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55화
“길드 통째로 가서 연합하겠다고 말하라는 게 아니라…… 너희 길드원 중에서 믿을 만한 애들 몇 명 있을 거 아니야. 걔네 골라서 그 길드 연합 쪽에 들여보내라고.”
“아. 스파이로요?”
“어허. 스파이라니. 남이 들으면 오해하겠다.”
“스파이 맞잖…… 읍읍!”
“어쨌든 잘 부탁한다.”
* * *
파파팍!
밑에서 날아오는 화살들.
보통 화살들이 아니었다. 고렙 궁수들이 쐈는지, 보라색 오러가 넘실거렸다.
그 화살들을 향해 김태산은 망치를 휘둘렀다. 그러자 넓게 펼쳐지는 붉은 오러!
“지금이다!”
“우오오!”
김태산의 말이 떨어지자, 성벽에 몸을 숨기고 있던 길드원이 곧바로 일어서서 마법을 난사했다.
스킬 <오크식 마법 저장>으로 마법을 몇 개 저장해 놨다가, 일순간에 쏟아내는 폭딜 마법 스킬!
제대로 허를 찔린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후퇴! 후퇴하라!”
“이 저주받을 오크 놈들! 감히 오스턴 왕국의 성을 무단 점령하다니! 절대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오스턴 왕국의 병사들이 후퇴합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악명이 오릅니다.]
[오스턴 왕국 내 평판이 하락합니다. 오스턴 왕국이 점령한 도시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튑니다!”
“어우. 죽겠다…… 이제 끝난 거 맞지?”
“일단은 그런 거 같은데.”
오크 아저씨들은 성벽 위에서 주저앉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오스턴 왕국이 갑자기 통일되고 나서부터 시작된 돌발 퀘스트!
이제까지 각 요새와 성에, 도시에 가만히 있던 오스턴 왕국의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혼란스러운 오스턴 왕국의 상황만 믿고 ‘영지 하나 장만해 보자!’ 하고 몰려온 플레이어들에게는 악몽 같은 상황!
벌써 힘이 약한 몇몇 플레이어들은 눈물을 머금고 점령한 요새나 마을을 버리고 튄 상태였다.
남은 건 버틸 힘이 있는 플레이어들뿐!
“계속 갈라져서 싸울 것 같은 왕국이 대체 왜 통일된 거야?”
“거기 도시에 있던 플레이어들 말 들어보니까, 태현이 그놈이 1왕자하고 막 같이 다녔다는데. 엄청 친하게.”
“2왕자하고도 같이 다녔다는 말 들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이 뭔가 한 거 같아.”
“그렇지? 왕자 둘이 같이 사디크의 화염에 타죽은 것도 좀 이상하잖아.”
척하면 척!
이 갑작스러운 상황의 원인을 태현으로 추측하는 사람들은 아저씨들뿐만이 아니었다.
태현이 아무리 공개를 안 하고 플레이를 했어도, 1왕자와 2왕자의 성에서 그렇게 깽판을 치고 다녔는데 플레이어들의 눈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갑자기 연기가 날 리는 없었다. 굴뚝에 연기가 난다는 건 이유가 있다는 것!
“형님 지금 속으로 되게 아쉬워하는 거 같지 않냐?”
“그때 오크 대족장한테서 태현이 구하지 말걸 하고 있는 거지. 쯧쯧. 나 같아도 속이 쓰리겠다. 그놈의 정이 뭔지…….”
“자식 낳아봤자 좋을 거 없어. 무자식이 상팔자라니까.”
“넌 인마 결혼부터 하고서 그런 소리를 해라.”
“쉿. 오신다. 속 쓰리실 테니까 그런 소리는 더 이상 하지 말자고.”
그러나 김태산의 얼굴은 평온했다.
“다들 회복했냐?”
“예? 아, 예.”
“지금 성벽 보강하는 건 언제 끝나지?”
“이틀 후면 끝날 겁니다.”
“하루 안에 끝내라고 해.”
“무리 아닐까요? 이미 일정을 당겼는데…….”
김태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따블로 준다고 해라.”
“……그래도 안 된다면요?”
“따따블!”
그리고 김태산은 일정을 당기는 데 성공했다.
* * *
“흠.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지?”
“형님…….”
“아,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거야!”
양성규가 딱한 눈빛으로 보자, 김태산은 버럭 신경질을 냈다.
“애초에 폼을 잡으시려면 종족을 오크로 고르지 마셨어야…….”
“뭐? 오크가 어때서?”
“잘생긴 종족은 아니죠.”
“멋있지 않나??”
김태산은 진심으로 반문했다. 양성규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 김태산이 겉모습을 확인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SBC 방송국의 배미나와 손을 잡은 것이다.
“형님이 방송까지 나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 거 안 좋아하시잖아요.”
“태현이 그놈 괴롭히려고 나가는 거다.”
“…….”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농담인가’ 싶었겠지만, 양성규는 진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100% 진심!
“이야기해 보니까 거기 PD도 아주 좋아하던데.”
“당연히 좋아하겠죠. 캐릭터에 화제까지 다 들어 있으니…….”
현재 가장 뜨거운 플레이어 중 하나인 김태현. 태현과 아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플레이어 아닌가!
게다가 원래 가족만큼 망신거리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었다.
가족한테 다른 가족을 헐뜯으라고 설득하는 건 어려웠지만, 김태산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나온 상황!
“처음 방송에서는 그놈이 몇 살까지 오줌을 못 가렸는지 말하고 다닐지 이야기할 생각인데.”
“형님…… 너무…….”
“아 왜! 나도 당한 건 좀 갚아 줘야지!”
어쩌다가 이렇게 유치하게 놀게 됐을까! 양성규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참았다. 김태산은 유치하게 놀면 한없이 유치하게 놀 수 있는 사람이었다.
“형님. 그래도 한 가지는 생각하셔야 합니다.”
“뭔데?”
“형님이 그렇게 시작하시면 태현이 그놈도 맞받아칠 거라는 거…….”
“…….”
갑자기 김태산은 뒤가 싸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 나는 꿀리는 거 없어.”
“뭐, 방송국에서는 좋아하겠네요.”
실제로도 그랬다. 배미나는 김태산의 말에 엄청난 기대를 걸고 있었다.
-완벽한 기회야!
두 부자 사이에 싸움을 붙일 필요도 없이, 벌써 활활 타오르고 있는 상태!
-게다가 둘의 사이가 의외로 좋다는 게 더 완벽해.
두 부자가 정말 재산 분할 같은 거로 질척거리면서 싸우는 게 아닌, 게임 내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는 사이 아닌가.
물론 두 사람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지만…….
방송에서 폭로전을 하겠다지만 그건 더티한 폭로전이라기보다는 유치한 투닥거림이 될 가능성이 컸다.
더티한 폭로전이라면 남는 거 없이 서로의 이미지가 더러워지겠지만, 이대로 간다면 잘나가는 김태현의 이미지를 더럽힐 필요 없이 거기에 김태산을 올려 태울 수 있었다.
서로 윈윈하는 전략!
김태산이 나와서 김태현과의 관계를 말하고, 애증 섞인 불평을 하고, 태현에게 귀여운 공격(?)도 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김태산의 캐릭터가 형성이 될 것이다. 새로 소개하고 게임 플레이를 공개할 필요도 없었다.
-방송 중에서 언제나 연예인 가족들 나오는 방송은 잘나가지. 이것도 그렇게 될 거야.
사이가 좋지만 서로 투닥거리는 두 부자! 이것이 배미나가 노리는 콘셉트였다.
물론 지금 혼자서도 잘나가는 MBS 쪽에서는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을 것이다.
경쟁 방송사한테 좋은 일을 뭐하러 하겠는가.
-그러니까 김태산 씨를 내보내서 양보하게 만드는 거지!
김태산이 화제를 끌고 인기를 모은다면, MBS도 양보해서 손을 잡는 게 서로 이익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미나는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 * *
배미나가 태현의 이미지를 더럽힐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것도 모르는 채, 김태산은 게임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요즘 판타지 온라인 2를 너무 많이 했군. 한번 시작하면 끊기가 힘들다니까.’
김태산과 얼굴을 맞대는 사람들은 종종 착각하기 쉬웠지만, 김태산은 수천억대 자산가였다.
서울시의 알짜배기인 XX구와 YY구에 빌딩만 여러 채! 거기에 토지까지 더한다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부동산의 임대 수익이 월에 몇십 억대로 들어왔다.
젊었을 때야 쉴 시간도 없이 뼈 빠지게 일했지만, 자리를 잡고 나서 김태산은 여유롭게 살아왔다.
태현이 ‘아버지는 맨날 골프만 치시잖아요!’ 하고 디스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
아침에 기상하면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뉴스를 본다.
그다음에는 골프장으로 이동해서 느긋하게 골프 레슨을 받고, 같은 골프장 멤버들과 느긋하게 골프를 한다.
이 일정이 끝나면 점심!
점심에는 특급 호텔로 이동해 느긋하게 씻고 식사를 한 후 집으로 돌아간다.
저녁이 되기 전에 모든 일정이 끝나는 것이다.
딱히 약속이 없는 경우에는 그냥 넓은 자택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김태산이었다.
인생의 승리자 그 자체!
판타지 온라인을 시작했지만 거기서 바뀐 건 별로 없었다.
골프장에 갈 시간에 캡슐에 들어가 판타지 온라인을 하고, 저녁에도 판타지 온라인을 하는 것뿐.
오랜만에 캐릭터를 키우고, 예전 동료들과 같이 판타지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에 푹 빠지긴 했다.
그래도 한두 번 정도 얼굴은 내밀어야 사람들이 그를 잊지 않는 법!
김태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골프장으로 향했다.
* * *
“이 사람. 하도 안 보여서 죽은 줄 알았네.”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나이가 들고 머리가 새하얗게 셌지만, 노인의 모습에서 약한 느낌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에 강한 눈빛!
딱 봐도 범상한 노인은 아니었다.
이 골프장은 VIP 중의 VIP만 들어올 수 있는 곳. 애초에 여기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김태산은 몇몇 사람과 명함을 교환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김태산은 눈앞의 노인이 누군지 몰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노인이 김태산의 신분을 묻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김태산도 굳이 노인의 신분을 묻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것 정도가 다였다.
“농담이야. 사실 나도 최근에는 안 나왔지. 자네가 오랜만에 온다는 건 여기 직원한테 들은 거고.”
“예? 건강이라도 편찮으신…….”
“건강은 무슨. 건강은 괜찮아. 요즘에 낚시에 빠져서 그렇지.”
“낚시요?”
“왜, 자네도 낚시 좋아하나?”
“할 줄은 압니다. 저보다는 제 아들놈이 잘하죠.”
“호, 아들이 있나? 자네 아들이니 범상한 친구는 아니겠군.”
“배배 꼬인 놈입니다.”
“크크크…… 자식 농사는 생각처럼 안 되는 법이지. 나도 자식 때문에 속 썩인 적이 많거든.”
노인은 큭큭 웃으며 김태산을 쳐다보았다.
“낚시하려면 다른 곳에 가야 하는데 왜 여기에 왔는지 아나?”
“글쎄요?”
“자네 때문에 왔어. 자네가 오면 나한테 연락을 하라고 말해놨거든.”
“……?”
김태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짓을?
“친구 구하기 힘든 세상이잖나.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었어.”
“…….”
“이유가 궁금한 얼굴이군. 여기 오는 놈들을 봐. 다들 욕심이 가득하지 않나? 골프를 치러 왔으면 골프나 쳐야지, 왜 명함을 교환하고 서로 과시를 해댈까?”
노인은 들어오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김태산은 민망하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건 그냥 더 친해지려고 하는 겁니다.”
“웃기는 소리지. 욕심이 가득해서 그래. 자네는 내가 누군지 묻지 않았지. 저놈들은 나만 보면 꼬리를 흔들면서 명함을 내밀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서 말이야. 자네는 내가 누군지 모르지?”
“예…….”
“쯧쯧. 내가 얼굴을 많이 내밀지는 않지만 아예 안 내미는 편은 아닌데, 자네는 뉴스를 좀 더 볼 필요가 있어.”
“맨날 챙겨보는데요…….”
“그러면 사람 얼굴을 못 알아보는 거겠지. 기억력 좀 키우게나.”
아픈 곳을 찔렸다. 김태산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어쨌든 자네는 내가 누군지 묻지 않았어. 내가 안 물어보니 배려를 해준 거겠지. 궁금할 텐데도 말이야.”
“별로 배려까지는…….”
“그것도 그렇고, 내가 방금 저놈들을 욕하려고 하자 변명을 해주려고 했지.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입 무겁고 배려심 강하고 겸손한 건 좋은 남자란 증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김태산은 뭔가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