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57화
태현이 없는 사이, 자기의 기사단을 이끌고 태현의 영지를 지켜준 아농 백작.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마르덴 후작을 쓰러뜨리면서 얻은 피 같은 공적치 포인트를 사용해서 부탁한 것이다.
당연히 태현은 최대한 본전을 뽑기 위해, 돌아와서도 아농 백작을 만나지 않고 끝까지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잔 수작에는 한계가 있는 법. 떠나려는 태현을 막아서고 아농 백작이 찾아왔다.
“교단에서 부탁했단 말입니까?”
“나는 정말로 하기 싫지만, 교단들이 부탁하니 어쩔 수 없지…….”
“아닙니다! 김태현 백작님처럼 용감하시고 정의로우신 분이 어떻게 그런 부탁을 거절하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없는 사이 내 영지는…….”
태현은 힐끗 아농 백작을 쳐다보았다.
공적치 포인트가 없으면, 아무리 친밀도가 높고 사이가 좋아도 이런 부탁은 불가능했다.
기사단을 부려먹는 일인데, 어떻게 공짜로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태현에게는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
고급을 찍은 화술 스킬.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마법의 혀!
[고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불가능한 설득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습니다.]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김태현 백작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오오! 아농 백작!”
순진한 아농 백작은 태현의 속셈도 모르고 홀랑 넘어갔다.
이걸로 또 한동안 영지 경비는 문제없음!
* * *
아탈리 왕국의 제노마 시.
태현에게는 추억이 있는 도시였다.
아탈리 왕국에 처음 왔을 때 순진한 플레이어들을 꼬드겨서 섬으로 데리고 가, 짭짤하게 남겨 먹었던 추억!
그리고 지금, 제노마 시의 항구에는 거대한 함선들이 정착해 있었다.
함선들의 위에는 각 교단의 깃발이 펄럭거렸다.
“뭐야, 뭐야?”
“퀘스트 있나 본데?”
항구 주변에서 각자의 일을 하던 플레이어들은 갑자기 나타난 함선들을 보고 수군거렸다.
대박 퀘스트를 보면 참가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
게다가 제노마 시에는 전설이 있었다.
광장에서 별생각 없이 있다가 태현이 불렀을 때 참가했던 플레이어들!
물론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행복하고 좋았던 기억은 아니었지만,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하고 싶다!
저 사람하고 나하고 딱히 다른 것도 없는데, 나도 운만 좋으면!
“아저씨가 진짜 김태현하고 친해요?”
“아, 진짜라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여기 영상 봐! 영상 끝에 나 있잖아!”
우정식은 벌컥 화를 내며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은 의심을 풀지 않았다.
“합성 아닌가?”
“작아서 안 보이는데…….”
“나 참, 미치겠네! 이걸 어떻게 합성을 해!”
우정식이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화를 내자, 플레이어들은 어쩔 수 없이 믿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김태현하고 친하면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야, 내 직업이 뭐냐? 대장장이잖아. 대장장이가 계속 같이 돌아다니면 뭐해. 나도 내 스킬 올리고 레벨업 해야지!”
우정식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김지산, 박성찬과 같이 태현과 갈라지고 나서, 그들은 아쉬움을 삼키고 도시로 돌아왔다.
그들도 직업 관련 퀘스트를 깨고 도시 내에서 평판을 올려야 하니까!
제노마 시는 제작 직업 플레이어들이 많았고, 매일 치열하게 경쟁이 벌어졌다.
그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차별화가 필수!
김태현과 같이 다녔던 대장장이. 이거 하나면 충분했다. 이거 하나면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잘 안 믿어준다는 것!
“김태현하고 같이 다녔으면 기계공학 할 줄 알아요?”
“아니…….”
“에이, 거짓말인가 봐.”
“야! 기계공학을 왜 배워! 그 쓰레기 스킬을!”
“김태현은 잘 쓰던데요.”
“그건 그놈이 이상한 거고! 지금 대장장이들 봐라! 기계공학 파는 놈이 있나!”
우정식은 일어서서 광장 구석을 가리켰다. 광장 구석에는 거지꼴로 앉아 있는 대장장이 몇 명이 있었다.
그들 앞에는 <기계공학 전문 대장장이. 기계공학 관련은 뭐든지 합니다. 환상의 기계공학 쇼!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적혀 있는 팻말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다. 가끔가다 할 일 없고 심심한 플레이어 몇 명이 <태엽으로 돌아가는 작은 인형> 같은 무해하고 안전한 아이템을 사는 게 전부!
그랬다.
태현이 활약한 다음 기계공학 스킬에 반짝 붐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반짝 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기계공학의 실체가 드러나자, 사람들은 기계공학 스킬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뭐만 하면 폭발!
뭐만 하면 오작동!
아무리 기계공학 스킬이 대장장이 기술로 만들 수 없는 독특하고 다양한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지만, 길 가다가 갑자기 폭발해 버리는 아이템을 살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곤란해진 건 태현만 보고 기계공학 스킬을 파기 시작한 대장장이들이었다.
어떻게든 아이템을 만들어서 사람들한테 팔고, 그걸로 다시 골드를 벌어서 또 아이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이템을 사주는 사람이 없는 것!
덕분에 <기계공학 스킬 전공 플레이어>는 <거지>나 다름없는 단어가 되었다.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어두운 분위기가 풀풀!
“음…… 확실히…….”
우정식의 말을 들은 플레이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기계공학 스킬의 악명은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기계공학 스킬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김태현이니까 기계공학 스킬을 활용할 수 있었던 거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있었다.
“기계공학 스킬이 좀 쓰레기기는 하지.”
“그치? 기계공학 배우는 놈들은 다 변태밖에 없잖아.”
기계공학 파는 플레이어들이 들으면 목덜미를 잡을 소리!
더 슬픈 건 반박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할까?”
“김태현하고 아는 사이니까 좀 낫겠지.”
두 사람은 의심을 멈추고 우정식에게 장비를 건넸다. 우정식은 한숨을 쉬었다. 수리 한 번 하기 정말 힘든 세상이었다.
“최선을 다해서 수리해 주지. 믿어보라고.”
우정식은 망치를 들었다. 수리는 대장장이에게 기초 중의 기초 스킬이었다.
그러나 그런 스킬이야말로 대장장이의 실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
허접한 대장장이는 쉬운 난이도의 아이템을 수리해도 총 내구도를 깎아 먹지만, 뛰어난 대장장이는 단순히 수리 스킬만 써도 버프 효과까지 추가시켰다.
그리고 우정식은 나름 괜찮은 대장장이였다. 두 플레이어가 내민 갑옷도 그렇게까지 고렙 아이템도 아니었고.
‘쉽군.’
이 정도면 무난하게 완벽한 수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정식은 망치를 높게 들었다.
[수리를 시작합니다.]
“좋아, 간…….”
“김태현이 왔다!!!”
삐끗-
땅!
[수리에 실패했습니다. 아이템의 내구도가 하락합니다.]
“방금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났는데?”
장비를 맡긴 플레이어들이 빤히 우정식을 쳐다보았다. 우정식은 최대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원, 원래 수리할 때 이런 소리가 난다고.”
“아닌 거 같은데…….”
“수리하고 나서 보면 되잖아!”
의심의 눈빛을 풀지 않는 플레이어들! 우정식은 등에서 땀이 나는 걸 느꼈다.
다행히 아이템의 총 내구도는 내려가지 않았다. 내려간 내구도는 다시 제대로 수리해서 올리면 됐다.
땅, 땅, 땅-
[수리에 성공했습니다. 아이템의 내구도가 올라갑니다.]
[수리에 성공했습니다. 아이템의 내구도가 올라갑니다.]
‘그런데 김태현이 왔다고? 무슨 일이지?’
여유가 생긴 우정식은 속으로 궁금해했다. 태현이 하는 퀘스트들은 너무 어마어마해서 이제 그가 참가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궁금한 게 사람 마음!
* * *
“김태현이다!”
“저기 케인도 있어! 저 무표정하게 근엄한 거 봐! 멋지지 않냐?”
“저건 누구야?”
“파워 워리어 길마, 이다비다!”
“우우! 파워 워리어! 죽어라! 우우!”
“흥! 너희들도 파워 워리어에 들어와라! 두 번 들어와라!”
제노마 시의 성문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멀리서 다가오는 태현 일행을 본 플레이어들 덕분에 소문이 빠르게 퍼진 것이다.
“저건 데메르 교단 사제 같은데? 딱 봐도 레벨 높아 보이는 고위 사제야.”
“김태현이면 데메르 교단하고 같이 퀘스트 해도 이상할 거 없잖아. 아키서스 교단 부활시켰는데.”
“아니…… 그러면 사이 안 좋지 않나?”
“저기 옆에 있는 건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저건 <검은 바위단>이네.”
구경하는 플레이어 중에서 눈이 좋은 플레이어가 있었다.
“검은 바위단?”
“소수정예 길드. 랭커도 꽤 있고 실력 괜찮은 길드일걸.”
“과연. 김태현하고 같이 다닐 정도라 이건가.”
구경하는 플레이어들이 떠드는 사이, 태현은 멈추지 않고 사제들과 함께 이동했다.
도시 안으로 들어오자 바로 마중 나오는 데메르 성기사들!
빛나는 갑옷과 투구, 잘 연마된 롱소드. 겉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강하다는 게 느껴지는 데메르 성기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셔가는 태현!
그냥 이 장면만 올려도 사람들의 관심이 그냥 쏟아질 그럴듯한 장면이었다.
“태현 님!”
“……?”
이 위압감 넘치는 상황에서 감히 태현의 이름을 부르면서 뛰쳐나오다니.
자리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모두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놈이 감히 나대는 거야? 나도 가만히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태현은 갑자기 나타난 플레이어의 모습을 곧바로 알아봤다. 저 특유의 복장은 대장장이 직업이었다. 게다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화약 주머니는…….
“기계공학?”
“헉! 알아보셨군요! 맞습니다! 저도 기계공학을 파고 있는 대장장이입니다!”
“근데 왜 길을 막지?”
“저, 그게…… 기계공학을 배우는 데 너무 힘이 들어서…… 혹시 조언이라도 해주실 수 없나 해서…….”
보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피식 웃었다.
김태현 정도 되는 플레이어가 저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대뜸 도와달라고 하는 초보자한테 친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루에 만나는 초보자만 해도 수십 명이 넘을 텐데, 그 초보자들의 부탁을 일일이 다 들어준다면…….
까딱까딱-
“?!”
“이리로 오라고.”
태현은 손가락으로 플레이어한테 오라고 신호했다.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태현은 게임을 못하는 사람에게 약했다. 그중에서 못하는 데도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약했다.
골드나 아이템을 달라고 구걸하는 게 아닌, 조언을 달라고 했던 게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래, 기계공학을 올리는 데 뭐가 힘든데?”
“일단 기계공학 아이템을 만드는데 오작동 확률이 너무 높아요…… 이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습니다. 태현 님은 이걸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정답은 행운! 더럽게 높은 행운!
문제는 다른 사람들은 이 방법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계공학 스킬을 올리면 좀 나아지겠지만, 그때까지는 어쩔 수 없지. 대신 발상을 바꿔 봐.”
“예? 발상이요?”
“꼭 기계공학으로 아이템 만들어서 팔아야지 스킬을 올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기계공학 아이템으로 사냥을 해. 그것도 방법 중 하나지.”
“하지만 저는 대장장이고 제작 직업인데…….”
“대장장이는 싸우면 안 되냐? 대장장이가 공격 스킬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스탯만 보면 은근히 튼튼해. 나가서 몇 대 맞아주면서 싸우라고. 그리고 거기서 끝내지 마. 최대한 더 활용을 해봐.”
“??”
“기계공학 아이템은 불안정하지. 그렇지만 단점에 매달릴 필요는 없어. 장점을 써먹어야지. 기계공학의 장점이 뭐야. 다양한 유틸성과 화력 아니야? 적을 상대할 때 이만한 게 어디 있겠어?”
“아……!”
태현에게 조언을 구한 플레이어는 뭔가 깨달은 표정이었다. 태현도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은 상상도 못 했다. 이 순진무구한 플레이어가 판타지 온라인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 기계공학 빌런이 될 거라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