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40화
“저는…….”
“잠깐, 말하기 전에 그 망토 좀 걷어봐.”
태현의 말에 남자는 망토를 걷었다. 그러자 나타난 호화로운 옷차림!
태현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 성 사람인가?”
“예? 아닙니다만.”
“에이…… 이 성 사람 아니야? 진짜 아니야?”
이 성 사람이면 2왕자의 이름을 빌려서 뜯어먹을 생각이었던 태현!
“진짜로 아닙니다.”
그러나 상대는 완고했다.
“쯧. 알겠어. 그래서 누군데?”
“저는…… 3왕자님을 모시고 있는…….”
“아, 안 사요. 안 사. 저리 가라.”
“예?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이놈의 왕가는 왜 이렇게 왕자들이 많아? 전 국왕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새끼만 쳤나? 좀 있으면 4왕자, 5왕자, 6왕자 이렇게 나오겠네.”
“4왕자는 없습니다만…….”
“아, 됐고. 왕자는 두 명으로 충분해. 내가 오스턴 왕가와 더 어울리면 김태현이 아니라 최태현이다. 저리 가, 안 가? 맞고 갈래?”
“김, 김태현 백작은 분명 대륙의 위기를 해결하고 잊혀진 신을 되살린 명망 높은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남자는 태현의 태도에 당황했는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케인이 켁켁거렸다.
아니, 소문이 퍼져도 저렇게 퍼지나?
“1왕자랑 2왕자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짜증 났거든? 3왕자까지 와서 열정페이 하라는 거 듣고 싶지 않다. 5초 줄 테니까 저리 가 인마!”
“저, 저희 왕자님께서는 1왕자나 2왕자와 다릅니다!”
“뭐가 다른데. 카드로 긁을 수 있는 한도가 더 높냐?”
“예? 카드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건 신경 쓰지 말고.”
상대는 태현이 1왕자와 2왕자의 이름을 빌려서 닥치는 대로 골드를 긁어내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와락!
남자는 태현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모습!
‘펠마스냐?’
“한 번만! 한 번만 만나보고 결정해주십시오! 저희 왕자님은 다릅니다!”
“1왕자랑 2왕자도 그런 소리를 했는데. 눈에 콩깍지 쓰인 놈은 믿을 게 안 된다고.”
태현은 그렇게 말했지만 남자가 잡은 발목을 걷어차지는 않았다.
이렇게 애걸복걸하는데 한 번 봐줄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겸사겸사 뭐 있는지도 좀 보고.’
1왕자와 2왕자의 성에서 나름 이익을 쏠쏠하게 본 태현이었으니, 3왕자의 본거지에서도 쏠쏠하게 챙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후. 그래. 우리 3왕자께서는 어디 성에서 지내시지?”
“예? 저희 왕자님은 성이 없으십니다만…….”
“아, 그럼 성이 아니라 도시인가? 도시도 좋지. 더 골드도 많을 테고…….”
“도시도 없으신데…….”
남자는 말하면서 슬슬 태현의 눈치를 봤다. 뭔가 이상한 분위기!
“야, 야.”
케인이 태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너 오스턴 왕국 내전 모르냐? 1왕자랑 2왕자가 싸우잖아.”
“그래. 그거야 들었지.”
“거기 이름도 못 넣을 왕자라면 가진 게 있겠냐?”
“……!”
남자는 주눅 든 얼굴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그랬다. 3왕자는 가진 게 없었다. 영토고 뭐고 없는, 귀족보다 못한 처지!
“아니, 이놈의 오스턴 왕가는 진짜!”
냉정하게 발목을 털어내는 태현! 발목을 붙잡고 늘어진 사람을 예술적으로 걷어내는 솜씨였다.
“제발! 말씀만 들어주십시오!”
“아, 됐거든? 1왕자나 2왕자는 뜯어먹을 거나 있지, 너희 왕자는 뜯어먹을 것도 없잖아. 이야기 끝났어. 다른 놈한테 가라고. 뭐 다른 귀족 있겠지.”
“오스턴 왕국의 썩어빠진 귀족들은 안 됩니다! 밖에서 오시고, 대륙의 위험을 손수 해결하신, 교단의 고귀한 관리자이신 김태현 백작님이 아니라면…….”
남자가 떠드는 사이 태현은 이미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케인은 남자의 등을 두드리며 친절하게 말했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
* * *
“부탁할 게 있으면 무조건 선불로 내놔라.”
결국 태현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 테이블 반대편에는 죄를 지은 것 같은 소년 NPC와 중년 남성 NPC가 앉아 있었다.
3왕자의 세력은 달랑 이 둘이 전부!
3왕자와 3왕자를 모시고 있던 전직 근위기사였다.
“저, 저희 왕자님은 두 왕자처럼 가진 골드가 없습니다만…….”
“그러면 골드를 벌어! 세상은 공짜로 굴러가지 않는다고. 1왕자와 2왕자 저 두 놈이 성격 더럽고 쓰레기 같은 놈이지만 왜 주변에 사람들이 있겠어. 이게 많으니까 있는 거지!”
태현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골드!
그러는 와중, 3왕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아직 어린 소년이었지만 태현이 난리를 치는 동안에도 당황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말해봐.”
“저, 골드가 없으면 다른 걸로 안 되겠습니까?”
“골드가 안 되면 성, 도시, 보석도 받는다. 비싼 조각품이나 예술품도 받고. 물론 선불인 거 알지?”
“…….”
3왕자의 근위기사는 황당하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분명 들은 소문과는 전혀 다른 인물 같았던 것이다.
“선불은 무리입니다.”
“그러시겠지.”
태현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3왕자는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
누가 봐도 악당은 태현!
그걸 본 케인은 갑자기 3왕자를 응원하고 싶어졌다.
‘힘내라, 3왕자! 지지 마라, 3왕자!’
“먼저 드리지 못하는 대신, 만약 저를 도와주신다면 더 큰 대가를 약속해드리겠습니다.”
“결국 열정페이잖아 이 자식아!”
“그, 그런…… 좀 다른데…….”
“그래서 그 큰 대가가 뭔데.”
“……아직 생각을 안 해봤습니다.”
덜컥!
태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자 다시 발목을 잡고 늘어지려는 3왕자의 근위기사!
획!
그러나 태현은 민첩한 동작으로 발을 빼냈다.
“이 양반은 기사라면서 하는 짓은 펠마스 같네. 진짜 기사 맞아?”
“펠, 펠마스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아니, 대가도 생각 안 해놨다면서! 내가 끝까지 들어줘야 해?”
“김태현 백작님께서 뭘 원하실지 몰라서 생각을 못 한 것뿐입니다!”
3왕자의 근위기사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김태현 백작님! 별로 위험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백작님이라면 충분히 해내실 수 있는 일이고요.”
“왕 만들어달라는 게 별로 위험하지도 않은 일이냐?”
“네?”
“?”
3왕자와 근위기사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 * *
“그러니까…… 왕을 만들어달라는 게 아니라 3왕자를 데리고 아탈리 왕국으로 망명하는 걸 도와달라 이거였군.”
“예! 김태현 백작님께서는 명성이 높으시니 아탈리 왕국 국왕 폐하를 설득해 3왕자님의 지위를 인정받게 해주실 수 있으실 겁니다.”
3왕자의 지위를 인정받고 아탈리 왕국으로 망명하면, 나름 안에서 귀족으로 잘 지낼 수 있었다.
“3왕자님의 지위를 인정받으면, 국왕 폐하께서도 자그마한 영지 하나 정도는 내려주실 겁니다. 그러면 김태현 백작님께도 충분히 보답을…….”
“거기 국왕이 주는 영지는 믿을 게 못 돼.”
“……?”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로 사기를 당한 태현의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제일 어이가 없는 건, 정작 국왕은 정말로 좋은 의도로 줬다는 것!
마수를 토벌하고 사디크 교단을 물리친 백작에게 어울리는 명예로운 땅이라니.
‘그딴 건 됐고 그냥 좋은 땅을 달라고!’
태현은 혀를 차며 둘을 쳐다보았다.
한마디로 지금 개판인 오스턴 왕국을 떠나게 도와달라는 뜻인데…….
<3왕자의 망명-오스턴 왕국 내전 퀘스트>
1왕자, 2왕자 모두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3왕자. 선왕의 사망 이후 도와줄 세력을 모두 잃은 3왕자는 다른 왕국으로 망명하려고 한다.
3왕자가 다른 왕국으로 망명할 경우, 다른 왕국이 오스턴 왕국의 내전에 참전할 수 있기에 1왕자와 2왕자는 어떻게든 3왕자를 잡으려고 한다.
3왕자를 도와 다른 왕국으로 망명하게 도와준다면 적절한 보상이 따르리라.
보상:?, ??, ???
“나는 왕 만들어달라는 퀘스트인 줄 알았지.”
“예? 저희가 그런 걸 어떻게 부탁하겠습니까?”
근위기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태현을 바라보았다. 무슨 주머니에서 자기 물건 꺼내는 것처럼 쉽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니, 근데 의외로 쉬울 거 같은데.”
“???”
“1왕자하고 2왕자가 같이 죽으면 남는 건 얘밖에 없으니까 다른 귀족들도 알아서 붙지 않을까? 4왕자는 없다고 했지?”
“??????”
근위기사와 3왕자가 같이 미친놈 보듯이 태현을 쳐다봤지만, 태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망명을 시키는 것도 일인데, 같은 일이라면 크게 걸고 크게 먹는 게 좋지 않을까?
“야, 3왕자. 만약에 왕이 되면 뭘 해줄 수 있냐?”
3왕자는 당황했지만 태현의 말을 듣고 열심히 고민했다.
“뭘 원하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흠. 작위는 당연히 기본이고.”
“그건 해드릴 수 있습니다.”
국왕 자리에 오르는데 작위 하나 주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아. 이게 좋겠군. 아키서스 교단을 오스턴 왕국의 국교로 하자. 다른 교단은 전부 쫓아내고.”
“?!?!?!”
생각지도 못한 말에 3왕자와 근위기사는 당황했다. 작위를 주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오스턴 왕국에 있는 다른 교단들이 화를 낼 겁니다!”
“아, 싫으면 그놈들한테 도와달라고 하시든지.”
오스턴 왕가 왕자들에게 학을 뗀 태현이었다. 이 정도 보상이 없으면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3왕자님!”
“저희한테는 선택지가 없잖습니까? 김태현 백작님의 말씀이 맞아요. 다른 교단들은 저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런 교단들이 화를 내는 건 저도 알 바 아닙니다!”
3왕자는 단호하게 외쳤다.
“김태현 백작님, 저를 국왕으로 만들어주시면 아키서스 교단을 오스턴 왕국의 국교로 만들겠습니다! 작위와 함께!”
3왕자는 결연한 외침과 함께 태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걸 본 근위기사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리기만 했던 3왕자가 언제 이렇게 크게 컸단 말인가!
그러나 태현은 3왕자의 손을 마주 잡지 않고 깃털 펜을 끼워 넣었다.
“?”
“계약서나 쓰라고. 내가 왕자 놈들한테 하도 많이 당해서 말이야.”
“…….”
교단의 교황으로 임명되면서 많은 것들을 얻었지만, 그중 하나는 계약서에 쓸 수 있는 강력한 저주였다.
대륙에서 ‘이 계약을 안 지킬 경우 아키서스의 이름으로 저주를 받으리라’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신의 이름이 들어간 계약서를 지키지 않는다는 건 그 신에게 제대로 보복을 당하겠다는 뜻이었다.
샤샤샥-
3왕자는 뭔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써냈다.
[아키서스의 이름으로 높은 작위의 NPC와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명성, 신성이 오릅니다.]
<3왕자 만세!–오스턴 왕국 내전 퀘스트>
세상에는 사서 고생을 하는 사람이 있다.
3왕자를 망명시키기만 하면 만족스러운 보상이 약속되어 있는데, 굳이 3왕자처럼 세력도 뭣도 없는 사람을 왕으로 만들려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사서 고생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당신이 그런 선택을 했으니.
3왕자를 오스턴 왕국의 국왕으로 만들어라. 만약 성공만 한다면 당신은 오스턴 왕국의 은인이 되리라.
보상:오스턴 왕국의 작위, 오스턴 왕국의 국교가 아키서스 교단으로 전환.
‘오스턴 왕국을 통째로 집어삼키면 단숨에 약소 교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현재 아키서스 교단은 1+1 전략을 돌릴 정도로 미약하게 퍼진 교단!
그러나 오스턴 왕국만 통째로 집어삼킨다면 충분히 다른 교단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덩치가 됐다.
“그런데 저희 왕자님을 대체 어떻게 왕으로 만드시려고……?”
“뭐, 다 방법이 있지.”
태현은 계약서를 품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