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49화
태현은 약간 찔렸는지 변명을 시작했다.
“그래, 내가 사람 얼굴을 조금 못 알아보는 편이기는 하지만…….”
‘조금이 아닌데…….’
“그거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다고. 네가 말한 것처럼 원래 사람 얼굴은 의외로 알아보기 힘들다니까?”
“김태현 플레이어 아니에요?”
“?!”
태현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말하자마자 태현의 말을 부정해 버리는 세상!
뒤에 서 있는 건 주현영이었다.
“맞나요? 판타지 온라인 2. 판타지 온라인 2하고 너무 똑같이 생기셔서 물어봤는데요…….”
“……맞는데.”
정수혁과 최상윤이 태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태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내가 사람 잘 못 알아본다. 됐냐?”
* * *
태현을 알아보고 인사만 하고 가려는 주현영. 그녀를 자리에 앉힌 건 강씨 순대국밥집의 주인인 강현숙이었다.
“뭐? 게임에서 아는 사이야? 그러면 가서 이야기해! 놀아! 떠들어!”
“그, 그렇지만 지금 일하는 중인데…….”
“일은 무슨 일! 손님들 없어!”
바글바글-
우글거리는 손님들이 테이블마다 앉아 있었지만 강현숙은 당당했다.
“가서 앉아! 친구들하고 놀아! 좀!”
“그,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고 뭐고!”
강현숙은 억지로 주현영을 밀어서 앉히게 했다. 언제나 일만 하는 딸!
판타지 온라인인가 뭔가 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다. 예전 인터넷 커뮤니티처럼, 친구들도 실제로 만나고 하고…….
그런데 주현영은 그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한번 물어봤다. 판타지 온라인에서 뭘 하냐고.
-요리해요.
게임 내에서도 요리라니! 강현숙은 가슴을 쳤다. 일 중독도 이런 일 중독이 없었다.
‘게다가 저 총각은 그 총각이잖아!’
처음에는 그냥 운동 좋아하는 총각인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여기 건물주인 김태산의 숨겨진 비밀(?)을 알려준 총각인 줄 알았고.
그렇지만 나중에 알아보니…….
부자(父子) 사이!
왜 부자가 서로 그렇게 헐뜯고 노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단한 것 아닌가. 학벌도 좋고 집안도 좋고 얼굴은…….
‘뭐 얼굴이 중요한 건 아니지! 험상궂게 생겼지만 사람은 좋잖아!’
태현이 들었다면 울컥했을 소리였다.
* * *
“그래서 이분은 누구신지?”
“여기 순댓국밥집 요리사에 판온 2 내에서도 요리사.”
“완전 취미와 직업을 일치시키신 분이시네. 판온 재밌나요?”
“네. 꼭 안 돌아다녀도 할 게 많아서 이것저것 해보고 있어요.”
“오, 지금은 뭘 하고 있는데?”
태현은 갑자기 궁금해져서 물었다.
주현영은 게임 내에서 사제 관계를 맺은 상태. 그녀가 대단한 업적을 달성하면 태현한테도 보너스가 들어왔다.
그런데 한동안 그런 메시지창은 본 적이 없었다.
‘게임을 한동안 안 했었나?’
“에랑스 왕국에서 퀘스트요.”
“뭐 안 뜨던데.”
“아, 네. 연계 퀘스트라서 아직까지 퀘스트 완수를 못 했거든요.”
“꽤 난이도가 높은 퀘스트인가 봐?”
“에랑스 국왕의 왕궁 요리사가 될 수 있는 퀘스트예요.”
“……!”
셋 다 놀라서 주현영을 쳐다보았다. 에랑스 국왕의 왕궁 요리사?
대륙에서 가장 잘나가는 왕국 중 하나가 에랑스 왕국이었다. 게다가 거기 국왕은 성격 까다롭기로 유명한 폭군!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접근도 못 한 상황에서 주현영이 왕궁 요리사 퀘스트를 깨 가고 있다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이거 완전 길드 하라는 계시 아니냐? 요리사까지 있어!”
“길드 만드시나요?”
주현영이 관심을 보이자, 태현은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저 자식이 헛소리하는 거야.”
“나중에 만드시면 도와드릴게요. 저도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괜찮아. 괜찮아.”
태현과 주현영의 대화를 들은 최상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닌가?’
안 그래도 태현 옆에 이다비가 계속 같이 있는 걸 보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라고 하던 유지수였다.
‘이다비가 <파워 워리어>의 길드 마스터다 보니, 태현과 골드 관련으로 엮인 게 분명해!’라고 간신히 설득을 한 상황!
게다가 유지수가 들어간 <파이드>길드의 길마는 유지수를 엄청나게 아꼈다.
잠깐 봐도 ‘우리 예쁜 동생’ 하는 게 보통 친한 모습이 아니었다.
파이드 길드의 길마를 짝사랑하는 최상윤 입장에서는 유지수의 눈치가 더더욱 보이는 상황!
‘아, 안 돼…… 이건…… 위험해……!’
최상윤은 입을 다물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불똥 튈 위험은 피하는 게 제일!
“선배님, 그러면 나중에 다른 애들이 김태현 플레이어하고 어떻게 친해졌는지 물어보면 선배님이라고 말해도 됩니까?”
“말 하시던가. 네 자유지.”
태현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애들이 안 믿는 거 아냐?”
“안 믿으면 안 믿는 거고. 내가 걔네 믿게 해서 뭐 하려고.”
태현과 최상윤이 떠드는 사이, 정수혁은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다시 읽기 시작했다.
“뭐하냐?”
“아, 과제가 있어서…….”
“…….”
태현과 최상윤은 서로 쳐다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쟤는 아직 재학 중인 대학생이었지.
“현대문학의 이해? 그거 교수님이 누구더라…….”
“김현균 교수님이십니다.”
“아, 그분.”
“과제가 좀 어려워서…….”
“까다롭긴 하지.”
정수혁은 리포트를 읽으며 끙끙거리다가 태현을 보며 물었다.
“선배님, 선배님도 이 강의 들으신 적 있으십니까?”
“있는데.”
“얘는 과 수석이잖아.”
“예?!”
“예?! 는 무슨 예?! 야. 너 나한테 찾아오기 전에 내 동기들한테 내 이야기 듣고 왔다며.”
정수혁은 그 말을 듣고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김태현? 그 자식? 잘하는 건 게임밖에 없는 개XX지!
-근데 걔 과 수석이잖아.
-집에 돈도 많고.
-싸움도 잘하잖아. 네가 덤볐다가 떡이 되도록…….
-닥쳐.
“아!”
게임에만 집중하느라 과 수석이란 말은 귓등으로 흘린 정수혁이었다.
“선배님! 어떻게 하면 과 수석을 받을 수 있습니까!”
“쉽지. 국영수 중심으로…….”
“야, 그건 고등학교 버전이잖아.”
“아, 맞다. 실수했네. 그래. 대학에 기부금을 세게 내고 총장님하고 교수님하고 친하게 지내면…….”
“…….”
“농담이야.”
“네가 하면 진담처럼 들린다.”
“성적 좋게 받으려면 교수님 스타일 파악하고 어떤 강의인지 알아야지. 현대문학의 이해 그거 교수님이 좀 까다롭잖아. 중간고사, 기말고사 다 리포트 대체고.”
‘좀’ 까다로운 건 매우 순화한 표현이었다. 한국대학교에서 <현대문학의 이해>는 지옥 그 자체!
좀 아는 사람은 절대 들어가지 않는 강의였다.
‘시험을 안 보는 대신 리포트로 평가’가 매우 달콤하기는 했지만, 여기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됐다.
시험을 안 본다는 사실에 신나서 달려든 학생들은 피눈물!
“끄으응…… 끄으으으응…….”
“아, 밥맛 떨어지게. 내놔봐.”
정수혁이 리포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짐승 같은 소리를 내자, 태현은 짜증을 내며 리포트를 손에서 뺏었다.
“자, 보자. 어떻게 썼나…….”
두근두근!
정수혁은 긴장된 얼굴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하늘 그 자체인 태현이 리포트를 평가하다니.
교수한테 제출하는 것보다 더 긴장되는 상황!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이 리포트에는 아주 큰 문제가 있어.”
“죄, 죄송합니다. 선배님.”
“바로 내가 이제서야 이걸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지.”
“감사합니다……?”
“왜냐면 이걸 일찍 읽어봤으면 네 글 실력이 이런 식으로 소름 돋는지 미리 알았을 테니까.”
“죄, 죄송합니다. 선배님.”
“아니, 내 말은 꼭 헤밍웨이처럼 소름 돋는다는 거였어.”
“감, 감사합니다. 선배님!”
“헤밍웨이는 말년에 참 소름 돋는 삶을 살았잖아?”
“선, 선배님. 죄송하지만…… 제 리포트가 마음에 드셨다는 건지 안 드셨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어? 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넌 그냥 가방 챙겨서 이 강의를 나가야 해.”
“죄송합니다, 선배님.”
“왜냐면…… 넌 더 이상 이 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거든. 너한테는 더 높은 수준의 강의가 어울려.”
“감사합니다?”
“물론 그 강의가 지구에 존재하지는 않겠지만…….”
“…….”
“뭐, 농담은 여기까지만 하고.”
“농담이었습니까?!”
“그럼 그걸 진담으로 했겠냐? 내가 너한테 기대한 게 없는데 저런 식으로 말할 리가 있나. 몇 가지만 고쳐. 김현균 교수님 장황한 표현 싫어하니까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삭제하고.”
“저, 선배님.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인데요.”
“응. 다시 쓰라고.”
“……이번에도 농담이군요!”
“이번에는 농담 아닌데.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가 아니잖아. 첫 번째 장은 남겨 놨다.”
“그래도 그건……!”
“첫 번째 장 다음부터는 그냥 했던 소리 반복하고 반복하는 거잖아. 양 늘리려는 네 속마음이 뻔히 보인다.”
“흑흑…….”
정수혁은 울먹이면서도 태현의 말에 따랐다. 슥슥 지워지는 리포트!
“분량은 많이 낼 필요 없어. 난 한 장만 냈는데도 A+가 나왔지.”
“예?! 정말이십니까?!”
“얘 말 듣지 마. 그냥 많이 써.”
정수혁이 태현의 말에 홀린 듯 고개를 들자 최상윤이 말렸다.
“한 장만 냈는데 A+ 나온 건 사실이잖아?”
“근데 넌 빨리 게임하려고 한 장만 낸 거잖아! 후배한테 그렇게 하라고 하면 안 되지!”
“어쨌든 결과는 결과잖아. 잘 해봐.”
“예!”
남은 순대국밥을 들이켜고 나자, 태현은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버지가 좀 이상해.”
“왜? 아저씨가 뭐 어땠는데?”
“갑자기 나를 보고 기분 나쁘게 웃으시더라고. 아무리 봐도 뭔가 꾸미는 웃음인데…….”
태현은 김태산의 웃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께 김태산이 집에서 보여준 웃음은 명백하게 수상한 웃음!
“무슨 좋으신 일이라도 있으셨던 거겠지.”
“그럴 때 웃음은 다르다니까. 내가 본 웃음은 명백하게 사악한 웃음이었어.”
“…….”
“뭘 꾸미는 건지 모르겠네. 저번에 오크들하고 싸울 때 날 도와준 거 때문에 자괴감 드셔서 그런가?”
“……왜 자괴감이 듭니까?”
“거기서는 안 도왔어야 하는데. 이게 사람이 멋대로 손이 나갈 때가 있잖아. 나 같아도 그랬을 것 같기는 한데…….”
게임에서 김태산을 보면 PK 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김태산을 PK 하는 걸 보면 태현이 먼저 울컥할 것 같았다.
“모르겠네. 뭐 아버지니까 얼마 안 가서 들키겠지. 숨기시는 데에는 재주가 없으시니.”
“너 괴롭힐 수 있는 퀘스트라도 준비하시는 거 아니야?”
“글쎄…… 그런 게 있나? 별로 없는데. 게다가 아버지는 지금 오스턴 왕국에 계셔서 그럴 정신이 없을걸.”
오스턴 왕국이 갑자기 통일되어 버리는 바람에, 오스턴 왕국의 영지를 점령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총 비상 상태였다.
모두 연합해서 오스턴 왕국을 막아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하긴. 오스턴 왕국도 난리지. 오크들이 빠졌는데 갑자기 통일이 될 줄이야…….”
“하하. 그러게. 왜 갑자기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네.”
태현은 시치미를 뗐다.
“너는 퀘스트 계획 세웠냐?”
“나는 일단 영지 관리 좀 하고, 아이템 정리한 다음에 직업 퀘스트 좀 깨야지.”
“오크들은 처리 안 해도 돼?”
“대족장이 안 죽기는 했는데 바로 회복은 못 하겠지. 걔 죽이러 가려면 레벨업 좀 더 해야 해.”
결국 <아키서스의 화신>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직업 퀘스트를 깨야 했다.
오크들 때문에 한바탕 돌아오고, 교단을 세운 것 때문에 또 한 번 더 돌았지만, 태현은 다시 권능을 찾으러 움직일 생각이었다.
“근데 너 레벨 몇이냐?”
“……그게 뭐가 중요해. 그보다 넌 지금 어디 있냐?”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