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71화
순간 이성을 잃고 욕을 할 뻔한 태현이었지만, 태현은 잘 참아냈다.
‘그래. 꼭 그 주인하고 싸워서 차원문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잘 말해서 이용해도 되고…….’
“그런데 우리 주인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성문을 열어주지는 않을 텐데.”
“에다오르의 친구인데도?”
에다오르와의 우정(?)을 끝까지 강조하는 태현! 대검을 뺏기고 자신의 성에 틀어박힌 에다오르가 알게 된다면 피가 거꾸로 솟을 거짓말이었다.
“에다오르의 친구여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게다가 우리 주인님께서는 에다오르를 싫어하시니까.”
“사이가 안 좋나?”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은 하네. 다른 층의 악마가 사이가 좋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각 층의 주인들은 각자 한 세력을 갖고 있는 악마들이었다. 당연히 다른 악마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적대적 경쟁 관계!
“넌 에다오르를 안 싫어하나?”
“싫어하고 뭐고 만난 적도 없다. 이름만 들었지. 나 같은 악마가 에다오르를 어떻게 알겠어?”
악마의 목소리에서는 에다오르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역시 고위 악마는 고위 악마!
마계에서 대륙으로 소환되어서 약해진 데다가, 태현한테 즉사 공격을 맞아서 허무하게 돌아간 것뿐이지, 에다오르 자체는 이제까지 대륙에 등장한 보스 몬스터 중 가장 강한 보스 몬스터에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다오르는 정말 대단한 악마지. 힘뿐만이 아니라 교활하고 깊은 지략을 갖고 있거든. 악마들 사이에서 소문이 날 정도야. 이번에 대륙으로 내려가서 흉악한 계략을 꾸몄다고 들었는데, 아마 대륙을 피로 물들이고 돌아왔겠지.”
“……?”
뭔가 이상하게 퍼진 소문!
“에다오르 밑의 부하 악마 놈들이 부러워. 인간의 영혼을 아주 짭짤하게 챙겼을 텐데 말이지.”
전혀 부러워할 게 못 됐다. 나눠지고 분열되어서 서로 싸우다가 일부는 태현 밑으로 들어가서 노예화!
게다가 그 중 몇몇은 태현한테 잊혀진 채로 성안에서 조각상인 척을 하고 있었다.
악마 입장에서는 망신 중의 개망신이었다.
“어…… 에다오르가 자랑이라도 하고 다녔나? 자기 대륙에서 잘나갔다고?”
태현은 살짝 미안해진 마음으로 물었다.
그렇게 명성 높은 악마와 그 악마가 오랫동안 공들여 세운 계획을 태현은 그냥 망가뜨린 것이다.
“아니. 에다오르는 돌아와서 그냥 자기 성에 틀어박혔다던데.”
“…….”
“분명 자기들끼리 독점하려고 문을 닫은 거겠지. 누가 악마 아니랄까 봐 아주…….”
태현은 어떻게 된 건지 짐작이 갔다.
대륙에 내려가서 하라는 인간의 영혼은 몇 개 얻지도 못하고, 태현한테 공격당해서 대륙에서 쫓겨나고, 게다가 그의 상징인 대검까지 뺏긴 상황.
이런 걸 당당하게 말하고 다닐 수 있는 악마는 없었다. 약한 놈은 무시당하는 게 마계! 진실이 밝혀지면 에다오르한테 덤비는 악마들이 우글거릴 것이다.
‘에다오르는 아직 회복도 못 했을 텐데…….’
악마의 본체는 마계에 있었다. 대륙으로 소환되어서 싸우다 죽어도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에다오르가 여기서 날 쫓아오지는 않겠군. 그 전에 튀어야지.’
대륙으로 소환된 악마들은 마계에 있을 때보다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본거지인 마계에서 싸우게 된다면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
최대한 빨리 튀어야 했다. 그렇지만…….
탁-
“……?”
태현이 어깨를 잡자 악마 전사는 고개를 돌렸다.
“뭐야?”
“그래서 마을에 상점은 어디 있지?”
튈 때는 튀더라도 누릴 수 있는 건 누리고 가자!
* * *
“악, 악마들이 만든 물건을 사는 건 조금…….”
“어허, 하론 사제. 그렇게 생각이 좁아서는 큰일을 할 수 없다고. 잘 생각해봐. 악마들이 만든 물건을 그냥 내버려 두면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그걸 잡게 될 거 아냐. 난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사서 손에 넣으려는 거야.”
이다비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조용히 킥킥거렸다. 저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
당황하는 하론 사제를 보자 태현은 김태산이 떠올랐다.
-아들아, 술은 건강에 나쁘단다. 어떻게 이렇게 나쁜 물건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냐! 마셔서 없애야 한다! 헉! 윤희! 아, 아냐! 마시려고 한 게 아니라고! 정말이야!
술을 마시기 위해서는 기막히게 변명을 지어내는 김태산이었다. 물론 그런 변명이 통한 적은 거의 없었지만…….
어쨌든 태현에게 좋은 교육이 되었던 건 사실!
“인간? 알아서 빨리 보고 나가라고. 위에 있는 물건들은 건드리지 말고. 건드리면 쫓아낸다.”
악마들의 마을에 있는 상점들은 도시에 비하면 매우 초라하고 작았다.
작은 마을에 있는 상점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상점 주인인 악마도 매우 불친절했다.
퀘스트를 깨서 마을 내에서 평판을 좀 올리고 친밀도를 올렸다지만,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인간인 데다가 이방인!
쫓겨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원래 다른 플레이어들이었다면 입구에서 공격받고 쫓겨났을 테니까.
“이다비.”
“네.”
“네 능력을 살릴 때가 왔다.”
“후후후…… 드디어 저를 인정하시는 건가요?”
“잘난 척은 그만하고.”
“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현은 이다비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 상점에서 가장 활약할 수 있는 게 바로 그녀였다. 상인 계열 직업을 갖고 있지 않은가!
상인의 무대는 바로 상점!
이다비는 매의 눈으로 작고 좁은 상점 안을 둘러보았다. 뼈로 된 선반 위에 먼지가 쌓인 아이템들이 보였다.
-황금상인의 감정안!
아이템의 성능을 완전하게 파악하는 감정 계열 스킬은 상인 직업의 밥줄 중 하나였다.
남들은 비싼 확인 주문서를 들고 다니거나, NPC한테 비싼 골드를 주고 맡길 때 상인 플레이어는 웃으며 확인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다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황금상인의 감정안>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이템의 가치를 파악하는 스킬!
비싸면 비싼 아이템일수록 더 밝은 황금빛 테두리 선으로 빛났다.
“보여요, 보여! 선이…… 보여요!”
“그래. 잘됐네.”
이다비의 호들갑을 한 귀로 흘리고, 태현은 태현 나름대로 감정에 나섰다. 그에게도 스킬은 있었던 것이다.
-마계의 하급 칼날 채찍.
‘패스.’
-사악한 악마의 서투른 영혼석 지팡이.
‘이것도 패스.’
좁은 상점이라고 해서 아이템 숫자가 적은 건 아니었다. 하나하나 보고 판단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저 구석에서 눈빛을 번뜩이고 있는 악마 상인!
자꾸 만지작거리면 정말로 쫓겨날 수도 있었다. 친밀도가 낮은 상태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악마적인 발상의 악마가 만든 태엽 오르골:
장치를 작동시키면 안에서 악마의 웃음소리가 나오는 오르골입니다. 악마 대장장이가 만든 장난감입니다.
갖고 있을 시 악명 5 증가. 소리를 들을 경우 공포 상태에 빠질 수 있음.
‘이건 뭔 쓰레기 같은…….’
[뛰어난 솜씨의 아이템을 봤습니다. 기계공학 스킬이 오릅니다.]
[중급 기계공학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악명이 5,000 이상입니다.]
[<악마적인 발상의 악마가 만든 태엽 오르골>의 숨겨진 장치를 발견합니다.]
<악마에게서도 배울 건 있다-기계공학 비전 스킬 퀘스트>
당신은 특이한 태엽 오르골 하나를 발견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놓쳤겠지만, 뛰어난 기계공학 스킬과 높은 악명을 가진 당신은 숨겨진 장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숨겨진 장치 안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자격이 있는 악당만이 이 글을 볼 수 있으리니, 대륙에서 나 사루온을 찾아라!’
이 자신만만한 악마를 찾는다면 기계공학 비전 스킬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상:?, ??
태현은 깜짝 놀랐다. 이런 퀘스트는 쉽게 얻을 수 있는 퀘스트가 아니었다.
비전 스킬 퀘스트! 이건 교단의 권능 스킬에 맞먹을 정도로 중요한 퀘스트였다.
검술, 마법, 궁술, 대장장이 기술, 요리…… 이런 기본 스킬들에는 비전 스킬이 있었다.
일종의 필살기 같은, 숨겨진 보물 같은 스킬들!
이런 걸 얻는 것도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자기 직업 스킬만 신경 쓰다가 허점을 찔리는 플레이어들은 은근히 많았다.
직업 스킬만 신경 쓰다가 기본 스킬은 소홀히 대한 플레이어들!
판온 1에서 그런 플레이어들은 태현의 먹잇감이었다.
‘근데 왜 불안하게 악마냐?’
판온의 NPC들은 중요한 스킬들을 갖고 있었다. 검술 스킬의 숨겨진 비전 스킬을 어느 왕궁의 은퇴한 기사가 갖고 있다던가, 마법 스킬의 숨겨진 비전 스킬 중 하나를 마탑에서 은둔하고 있는 현자가 갖고 있다던가…….
그런데 대장장이는 대륙에 숨어 있는 악마!
뭔가 좋은 꼴은 보기 힘들 것 같았다.
“이봐! 왜 자꾸 거기서 서 있는 거야! 내가 빨리 보고 나가라고 했잖아! 그걸 살 건가?”
“아뇨?”
태현은 재빨리 오르골에서 시선을 뗐다.
안에 있는 글귀 읽고 퀘스트를 받았으니 굳이 아까운 영혼석을 내고 사지는 않겠다는 얌체 같은 마음!
그거로도 모자라, 태현은 <여기에다가 쓸 수 있는 건 저기에다가도 쓸 수 있어> 스킬을 사용했다.
아이템을 분해해서 다른 아이템에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기계공학 스킬이지만, 지금 쓰려는 이유는 하나.
‘어차피 내가 안 가지고 갈 건데 남이 손대게 하면 안 되지. 분해해서 중요한 부분만 몰래 빼낸다.’
-행운의 은신!
-신의 예지!
아주 좁고 가는 붉은 색 선. 태현은 아슬아슬하게 거기 위에 서서 아이템을 만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다른 아이템들을 감정하고 있던 이다비는 태현을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뭐하는 거예요?!’
‘나 하는 동안 시선 좀 끌어봐.’
‘어떻게요?!’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이다비는 울상이었지만 곧바로 악마한테 다가갔다. 오자마자 인상을 팍 찌푸리는 악마 상인!
[강력한 악마 앞에서 은신을 성공합니다. 은신 스킬이 오릅니다.]
[초급 은신 스킬이 중급 은신 스킬로 변합니다.]
드디어 중급을 찍은 은신 스킬. 태현의 공격 스타일은 도적 계열 직업과 은근히 비슷했다.
빠르고 현란한 움직임으로 접근하고, 스킬을 사용해서 데미지를 폭발적으로 늘리고…….
거기에 온갖 잡다한 스킬들을 추가하고 <아키서스의 화신>의 특별한 스킬들과 행운 스탯이 추가된 게 태현!
[악마적인 발상의 악마가 만든 태엽 오르골을 분해했습니다.]
[기계공학 스킬이 오릅니다.]
[악마를 속였습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숨겨진 메시지가 나타납니다.]
-크하하! 훌륭하도다. 내가 남긴 글을 믿지 않고 오르골을 분해하다니. 악마다운 재능이 있다!
악마한테 악마답다고 칭찬을 받는 태현! 칭찬인지 욕인지 구분하기 힘든 말이었다.
-재능이 있는 자는 보답을 받는 법. 에랑스 왕궁의 앞, 상점 골목으로 찾아와라. 거기에 내가 남긴 단서가 있을 테니까!
최상 난이도의 퀘스트가 중하 난이도의 퀘스트로 변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걸 모르면 대륙 곳곳을 뒤지면서 기계공학 대장장이를 붙잡고 단서를 찾아야 했을 테니까!
생각지도 못한 횡재를 한 셈이었다. 문제는…….
“이게 무슨 소리냐? 응?”
눈에서 불을 켜고 태현 쪽을 노려보는 악마 상인!
장치를 분해했을 때 이렇게 커다란 목소리가 나왔기에, 이건 숨길 수가 없었다.
순간 태현과 이다비의 시선이 빠르게 교차했다. 나쁜 짓을 할 때에는 언제나 이심전심인 둘!
‘지금 필요한 건?’
‘희생양이요!’
‘희생양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눈빛으로 대화를 끝낸 둘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케인 씨! 이러시면 어떡해요!”
“맞아, 케인! 얌전히 구경만 하라니까!”
“????”
이다비와 태현이 동시에 구박하자, 케인은 소처럼 순진한 눈망울로 둘을 쳐다보았다.
“내가…… 뭘…… 했다고…….”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