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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될놈이다-256화 (256/1,826)

§ 나는 될놈이다 256화

그러나 입을 열어서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런 감동을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좋은 남자는 좋은 친구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요즘은 친구 구하기 힘든 세상이지. 난 자네하고 여기서 골프를 친 게 전부지만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예?”

“친구라고 하기에는 나이 차이가 너무 나지?”

“아닙니다! 합시다, 친구!”

김태산은 덥석 노인의 손을 잡았다. 노인은 다시 크크큭 웃어댔다.

“사람 참 화끈해서 좋군.”

“어르신께서 절 화끈하게 만드셨습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그리고 날 너무 공손하게 대할 필요는 없네.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대충 알아.”

노인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빛으로 김태산을 쳐다보았다.

“꼿꼿한 떡갈나무 같은 사람이지. 나한테 공손하게 대하는 건 내가 늙은 사람이라 그런 것 같은데, 다른 노약자한테 하는 것처럼 나한테 그럴 필요는 없네.”

“제가 어르신에게 공손하게 대한 건 어르신께서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셔서입니다.”

“사람 참, 부끄럽게 만드는군. 어쨌든 자네가 골프장에 발길을 끊을까 봐 걱정했네. 이렇게 보게 되어서 기쁘군. 앞으로 골프장은 오지 않더라도 친구가 됐으니 종종 연락하게. 여기 내 명함이야.”

김태산은 노인의 명함을 받았다. 명함에는 아무것도 없이 ‘유성수’라고만 쓰여 있었다.

노인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김태산을 쳐다보았다.

“뭐 떠오르는 거 없나?”

“음, 성수는 데메르 교단 성수가 최고인데…….”

“……뭐라고?”

“죄송합니다.”

김태산이 곰처럼 머리를 긁적거리자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쯧쯧. 날 이렇게 못 알아본다는 걸 알면 내 아들놈이 기겁할 거야.”

“모르는 걸 어떡합니까?”

김태산은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유성수에서 수를 빼보게.”

“유성이 되네요.”

“뭐 떠오르는 거 없나?”

“제 아들놈 장비 이름이 유성…….”

“…….”

“크흠.”

“후. 유성그룹. 뭐 떠오르는 거 없나?”

“아, 유성그룹! 그 이번에 과징금 물은…….”

“그, 그거는 내 아들놈 잘못이네.”

“회장님이셨습니까?!”

“이제야 알아보는군. 나 참,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구만.”

* * *

노인, 아니, 유 회장은 김태산과 같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모시려고 몰려왔지만 유 회장이 손짓하자 옆으로 물러섰다.

“어쩐지 범상치 않다 싶었습니다.”

“말은 잘하는군. 이름 알려줘도 못 깨달은 주제에.”

“그, 그건 어쩔 수 없었던…… 제가 요즘 관심이 없어서…… 그래도 과징금 뉴스는 떠올렸잖습니까.”

“왜 하필 그딴 걸 떠올리나! 그리고 내 아들놈 잘못이라고 했을 텐데!”

잠시 씩씩대던 유 회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자네, 앞으로 골프장은 언제 오나?”

“앞으로 한동안은 안 올 것 같습니다만…….”

“뭐야, 무슨 일인가? 혹시 다른 재밌는 취미라도 찾은 건가?”

김태산이 골프 좋아하는 건 유 회장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골프장에 안 온다니.

“네. 판타지 온라인 2라고 아십니까?”

“게임이군. 뉴스에서 이름만 들어봤네. 애들 하는 거 아닌가?”

“어른들도 많이 합니다. 저도 하고,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합니다.”

“그래?”

유 회장은 별로 관심 없는 표정이었다.

“어르신도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됐네. 난 그런 이상한 게임보다 낚시가 좋아.”

“어르신께서 가상현실 게임은 해본 적이 없으시잖습니까?”

“그건 현실이 아쉬운 놈이나 하는 거지. 내가 뭐하러 그런 캡슐에 들어가야 하나?”

“어르신. 가상현실 게임은 현실을 대체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걸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김태산은 진지하게 말했다. 게임 폐인으로서 성격이 나온 것이다.

“으음…….”

김태산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유 회장도 살짝 흔들린 표정이었다.

“어르신, 현실에서 낚시는 한계가 있지만 판타지 온라인 2에서 낚시는 한계가 없습니다. 저 높은 하늘을 날아가며 새를 낚시해 본 적 있으십니까? 저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괴물을 낚시해 본 적 있으십니까?”

“……새야 그렇다 쳐도 괴물을 낚시하고 싶지는 않은데…….”

“정말 색다른 경험입니다. 판타지 온라인 2는 지금 가능한 최고 기술이고, 어르신도 한번 해보시면 정말 빠져드실 겁니다.”

“그, 그래.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한번 생각해 보지.”

유 회장은 김태산의 박력에 밀려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 보니 손녀가 집에서 하고 있었는데.”

“애들한테도 인기가 좋으니까요.”

“선머슴 같은 애였는데 요즘 좀 이상해졌어.”

“예? 뭐가 말입니까?”

“안 읽던 잡지를 읽고, 이것저것 옷을 사더군.”

“……보통 그 나잇대 여자애면 다들 그러지 않습니까?”

“내 손녀가 원래는 안 그랬으니까 그렇지.”

“연애라도 하는 거 아닙니까?”

“으음…… 어떤 같잖은 놈팡이하고…….”

유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김태산은 속으로 웃었다. 자식 둔 부모의 마음은 다 같은 모양이었다.

“근데 연애는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예?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경호원을 시켜 지수를 따라다니게 했네.”

“…….”

어이없는 소리를 당당하게 말하는 유 회장!

“그런데 만나는 놈은 없더군.”

“그러면 짝사랑이라도 하는 거 아닙니까?”

“뭐?! 어떤 같잖은 놈이 감히 내 손녀를 마음고생 시킨다는 건가?!”

“그,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원래 어쩔 수 없잖습니까.”

“끄으으으응…….”

유 회장은 정말 싫다는 표정이었다.

“어떤 놈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너무 몰아세우지 마십시오.”

“자네 딸 없다고 이러나?!”

“괜히 그러다가 손녀분이 화낼 수도 있잖습니까.”

김태산의 말에 유 회장은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그랬다.

“어쨌든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한번 들어가는 보겠네.”

“어르신! 친추 하시죠!”

“뭐? 친추? 그게 뭔가?”

“친구 추가 말입니다.”

“……꼭 줄여서 말해야 하나?”

“하하. 요즘 신세대는 그렇게 합니다.”

“거, 사람 참…… 알겠네. 그렇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 말게나. 나는 현실에서 하는 낚시가 좋단 말일세.”

“하하. 어르신도 분명 푹 빠지실 겁니다.”

김태산은 그렇게 말하며 유 회장을 배웅하려고 했다. 그 순간, 유 회장은 뭔가 떠올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잊을 뻔했군. 다음 달이 내 생일이네.”

“생신 축하드립니다?”

“다음 달이라고 했잖나. 내 지위가 지위다 보니 기념을 안 할 수가 없지.”

“소규모로 하시죠.”

“소규모로 해도 어쩔 수 없이 규모가 생겨. 자네가 내 입장이 되어보게.”

“골치 아플 것 같아서 싫습니다.”

“말하는 것 하고는…… 어쨌든 오게. 올 수 있지?”

“당연히 가야죠. 친구의 생일인데.”

유 회장은 김태산의 말에 씩 웃었다. 방금 김태산이 한 말이 정말로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역시.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어. 그래. 자네 같은 친구라도 있어야 내가 좀 덜 심심해지지. 아, 아들놈이 있다고 했나?”

“예? 예.”

“아들놈도 데리고 오게. 얼굴 한번 보고 싶군.”

“별로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지 않습니다만…….”

“자네가 아들 아끼는 게 자네 얼굴에 다 보여. 자네 아들에, 자네가 아낀다면 괜찮은 친구겠지. 그런 남자는 알고 지낼수록 좋지 않겠나.”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크크크. 걱정 말게나. 그리고 자네야 욕심이 없지만, 자네 아들은 욕심이 있을 수 있잖나. 앞으로 살아가면서 사업을 하든, 뭘 하든, 내 집에서 만날 수 있는 인맥은 무조건 도움이 될 거야.”

“어르신, 제 아들은 저보다도 욕심이 없는 놈입니다.”

“……어쨌든 데리고 오게나!”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 * *

“근데 넌 왜 날 따라오냐?”

“네? 저희 길드원이야 그렇다 쳐도 저는 괜찮아요. 발목 안 잡을 정도는 되니까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퀘스트 실패할 경우 괜히 사망 페널티 받으니까 하는 소리인데…….”

이다비는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한테 일을 맡겨놓고, 태현을 따라오고 있었다.

태현이 분명히 ‘이거 위험한 퀘스트고, 여차하다 싶으면 난 그냥 내 행운으로 회피하면서 다른 교단 놈들 버리고 튈 거다’라고 말했는데도!

“괜찮아요. 괜찮아. 한 번 죽을 수도 있지.”

“……?”

“그보다 태현 씨 혼자 보내는 게 더 그렇지 않나요. 그런 위험한 퀘스트에!”

“그건 좀 감동적…… 아니지.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

“너 돈 때문에 이러는 거지?”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이다비!

“아, 아니에요. 우리 사이는 그런 골드 때문에 같이 하는 사이가 아니잖아요. 그런 오해를 하니까 좀 슬픈…….”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인데 그러면.”

태현은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소리!

“난 분명히 말했다? 튀어야 할 상황이면 내 목숨부터 챙긴다고.”

“괜찮아요. 사망 페널티 한 번 정도는.”

‘뭔가 있나 보군.’

이다비의 태도에서 태현은 무언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태현이 아키서스 교단을 부활시키고 사기 스킬인 <부활>을 얻었듯이, 이다비도 숨겨진 스킬을 갖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사망 페널티를 줄여주거나, 없애거나, 그런 부류의 스킬이 분명했다.

‘저 직업도 참 웃기는 직업인데…….’

이다비의 상인 직업을 생각하던 태현은 갑자기 슬퍼졌다. <아키서스의 화신>을 가진 태현이 남 비웃을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 같이 가자. 혼자보다는 둘이 낫겠지.”

“……나는 안 보이냐 이 자식들아?”

뒤에서 묵묵히 따라오던 케인은 태현의 말에 울컥해서 외쳤다.

생각해 보니 억울한 차별대우!

이다비한테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안 와도 된다고 해놓고, 케인은 그냥 의사도 묻지 않고 자동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태현과 같이한 시간으로 따지면 케인이 훨씬 더 많은데!

찬물도 위아래가 있고 노예에도 급이 있는 법인데, 고참 노예(?)로서 대접을 못 받는 케인은 갑자기 서러워졌다.

‘이다비가 예뻐서 그런 거냐! 그런 거냐!’

“뭐라는 거야. 넌 어차피 따라와야 해.”

“왜?! 나도 가기 싫어할 수 있는데!”

“네 직업을 생각해 봐라.”

“……!”

“너 없는 곳에서 나 죽거나 위험에 처하면 페널티 받는 게 누구겠냐. 넌 무조건 따라와야지.”

“……!!!!”

케인은 입을 벌렸다. 그랬다. 저번에도 그랬던 것처럼, 태현이 위기에 처하면 그에게 퀘스트가 뜰 가능성이 컸다.

페널티 받기 싫으면 옆에서 바짝 붙어 지켜야 했다!

“크…… 으흑흑…… 으흐흑흐긓그흑흑……!”

땅바닥에 엎드려서 절규하는 케인.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은 케인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지나갔지만, 구성욱은 그럴 수 없었다.

이제 알았다. 왜 태현 주변의 사람들이 저렇게 절규하는지.

‘그래. 울 수밖에 없으니까 우는 거야!’

구성욱은 케인 옆에 무릎을 꿇고 어깨동무를 했다. 절규하던 케인은 고개를 들고 구성욱을 쳐다보았다.

태현한테 당한 피해자들 사이에서 싹트는 동지의식!

“저 둘 뭐하는 거예요?”

“몰라. 창피하니까 아는 척 하지 말자.”

태현은 뻔뻔하게 이다비에게 그렇게 말했다.

* * *

“김태현 백작님. 이제 돌아오셨으니 저도 그만 제 영지로…….”

“아이고! 다른 교단들이 대륙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다니! 내 영지를 또 내버려 둬야 한단 말인가!”

“…….”

아농 백작은 당황한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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