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65화
차 안에서 배장욱은 초조한 마음으로 담배를 뻑뻑 물어댔다. 이미 늦었으면 어떡하지?
“김태현이 뭐 좋아하지?”
“게임 좋아하지 않나요?”
“…….”
“죄, 죄송합니다.”
“됐다. 이런 놈을 데리고 있는 내 잘못이지.”
배장욱의 말에 부하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 선물 세트 어떻습니까? 저희 방송사에서 돌리는 그 세트…….”
“너무 평범하고 흔하잖아. 아, 진짜. 내가 너무 안일했어. 평소에 ‘사람이 전부다’라고 말은 잘 했지 제대로 관리를 했어야 했는데. 김태현이 뭘 좋아하는지도 파악을 안 해놨잖아. 안 그래?”
“그, 그런…… 괜찮으실 겁니다. 김태현이 다른 곳하고 계약을 맺은 게 확실하지도 않잖습니까.”
“아냐! 했을 거야! 했을 거 같아!”
처음에 했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김칫국까지 원샷하고 있는 배장욱!
“김태현이 뭘 좋아하나…….”
“저, 부장님. 가장 좋은 건 역시 현금이 제일 아닐까요?”
“응? 뒷돈을 주자고?”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선물보다는 지금 한 계약의 조건을 좀 올려주면…….”
“지금 김태현 조건은 우리랑 계약한 플레이어 중에서도 특급 계약인데? 김태현보다 더 계약 조건 좋은 사람은 독점 계약을 맺은 사람밖에 없…… 아니, 아니다. 내가 멍청한 소리를 했군.”
배장욱은 머리를 흔들면서 부하 직원을 칭찬했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태현을 뺏기면, 태현과 관련된 프로그램은 전부 날아가는 것이다.
“맞는 말이야. 어설픈 선물 세트 같은 건 의미도 없지. 김태현은 그런 거 좋아하지도 않잖아.”
“그러게요. 별로 욕심도 없어 보였고요.”
“젊은 친구가 왜 이렇게 욕심이 없을까?”
정답은 필요한 건 다 갖고 있어서!
“가자마자 최대로 제안을 해야겠어. 해줄 수 있는 조건은 전부.”
“저, 부장님. 제가 말하기는 했지만……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다른 플레이어들이 알게 되면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텐데요.”
“비밀을 지켜달라고 하면 되지. 김태현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사람은 아니니까.”
“지금 김태현이 집에 있나요?”
“도착해서 연락한 다음 없으면 기다리자.”
‘내가 이렇게 성의를 보이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애쓰는 배장욱이었다.
물론 태현은 그런 걸 눈치채지도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집 주소가 여기였는데…… 다 왔습니다. 헉, 집 엄청 좋은데요?”
“잘사는 집 같기는 했는데 이건 좀…….”
배장욱도 놀라서 입을 벌렸다. 이 주변 자체도 꽤 부자들이 많은 동네였는데, 거기에서도 보기 드문 저택이었다.
‘얼마나 잘사는 거야?’
* * *
“??”
갑자기 온 전화에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잘 지내셨습니까! 뵙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아, 그래요? 뭐 어디서 만나실래요?”
“집 앞입니다.”
“?!”
태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정문으로 향했다. 배장욱이 무슨 일로 여기에 왔단 말인가?
문이 열리자 배장욱과 부하 직원이 결연하고 각오를 다진 얼굴로 안으로 들어왔다.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
“평소에 언제나 ‘사람이 전부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제가 조금 자만했나 봅니다.”
“??”
“언제라도 지금 위치가 흔들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태하게 행동한 것, 부끄러울 뿐입니다. 하지만 태현 씨!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한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를 주십시오!”
배장욱의 열정 넘치는 호소에, 부하 직원도 같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SBC가 큰 방송국이기는 하지만 저희도 결코 지지 않습니다. 저희가 이제까지 방송으로 실망시켜 드렸던 적이 없었잖습니까!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
태현은 이 아저씨들이 술을 먹었나 싶었다. 왜 갑자기 찾아와서 이 난리지?
“아니, 뭔…….”
‘아니, 뭔’까지만 들었는데도 배장욱의 머리에서는 경고가 들었다. 이건 분명 부정적인 반응!
“새로 준비해 온 계약서입니다. 이걸 봐주십시오. 이것 하나는 확실히 보장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번 계약서는 저희와 계약한 플레이어 중에서 최고 대우라는 걸 말입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태현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이 아저씨들 왜 이러나’ 싶었기에 이런 거였지만, 배장욱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절망 그 자체!
‘아, 이미 늦었나!’
배장욱은 쓰린 마음을 달래며 일어설 준비를 했다. 이미 늦어버린 상황.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최소한 더 이상 나쁜 이미지는 두고 가지 말자!
‘배미나, 두고 보자. 네가 방심해서 실수하는 순간 나도 역습을 가할 테니까!’
그 순간 계단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재에서 내려오는 김태산의 목소리였다.
“음? 이분은 누구시지?”
“!”
“보아하니…… 방송국 사람이신가? 맞나? 표정 보니 맞군. 태현이 이놈. 내 방송 보고 위기의식 느낀 건 아니겠지? 하하하!”
“아버지, 뭔 소리세요?”
“??”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태현의 반응에 김태산은 설마 싶었다. 설마, 설마…….
“너 내가 나온 방송 안 봤냐?!”
“방송 나오셨습니까?”
“이 자식이…… 왜 이렇게 관심이 없는 거야!”
“아니, 말도 안 하셔놓고 뭐라는 겁니까! 전 제가 나오는 방송도 안 보는데!”
배장욱이 있는 건 잊어버리고 아웅거리는 부자!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배장욱은 순간 혼란스러워지는 걸 느꼈다.
-배미나가 김태산을 섭외했다.
-배미나가 김태산을 꼬드겨서 김태현도 섭외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된 게 아니었나? 왜 김태현은 모르고 있는 거지?’
배장욱은 뭔가 섬뜩한 깨달음이 달려오는 걸 느꼈다. 설마, 설마…….
“혹시…… 김태현 씨가 SBC로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김태산 씨하고 같이 가는 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김태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태현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아. 왜 이렇게 찾아오셨나 했더니…….”
순식간에 붉어지는 배장욱의 얼굴!
‘수치스러워서 죽을 거 같다!’
태현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자기 혼자서 오해하고 난리를 친 것이다. 배장욱은 고개를 푹 숙였다.
태현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계약서를 챙겼다.
“제가 MBS에 불만이 있으면 말을 했겠죠. 어쨌든 이렇게 배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크윽…… 태현 씨. 그거 조건 밖으로 유출하시면 안 됩니다.”
“그 정도야 당연하죠.”
둘의 대화를 듣던 김태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뭐야, 설마 내가 태현이를 꼬드겨서 SBC로 데리고 갈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사람을 뭐로 보고?”
“죄, 죄송합니다.”
“애초에 내가 SBC 제안을 왜 받았는데…… 에잉.”
김태산이 투덜거리는 동안 태현이 배장욱에게 물었다.
“근데 왜 그런 걱정을 하신 겁니까? 아버지가 방송에 나온 거 때문에?”
“아, 아니요. 그것도 있긴 한데…… 저번 방송은 저희한테 안 주시고, <파워 워리어> 길드 개인 방송을 통해 오스턴 왕국 퀘스트도 처리하셔서…….”
“그거 편집 많이 해야 할 거 같아서 그냥 그 부분만 공개했는데요. 굳이 방송국 사람들 일 시키기 싫어서.”
‘그런 배려는 필요 없어!!!’
배장욱은 속으로 절규했다. 그냥 주면 야근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알아서 잘 편집해서 비밀스러운 내용은 자르고 재밌게 잘 만들었을 텐데!
옆에서 김태산이 피식 웃었다.
“저놈이 저런 놈이라니까. 그래. 오셨으니 잘 이야기하고 가시게.”
“아, 아버지. 오신 김에 다 같이 보죠.”
“뭘 다 같이 봐?”
“아버지 나온 방송이요.”
“나, 나는 됐다. 난 봤어.”
“에이, 그래도 가족 모두가 모여서 보는 게 있죠.”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가족 행사를 좋아했다고 이러는 거야!”
“에헤이. 에헤이.”
김태산을 붙잡고 소파에 끌어들이는 태현! 태현은 빠르게 TV를 켜 김태산이 나온 방송을 찾았다.
그러자 나오는 방송!
졸지에 배장욱과 부하 직원은 김태산의 저택에서 태현과 같이 방송을 다시 보게 되었다.
“…….”
그리고 방송 내용은 누가 봐도 팔불출 아버지가 아들 자랑하며 투덜거리는 내용!
“놔! 인마! 놔!”
“아버지…… 제 칭찬을 그렇게 하고 싶으셨…….”
“아니라니까! 저거 저기서 이상하게 끊었어!”
김태산은 울컥해서 태현을 밀쳐내고 일어섰다. 괜히 내려왔다가 본전도 못 찾은 꼴!
“아. 맞다. 태현이 너, 시간 좀 내라.”
“예? 왜요?”
“친구 생일잔치 좀 같이 가려고.”
“아버지 친구분이시면…… 성규 아저씨? 잠깐, 생일 되려면 멀었는데.”
“아냐.”
“원준 아저씨?”
“아냐.”
“청식 아저씨? 연환 아저씨?”
“네가 모르는 친구야.”
“아버지한테 제가 모르는 친구분도 있었어요?”
친구 적은 것도 부전자전!
김태산은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집에는 모르는 사람 두 명이 와 있는 상황 아닌가.
그들 앞에서도 체면을 잃을 수는 없다!
“네…… 가 내 친구들을 다 아는 건 아니잖아……?”
“이상하네. 아버지 친구분들이 제가 모를 정도로 많지 않은데.”
배장욱은 곤란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태산은 울컥했지만 참아야 했다. 유성수의 생일에 태현을 데리고 가려면 지금 싸워서는 안 됐으니까.
“새로 생긴 친구다. 됐냐! 인마!”
“아. 그러면 이해가 가네요. 그런데 저는 왜요?”
“보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가는 거지.”
“전 또 데리고 가서 자식 자랑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네요.”
“이런 건방진 자식…… 너만큼 잘난 놈들은 수두룩해!”
“음. 제가 대학 들어가고 나서 아버지가 저 데리고 친구분들한테 돌아다니면서 자식 자랑 순회공연 하셨던 게 아직도 기억에…….”
“그,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이번에 갈 곳은 네 스펙은 기본 스펙이야, 기본!”
“뭐 어디를 데리고 가시길래?”
‘아차!’
김태산은 아차 싶었다. 배배 꼬인 태현의 성격상, 지금 갈 곳을 제대로 말해주면 안 간다고 뻗댈 가능성이 있었다.
“그…… 그러니까 겸손하란 거지.”
“전 충분히 겸손한데…… 어쨌든 알겠습니다.”
태현은 일어서서 배장욱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돌아가는 배장욱을 마중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태현 씨, 지금은 어디 계십니까?”
“마계요.”
“네?”
“마계 떨어졌어요.”
덥석!
배장욱이 태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걸 보자 태현은 판온에서 물귀신 작전을 썼던 게 떠올랐다.
‘손 잡는 게 유행인가?’
“……제발 이번에는 그냥 바로! 방송을 주십시오! 저희가 다 편집한 다음에 방송용 영상을 보낼 테니까 그거 한 번 보시고 뭐 뺄지 말하면 처음부터 다시 편집할 테니까! 제발! 좀!”
배장욱의 모습에서는 절박함이 엿보였다. 태현은 순간 구성욱이 떠올랐다. 구성욱이 ‘차가운 울음의 검’을 달라고 했을 때 이런 모습이었던 것 같았다.
“네, 그러도록 하죠.”
‘예쓰!!’
배장욱은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차 안에서, 배장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난리를 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화위복이다.”
“맞는 말이십니다.”
“그보다 마계라니…… 진짜 김태현은 상상을 초월하는군. 현재 마계에 간 적 있는 플레이어가 얼마나 있지?”
“사고로 갔다가 바로 죽은 플레이어는 있지만 거기서 꾸준히 버틴 플레이어는 없을걸요?”
“그래. 아주 좋아!”
배장욱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배미나의 마수(?)도 없는 게 확인되었고, 태현도 영상을 주겠다고 했으니…….
우우웅- 우우웅-
“전화 왔는데요.”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