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39화
오스턴 왕국의 상황을 모르고 ‘히히 사디크의 불꽃이 피어오른 걸 보니까 이건 신성한 계시일 거야’ 하면서 왔던 사디크 교단 일행!
그들에게는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간신히 만든 보금자리를 사디크의 화염 때문에 잃게 생긴 플레이어들은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간신히 도주 성공!
그다음부터는 정체도 숨겨야 했다.
“사디크 교단의 영향력을 올려야 하는데…….”
교단의 영향력을 올리려면, 도시나 성에 들어가서 NPC들과 친해진 다음, 그들이 주는 퀘스트를 깨고, 그들을 교단에 포섭해야 했다.
정체를 숨기면서 해야 한다면 난이도가 대폭 상승!
버포드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잘 될 수 있을까?
“헉!”
버포드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숙였다. 뭔가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 말을 타고 지나갔던 것이다.
바로 태현이었다.
‘저놈이 왜 여기 있는 거야?’
버포드는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갔다. 변장을 한 상태지만 그래도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주 뼛속 깊숙이 각인된 공포!
예전에야 복수를 하겠다, 잃어버린 걸 되찾겠다, 이런 식으로 떠들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발 남은 쪽박이나 깨지 마라!
하도 데이고 데여서 이제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다행히 태현은 버포드와 사디크 교단 일행을 눈치채지 못하고 가버렸다.
“저놈, 김태현 아닌가?”
“맞다! 우리 사디크 교단의 원수! 저놈을 죽여서 사디크 님의 이름을 증명하겠…… 컥!”
사디크 성기사가 태현을 알아보고 칼을 뽑으려고 하자 버포드가 그의 명치를 세게 후려쳤다.
“뭐하는 짓이냐!”
“이 자식이 그렇게 당하고도 학습 능력이 없어! 지금 덤비면 잘 될 거 같냐!”
버포드는 울컥해서 사디크 성기사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나도 저놈을 공격하고 싶어! 그렇지만 지금 공격하는 건 자살행위야! 아직도 모르겠냐!”
“크, 크흑……!”
“기다리고 힘을 모으는 거다! 저놈을 이길 수 있을 때까지!”
둘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서로 얼싸안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들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지?”
“일단 여기 사람들하고 친해져야 하는데…… 돌면서 퀘스트나 좀 깨주자.”
버포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여기 카나안 성에 있는 교단들이 누구였더라?
“?!”
버포드는 놀라서 발걸음을 멈췄다. 보통 도시나 성을 보면, 신전들이 있는 거리가 따로 있었다.
그래서 어떤 교단들이 여기에 있나 확인하려면 그 거리를 가면 되는데…….
“뭐, 뭐야. 이 화려한 건물은?”
“그러게?”
교단의 신전들은 교단의 특성과 어울리는 겉모습을 갖고 있었다. 소박하고 검소한 신전도 있고, 투박하고 장엄한 신전도 있고…….
그런데 눈앞에 있는 건…….
“이거 어떤 미친놈이 만든 거야?”
미적 감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놈이 만든 것 같은 신전!
그냥 비싸고 반짝거리는 건 대충 다 가져다가 붙인 것 같은 디자인이었다.
호화롭고, 고급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쯤 되면 너무 과했다.
-신전 확인.
[아키서스 교단의 신전입니다.]
“…….”
태워 버릴까?
버포드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여기서 불을 질러 버리면 앞으로 퀘스트는 완전히 포기해야 하겠지만…….
그걸 감수하더라도 정말 끌렸다. 그만큼 버포드는 많이 당했던 것이다.
‘아니, 진정하자. 진정. 나는 복수심을 버렸다. 복수심을 버렸다…….’
찰싹찰싹!
버포드는 스스로의 뺨을 때렸다.
태현한테 당하고, 어디서 굴러들어왔는지 모르는 이상한 뱀파이어 중갑전사한테 당하고 나서, 버포드는 깨달음을 얻지 않았는가.
복수는 건강에 좋지 않다!
태현에게 복수하는 것에 목을 매지 말고, 자신의 일을 해야 했다. 그게 스스로에게 좋았다.
‘나는 김태현을 용서한다, 용서한다, 용서했다…….’
간신히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고, 버포드는 신전의 문을 두드렸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염탐을 해볼 생각!
[현재 신전에 사제가 없습니다. 들어갈 수 없습니다.]
“?!?!?!”
버포드는 순간 메시지창을 잘못 본 줄 알았다. 이렇게 커다랗고 호화로운 신전에 사람이 없어!?
“뭐 어떻게 된 거야?!”
소리를 쳐도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
‘김태현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다 이런 걸 지어놓은 거지? 아니, 지어놓은 건 지어놨다고 쳐도 왜 아무도 없는 거야?’
신전을 기껏 지어놨어도 사람이 없으면 의미가 없었다. 버포드는 대체 태현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함정인가? 뭔가 복잡한 계획이 있는 건가? 나 또 속아 넘어가는 건 아니겠지?’
태현한테 많이 속은 사람들의 공통점!
그건 태현은 별생각도 없는데 혼자 알아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는 점이었다.
쑤닝 길드원들이 있지도 않은 태현의 폭탄을 찾아 성을 뒤지는 것처럼, 버포드는 혼자 끙끙 고민했다.
“끙…… 일단 퀘스트부터 깨자. 곤란해하는 사람들 없나?”
“물어보자고.”
사디크 성기사들은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요즘 불편하거나 힘드신 일이 있으십니까?”
악신 계열인 사디크 교단이 이런 착한 짓을 한다는 게 웃기기는 했지만, 어쩌겠는가.
교단이 힘이 없을 때에는 뭐라도 해야지!
말을 걸었지만 버포드는 바로 퀘스트가 나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원래 이런 식의 작업은 인내심이 많아야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계속 붙잡고 말을 걸다 보면, 퀘스트를 갖고 있는 NPC가 한 명쯤 걸리는 법이었으니까.
“있네!”
“역시 없군요. 알겠습니다. 좋은 하루…….”
“있다고!”
“?!”
처음 잡은 사람이 바로 퀘스트를 주다니. 버포드는 당황했지만 금세 침착을 되찾았다.
“그, 그럼 말해주십시오. 저희는 뛰어난 모험가들이니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로?”
“정말입니다!”
“요즘 1왕자 놈이 우리를 뜯어먹으려고 해!”
<1왕자의 폭정–사디크 교단 퀘스트>
오스턴 왕국의 1왕자는 훌륭한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요즘 들어서 눈에 띄게 이상해졌다.
부유한 상인들에게서 닥치는 대로 골드를 뜯어내 호화로운 신전을 지어 올리는 짓을 한 덕분에, 카나안 성 사람들의 불만은 높아진 상태다.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사디크 신의 이름을 믿게 해라.
보상:카나안 성 내에서 사디크 교단의 영향력 상승.
“……?”
버포드는 혼란스러워했다. 이걸 보니까 태현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김태현이 이런 짓을 왜 하는 거지? 스스로 명성을 깎아 먹을 이유가 있나?’
이런 식으로 막 나가는 건 사디크 교단 같은 곳이 하는 짓!
아무리 봐도 태현이 할 짓이 아니었다.
“이봐! 그래서 도와줄 건가, 안 도와줄 건가!”
“아, 도와드리겠습니다!”
버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스러운 건 당황스러운 거고, 퀘스트는 퀘스트.
“일단…… 음. 여기, 골드가 있습니다. 이거라도 받으시고…….”
“고맙네! 자네 정말 괜찮은 사람이군!”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사디크 교단 내의 평가가 오릅니다.]
[카나안 성 내에서 당신의 평가가 오릅니다.]
[카나안 성 내에서 사디크 교단의 영향력이 상승합니다.]
퀘스트 해결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여기서 1왕자를 찾아가서 ‘당장 그 폭정을 그만두지 못할까!’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 할 수 있는 건 골드를 뜯긴 상인들에게 골드를 주는 것뿐!
다행히 사디크 교단은 나름 비자금이 많았다.
“후우. 대체 김태현 그놈은 무슨 생각인 거지……?”
“모험가 양반! 들어보니 자네가 우리 같은 사람들을 도와준다고 들었는데, 맞나?”
“예?”
퀘스트 하나를 끝내자마자 다가오는 다른 NPC들!
“우리도 좀 도와주게!”
“잠, 잠시만요. 골드 계산을…….”
“설마 다른 놈은 도와주고 우리는 안 도와준다는 건 아니겠지?!”
눈을 부릅뜨는 상인 NPC!
돈이 걸리니 어지간한 전사보다 더 위압적이었다.
버포드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요즘 나타난 모험가들이 그렇게 착하다며?
-그래! 그 아키서스 놈인가 뭔가 하는 놈보다 훨씬 더 우리를 잘 챙겨주더라고.
-그놈이, 아니, 그 사람이 무슨 신을 이야기했는데…… 이름이 뭐더라?
1왕자의 이름으로 골드를 뜯어내 호화 신전을 지어 올린 아키서스 교단!
골드를 풀어가면서 골드를 뜯긴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디크 교단!
뭔가 교단의 속성과 정반대로 놀고 있는 두 교단이었다.
* * *
“2왕자님! 병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잘했네. 김태현 백작.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군.”
“…….”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법!
2왕자는 같은 말을 기분 더럽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태현은 인내했다.
‘이 자리만 끝나면 네 이름으로 잔뜩 긁어주마!’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위치가 있다고 계속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2왕자.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자기만 안 건드리면 OK!
왕자의 재산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밖에 나가서 상인들의 재산을 뜯어내든 하급 귀족들의 재산을 뜯어내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2왕자였다.
[1왕자의 병사들을 위장시키고 2왕자에게 바칩니다. 발각될 경우 2왕자와의 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될 수 있습니다.]
‘상관없거든?’
태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메시지창을 무시했다.
“2왕자님, 제가 1왕자의 성을 둘러보며 알아낸 게 있습니다.”
“그게 뭐지?”
“바로 성의 경비가 허술한 곳입니다! 그곳으로 엄선한 정예병들을 보내면 크게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크하하! 그거 걸작이군. 김태현 백작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높은 친밀도와 공적치 포인트, 세력 내 평가까지.
태현이 말하면 이제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한 번은 믿어줄 왕자들이었다.
* * *
1왕자와 2왕자 사이를 이간질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1왕자와 2왕자의 이름으로 신전을 지어 올리고 성기사들과 사제들을 고용하고, 사방으로 보내서 재산을(?) 빼돌릴 시간!
거기에다가 이런 이간질을 통해 태현은 각각 왕자들에게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세력 내 공적치 포인트를 받았다.
물론 이 두 왕자는 공적치 포인트를 사용해도 왕궁 창고에서 아이템을 꺼내게 해주지는 않았다.
그냥 공적치 포인트!
그렇지만 두 왕자가 태현을 더 굳건하게 믿게는 해주었다.
“똑바로 서라, 건축가! 어째서 내가 오기 전까지 신전 건축을 완료하지 않았지?”
“하, 하려고 했는데…… 2왕자님께서 성벽 수리를 시키시는 바람에…….”
“너희 건축가 놈들은 말이 많아! 하라면 해야지! 너희처럼 게을러서는 2왕자님이 왕위에 오를 수 없다는 것도 모르나!”
남는 시간에도 절대 쉬지 않고 끝까지 쥐어짜는 태현!
2왕자의 성에 있는 건축가들은 고개를 푹 숙이며 잘못을 빌었다.
* * *
“아, 고민이야. 고민.”
“뭔 고민?”
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고민이 있을 수가 있나?
“더 크게 한탕 할 수는 없나…….”
“…….”
케인은 태현이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태현은 정말로 진지했던 것이다.
‘이 자식은 정말…… 그릇이 틀리다!’
욕망의 그릇 자체가 차원이 다른 수준!
“저기, 김태현 백작 맞으십니까?”
“?”
걸어가는 둘을 누군가가 불렀다. 망토로 몸을 가린 NPC였다. 태현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암살자냐?”
“예?! 아닙니다!”
“방금 예라고 하지 않았어?”
“그, 그건 당황해서 한 소리입니다. 제가 왜 김태현 백작님을 암살하겠습니까!”
“음…….”
태현은 2왕자의 성에서 한 짓을 돌이켜보았다.
NPC들이 암살자를 고용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
“하하, 아니면 말고. 그래서 네가 누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