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66화
전화를 건 것은 차수한이었다.
방송국에서 요즘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후배 PD! 신선한 발상을 하는 것 때문에 배장욱의 기억에도 남아 있었다.
“선배님!”
“어, 수한아. 무슨 일이냐?”
“제가 정말 좋은 기획이 떠올랐습니다.”
“……축하한다?”
“그게 아니라, 선배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배장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니. 차수한도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뭐가 필요한데?”
“판온의 유명한 플레이어들. 그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게 선배님이잖습니까.”
배장욱은 게임 방송 관련해서 플레이어들 관리로 명성이 높았다. 일류 플레이어들을 대거 포섭해서 방송으로 데려오는 솜씨!
MBS에서 괜히 잘나가는 PD인 게 아니었다. 태현 앞에서는 헛발질을 하고 망신을 당하긴 했지만…….
“그렇지?”
“그 사람들을 좀 섭외해 주세요. 제가 생각한 게 있습니다.”
“뭘 생각해 놨는데?”
“프로게이머 팀! 판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 중 하나가 투기장이잖습니까. 예전 다른 게임의 프로 리그처럼 판온 플레이어로 구성된 프로게이머 팀을 만드는 겁니다.”
“판온 내에서? 이미 그런 시도가 있었잖아?”
단순히 유명한 플레이어들과 대다수 플레이어들로 구성된 길드가 아닌, 소수의 정예 플레이어로 구성된 프로게이머 팀.
다섯에서 열 명 사이로 구성해서, 기업의 후원을 받고, 대회에 출전해서 우승과 명성을 노리는 방식!
단지 그 대회가 다른 게임이 아니라, 판온 내의 투기장이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문제는 이게 이미 한 번 나온 적 있다는 것이었다. 판온 1에서도 투기장을 노리고 팀이 구성된 적이 있었다. 대회도 몇 번 열렸었고.
그러나 의외로 흥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하나.
밸런스 때문!
“처음에야 사람들이 좋아했지만, 다른 게임의 리그와 달리 판온 같은 건 밸런스 맞추는 게 불가능해. 레벨부터 차이 나면 게임이 일방적으로 흘러간다고.”
바로 그랬다. 나름 공평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는 다른 게임과 달리, 판온은 자신이 키운 캐릭터의 성능으로 싸우는 게임.
캐릭터의 성능이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판온 1에서도 몇몇 특급 플레이어들로 구성된 팀이 투기장에서 연속 우승을 하는 바람에 대회가 시들해진 감이 있었다.
그리고 배장욱은 아직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후후! 선배님. 제가 그걸 모를 리 없잖습니까.”
“그러면 해결 방법을 찾았다는 거야?”
“예! 남쪽 신대륙 아시죠? 거기 도시에서 새로운 투기장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거기 투기장 특성이 뭔지 아십니까?”
도시마다 투기장의 특징이 달랐다. 1:1, 2:2 같은 인원 구성부터 시작해서 맵, 지형, 속성까지…….
“뭔데?”
“투기장 안에 들어가면 레벨이 자동으로 맞춰진다는 겁니다.”
“!!”
레벨 10짜리가 들어가도 레벨 100에 해당하는 능력치가, 레벨 200짜리가 들어가도 레벨 100에 해당하는 능력치가.
완벽한 밸런스!
“어떻습니까? 이렇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벌써 아는 기업에 연락해서 이야기해 봤습니다. 후원에 꽤 긍정적이더군요.”
“녀석. 역시 너답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허락한 걸로 알겠습니다!”
“잠깐. 다 좋은데 내 소개는 왜 필요한 거지?”
“역시 리그 같은 게 처음 시작할 때는 화제성이 필요하잖습니까. 사람들은 아직 판온 1에서 프로 리그가 망한 걸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요.”
한 번 망한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판온 2의 콘텐츠는 너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새롭게 투기장을 바탕으로 프로 리그를 다시 시작합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에이 또 망하는 거 아냐?’ 하고 관심을 안 가질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철저하게 대비를 하고 규칙을 보완을 해도, 사람들의 인식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 법!
“톱 랭커들이 등장만 해주면 사람들은 일단 챙겨보게 될 겁니다. 그 뒤로는 알아서 굴러갈 거고요.”
“김태현이나 이세연을 원하는 거군.”
“역시 선배님이십니다.”
“그런데 그건 좀 무리일 거 같다. 얘기는 해보겠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
“어째서입니까?”
“김태현은 그런 데 출전할 성격이 아닌 거 같고, 이세연은 요즘 다른 곳에서 퀘스트 깨느라 바쁘더라고. 우리한테 비밀로 할 정도로 중요한 퀘스트인가 봐.”
“으음. 아쉽군요. 그 둘은 꼭 왔으면 했는데…… 어쩔 수 없죠.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화제를 끌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거기 투기장 인원이 몇이지?”
“5:5입니다.”
“5명으로 된 팀이라. 이세연은 바쁘지만 않으면 참가할지도 모르겠는데…….”
“꼭 물어봐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알겠어. 후배 부탁인데 당연히 해줘야지.”
배장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통화를 마쳤다. 역시 차수한이었다. 판온 1에서 투기장 프로 리그가 망해서 다들 건드리지 않고 있을 때, 오히려 과감하게 들어왔다.
‘예리한 생각이야. 충분히 가능성 있어.’
투기장 프로 리그가 망한 거지, 투기장은 여전히 판온의 최고 인기 콘텐츠 중 하나였다. 단점만 고치면 대박이 날 가능성이 높았다.
판타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모험을 하는 것도 좋고, 숨겨진 비밀을 찾으며 성장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가장 박진감 넘치고 흥미진진한 건 플레이어들끼리의 PVP!
‘이세연 끼고 김태현까지 끼면 초반 흥행은 확정인데 말이야. 김태현 성격에 그런 걸 안 할 거 같고…….’
뭔가 태현이 팀을 구성해서 대회에 나가는 모습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감이었지만 정확하게 짚은 배장욱!
* * *
[판타지 온라인 2, 투기장 중심으로 프로 리그 나오나?]
[MBS에서 방송을 맡기로 예정.]
[투기장에서 인기 있는 5인 팀으로 구성된 프로 리그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판온 1때와는 다르다! 달라진 판온 2의 프로 리그 특성. 무엇이 달라졌나?]
차수한은 철저했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시작은 언론 플레이부터!
출시하려면 아직 꽤 시간이 남았지만, 지금부터 이렇게 떡밥을 하나씩 하나씩 던져 놓으면 사람들의 관심은 무르익게 될 것이다.
각자 반응은 달랐지만 투기장 프로 리그가 사람들의 관심을 엄청나게 샀다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여기에도 한 명, 투기장 꿈나무가 있었다.
“드디어 투기장 붐이 왔어!! 수혁아! 내가 말했잖아!”
“어…… 응?”
정수혁은 당황한 표정으로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친구들은 인터넷 뉴스를 가리키며 환호했다.
“투기장 프로 리그! 게다가 5인 팀 형식! 우리를 위해 맞춰놓은 것이나 다름없어!”
“레벨은 괜찮아?”
“놀랍게도 레벨이 필요 없어! 정말 대단하지 않냐?!”
투기장 안에서 레벨이 평등하게 맞춰진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보통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들이 실력도 더 좋다는 것을!
정수혁의 친구, 최진혁은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여기 참가한다. 참가해서 뭔가 보여줄게! 우리 5인 팀의 실력을 보여주겠어. 김태현 선배한테도 꼭 말해줘! 우리가 여기 나간다고!”
정수혁은 순간 상상해 봤다. 태현한테 이걸 말해준다면?
-선배님. 제 친구들이 팀 짜서 프로 리그 나간다는데요.
-나보고 뭐 어쩌라고?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나올 것 같은 대답!
그러나 정수혁은 차마 친구로서 최진혁의 꿈을 꺾을 수 없었다.
“그…… 래! 말해드릴게.”
“아. 수혁아, 너도 원한다면 우리 팀에 껴도 돼.”
“5인 팀인데 자리 꽉 찼잖아?”
“하하. 아직 뭘 모르네! 원래 이런 팀은 한두 명 정도 인원 더 데리고 있잖아. 상대방 조합이나 투기장 맵에 따라서 바꿀 수 있도록. 어쨌든 너라면 무조건 환영이야!”
“그, 그래. 고맙다.”
정수혁은 솔직히 친구들이 그 쟁쟁한 플레이어들을 뚫고 본선으로 나갈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레벨 제한이 없다는 건 다시 말해서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이 몰려온다는 것 아닌가.
* * *
[기계공학 대장장이 모집.]
[기계공학으로 서러운 당신, 모여라! 뭉치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판온 게시판에서 이상한 글이 보였다. 기계공학 플레이어를 모으는 글이었다.
실제로 글을 보면 반응은 냉정했다.
-작성자 바보임? 기계공학 플레이어를 왜 모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잖아.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지만 기계공학 플레이어들은 모으면 두 배로 터지지 않냐?
-저거 찾아가면 분명 납치된다. 무서운 형님들이 칼 들고 아이템 내놓으라고 협박할 듯.
정말 바닥까지 추락한 기계공학의 이미지!
태현이 기계공학으로 대박을 쳤는데도 이 정도로 추락하다니. 그동안 기계공학 플레이어들이 얼마나 사고를 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냉정한 리플에도 상관없이, 사람들은 모였다.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은 더 이상 잃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쪽이 켄 님이신가요?”
“안녕하세요. 저는 장입니다.”
서로 만나자마자 악수하는 기계공학 플레이어들. 그들의 악수는 뜨거웠다.
<김태현한테 당한 피해자>모임이 뜨거운 우정을 갖고 있듯이, 기계공학 플레이어들도 보자마자 서로 격하게 우정을 느꼈다.
같은 똥캐를 키우는…… 아니, 같이 험한 길을 걷는 동지 아닌가!
“안녕하십니까. 제가 이번 모임을 만든 가브리엘입니다.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그동안 얼마나 많이 무시를 당하셨습니까?”
“크흐흐흑!”
가브리엘의 한마디에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
대장장이들은 모두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만큼 기계공학 스킬로 인해 서러움을 많이 겪었던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기계공학 스킬을 무시합니다. 저희의 아이템을 사주지도 않고, 저희를 파티에 껴 주지도 않으려고 하죠.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우리끼리 힘을 뭉치자!”
“그런데 어떻게 우리끼리 뭉치죠? 사줄 사람이 없잖아요.”
“제작 직업이라고 꼭 안에만 있어야 합니까? 필드에 나가서 사냥을 합시다!”
“?!”
가브리엘의 말에 사람들은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제작 직업으로 사냥을 하는 건 상식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대장장이는 그렇게 약한 직업이 아닙니다. 힘 스탯도 괜찮고, 나름 체력도 괜찮잖습니까. 스킬이 부족하다지만 여럿이 뭉쳐서 도와주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거기에다가 우리에게는 기계공학 스킬이 있습니다! 폭탄 데미지도 우리한테는 좀 덜 들어가잖습니까.”
“그, 그렇지만…… 사냥은 좀…….”
“맞아. 다른 제작 직업들이 왜 사냥을 안 하겠어? 이유가 있으니까 안 하는 거 아냐?”
가브리엘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이 방법을 김태현 플레이어한테 직접 들었습니다!”
“!!”
대장장이들은 깜짝 놀랐다. 현재 기계공학 스킬을 올리고 있는 플레이어 중에서 가장 앞선 플레이어는 누가 뭐라고 해도 태현이었다.
그런 태현이 말했다고?
“김태현 플레이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계공학 플레이어들끼리 뭉치라고. 뭉쳐서 사냥을 하고, 적을 쓰러뜨리고, 스킬을 성장시키라고. 그리고 우리를 무시한 놈들을 밟아버리라고!”
뒤의 말은 태현이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가브리엘은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었으니까!
“여러분! 해봅시다! 우리를 무시한 놈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줍시다!”
“오오!”
기계공학 플레이어들의 모임은 점점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불태우자! 몬스터들을!”
“박살 내자! 우릴 무시한 놈들을!”
“크고 강한 폭탄으로!”
누가 옆에서 봤다면 신고했을 정도로 위험한 분위기의 모임!
그러나 그들은 진지했다. 가브리엘과 함께, 그들은 바깥으로 나가 사냥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