, 인마! 말하지 마!”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는 같이 안 가세요?”
“윤희는…… 그런 곳에 가기에는 너무 귀한…….”
“……아버지, 설마 망신당할까 봐 같이 안 가는 건 아니겠죠?”
김태산은 시선을 피했다.
아내인 정윤희 앞에서는 언제나 최고의 남자로 있고 싶은 것이 김태산의 마음!
일단 자리에 먼저 가서, 그의 이미지가 괜찮을 수 있는지 확인을 하고…….
괜찮으면 그 다음부터 데리고 가는 철저함!
태현은 한심하다는 듯이 김태산을 쳐다보았다.
‘저게 과연 철저한 건가, 아니면 한심한 건가!’
김태산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너 그래서 판온 요즘 뭐하냐? 방송도 안 나오던데.”
“저야 마계에서 탈출해서 이제 간신히 대륙으로 돌아왔죠.”
남이 들으면 깜짝 놀랄 이야기를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평범하게 하는 태현!
김태산은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속으로 감탄할 뿐.
‘이 자식이 또 언제 거기 가서 그런 퀘스트를…….’
언제 한 번 본때를 보여줘서 아버지의 위대함을 각인시켜주고 싶었는데,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직도 오스턴 왕국에 계세요?”
“그래. 친구들 데리고 성 관리하고 있다.”
현재 오스턴 왕국의 상황은 매우 뜨거웠다.
새로 통일된 오스턴 왕국이 절반.
혼란스러운 틈을 타 들어온 플레이어들 세력이 절반.
그 플레이어들 세력은 또 각자 성, 도시, 마을, 요새들을 점령하고서 치고받고 있었다.
치열한 전국시대!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하도 주변에 적이 많아가지고…… 아, 맞다. 나한테 초대 왔었다.”
“무슨 초대요?”
“너 싫어하는 놈들이 모인 길드던데. 들어오면 너 밟을 수 있다고 꼬시더라고.”
‘길드 연합!’
태현은 움찔했다. 태현을 싫어하는 길드 놈들이 뭉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줄이야.
‘파워 워리어 길드는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거 맞나?’
태현은 파워 워리어 길드에게 부탁했었다. 대형 길드 연합의 움직임을 감시해달라고.
지금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이상한 방법으로 길드 연합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는 상상치도 못하는 태현이었다.
“설마 수락하신 건 아니겠죠?”
“왜, 겁나냐?”
“에이, 무슨 씨도 안 먹힐 도발을…… 걔네랑 손 잡고 싶으시면 손 잡으세요. 패배자들이랑 놀면 패배자 기운 옮는다고 말한 게 누구신데…….”
태현에게 아픈 곳을 찔린 김태산이 움찔거렸다.
‘패배자랑 놀면 패배자가 된다!’라고 말한 게 바로 김태산!
“거절했어, 인마. 그러고 보니 우리 길드에도 이상한 놈 하나 있는데.”
“아버지 친구분 중에서요?”
“아니. 새로 들어온 놈인데. 정확히 말하자면 길드원은 아니고 붙잡혀서 들어온 놈에 가깝지…… 애가 좀 싸가지가 없어서 데리고 다니면서 교육을 좀 시키는데 더럽게 말 안 듣고 징징대.”
한 번 PK 하려다가 제대로 코가 꿰인 로이!
그래도 랭커의 끝자리에 발이라도 들였던 로이였는데, 그게 김태산과 그의 길드원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도저히 도망칠 틈을 주지 않는 철저함!
로이도 처음에는 틈을 노려서 도망치려고 했다.
계약서를 써서 페널티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더 이상 붙잡혀 있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 어느 순간에도 접속해 있는 최강지존무쌍 길드원들!
-아니, 이 아저씨들은 대체 왜 들어오기만 하면 게임 접속한 상태인 거야?!
로이도 나름 게임 폐인이라고 자부했지만, 한가한 아저씨들에게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너 따라다니는 그 케인인가 뭔가 하는 친구는 참 성실하고 좋아 보이던데 말이야.”
“에이, 케인이 얼마나 뺀질대는데요.”
태현은 케인이 들었다면 뒷목을 잡았을 소리를 태연하게 했다.
“아, 맞다. 아버지. 오스턴 왕국이라고 하셨죠?”
“그래. 왜?”
“……거기 나중에 무슨 일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악마들 상대할 만한 아이템도 좀 준비해 놓으시고…….”
“뭔 소리야? 너 이 자식.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네가 뭔 짓 했지?”
“무슨 소리세요! 순수하게 호의로 알려드린 건데!”
“네가 알고 있다는 게 수상하잖아, 임마! 오스턴 왕국에서 악마 관련된 이야기는 너한테서 처음 듣는데! 내가 정보를 몇 군데에서 수집하는 줄 알아?”
넘쳐나는 게 돈인 김태산은 몇몇 사이트에서 따로 판온 2 정보를 구입하고 있었다.
탐험가 중에서 판온 2를 돌아다니면서 얻은 고급 정보를 파는 플레이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스턴 왕국에 악마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이야기는 태현한테서 처음 듣는 이야기!
그렇게 두 부자는 티격태격 싸우며 유성수 회장의 별장으로 이동했다.
* * *
태현은 휘파람을 불었다.
호화로운 건물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별장은 그 중에서도 대단했다.
‘아버지 친구분 중에서 이런 분이 있었나?’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태산의 친구 중에서 가장 잘사는 건 김태산이었다.
정말 비싸 보이는 건물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서는 안 됐다. 괜히 비싼 장식이나 조각 같은 걸 들여 봤자 오히려 천박해 보이거나 싸 보일 뿐.
품격이란 건 아주 엄밀한 계산 하에서 나오는 것!
그런 면에서 이 별장은 대단했다. 화려한 장식 하나 없지만 수수하고 깔끔한 건물들의 디자인에서 품격이 묻어나왔다.
게다가 별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리조트는 아무리 봐도 이 별장 주인이 전용으로 쓰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만 구경하고 들어가자. 여기 초대장 있습니다.”
“김태산 씨군요. 어서 들어오시죠.”
입구에서 경호원들이 김태산의 초대장을 확인하고 들여보냈다. 태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생일 잔치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그런 것치고 뭐…… 플래카드 하나 없는데요.”
“플래카드는 촌스러운 사람들이나 하는 거야.”
“아버지 생일 때 아버지 친구분들이 ‘리X지 성주님 생신 축하 충성충성충성’ 하고 화환이랑 플래카드 보내지 않…….”
“얌마!”
“하하. 다른 사람들 앞에서만 말 안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둘은 차에서 내렸다. 김태산은 불안하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저 자식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 놀리면 안 되는데…….’
여기 모이는 사람들은 나름 사회에서 명망 있는 인사들 아닌가!
그 사람들 앞에서 ‘저희 아버지가 리X지 성주님이셨죠 하하 막 PC방만 가면 알바들이 형님 형님 거렸는데…….’ 이런 소리가 나온다면…….
그런 김태산의 불안함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태현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아직 잔치 시작하려면 멀었으니까 저 여기 구경 좀 해도 됩니까?”
건물 주변에는 넓고 조용한 산책로부터 시작해서 돌아다닐 곳이 많았다.
물론 유 회장의 생일에 찾아온 손님들은 그런 곳을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들은 전부 메인 홀에서 각자 명함을 나누고 있었다.
유 회장의 생일이지만, 이건 동시에 친분을 나눌 수 있는 사교 행사의 자리!
유 회장의 생일에 참석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다 대단한 사람들밖에 없었으니, 서로 인맥을 교환해서 나쁠 게 없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태현은 여기서도 아싸의 본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자고로 사람 많은 친목회 자리는 피하려고 하는 게 아싸!
태현의 속마음을 읽은 김태산은 고민했다.
‘이 자식 좀 소개하려고 했더니 또…….’
잠시 고민하던 김태산은 포기했다. 어차피 태현은 시킨다고 해서 말을 듣는 놈도 아니었다.
게다가 괜히 같이 다녔다가 입이라도 잘못 놀리면……!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대망신!
‘나중에 어르신한테 따로 인사만 시키고 그냥 가는 게 좋겠군.’
“그래. 산책 좀 하다 와라.”
서로 뜻이 통한 두 부자!
* * *
“이렇게 좋은데 왜 아무도 없냐?”
태현은 중얼거리며 산책로를 걸었다.
녹음이 우거지고 잘 깔린 돌길이,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산책로였다.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데 아무도 안 걷고 안에만 있다니!
태현은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게임을 하다 보면 이렇게 몸을 움직이는 걸 잊기 쉬웠다.
‘언제나 체력이 중요하지. 그러면 집에 돌아가서 다음으로 해야 할 퀘스트가…… 일단 기계공학 비전 스킬도 찾아야 하는데, 최대한 빨리 탈출해서 보상받고 에랑스 왕국으로 가야 하려나…….’
남들에게는 왜 안에만 있냐고 해놓고 자기는 걸으며 게임 생각만 하는 태현!
남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