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37화
물론 나중에 1왕자의 성에 불을 지르는 일이 생기더라도, 일단 지금은 웃어줘야 했다.
“물론입니다.”
“역시 김태현 백작만 한 충신이 없어! 하하핫!”
주변이 떠나가라 웃던 1왕자는 웃음을 멈추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지원금은 얼마나 낼 생각이지?”
“…….”
오랜만에 제대로 임자를 만난 태현이었다.
* * *
“태현 님, 부르셨습니까?”
오랜만에 태현을 만난 에드안은 휘파람을 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1왕자의 성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카나안 성은 크고 아름다운 성이었다.
그 크기에 걸맞게 훔칠 것도 많은 성!
대도적의 피가 끓어오르는 곳이었다.
“에드안, 오자마자 도둑질을 할 생각이냐?”
“네? 그런 생각 안 했습니다! 정말로요! 저기 안뜰의 창문으로 들어간 다음 벽을 타고 기어오르면 흔적도 없이 좀 털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
혼자 알아서 자백을 한 꼴이 된 에드안은 재빨리 태도를 바꿨다.
“그나저나 태현 님! 오크들을 물리치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하십니다!”
“음…… 방법을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것 같지만…….”
정답은 저 밖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사디크의 화염!
“후후. 그래서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겁니까? 저를 부르신 걸로 보아 분명 강철 같은 용기와 뛰어난 인내심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때문이겠군요. 맞습니까?”
“응. 도둑질 좀 해라.”
“…….”
[부하를 시켜서 카나안 성의 도둑질을 명령했습니다. 들킬 경우 오스턴 왕국 1왕자와의 사이가 악화될 수 있습니다.]
[악명이 오릅니다.]
‘이제 와서 뭘…….’
하도 악명이 높아서 이제 도둑질 정도는 기별도 안 가는 수준이었다.
“아니, 제가 대도적이긴 하지만…….”
“하기 싫어?”
“정말 하고 싶습니다!”
본색을 드러내는 에드안!
참새에게는 방앗간, 고양이에게는 생선 가게가 있듯이, 에드안에게는 이렇게 털어낼 게 많은 성과 도시가 있었다.
“좋아. 알짜배기로 쏙쏙 털어내는 거 잊지 말고. 그거 그대로 갖고 가서 내 영지에 쓸 거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걸리면 내가 시켰다는 말 하지 마라.”
“…….”
“그러면 난 좀 다른 곳 갔다 올 테니까, 알아서 잘 해.”
“예? 어디 가십니까?”
“1왕자가 지원금 내라고 해서 돈 구하러 간다.”
“지원금을 내실 겁니까?!”
“미쳤냐?”
“후후, 역시 태현 님.”
“일단 돈 내긴 내야 하니까 빨리 훔쳐내.”
“??”
에드안은 이해를 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
“네가 훔친 골드로 지원금 낼 거거든.”
에드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정말…….
나쁜 짓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태현!
* * *
태현은 1왕자한테 ‘아이고 우리 왕자님께 바칠 지원금 구하러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친밀도를 끝까지 찍은 1왕자는 헤벌쭉하게 웃으며 ‘아이고 우리 김태현 백작 잘 갔다 오게!’라고 말했고.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이다비는 말 위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골드로 산 말이 아니었다.
1왕자의 성에서 골라 탄 말!
주변을 보면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도 말 하나씩을 골라서 타고 있었다.
판타지 온라인에서는 말도 공짜가 아니었다. 비싼 말은 현실의 말만큼 비쌌다.
당연히 일반 플레이어들은 말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짜로 말을 구했으니, 다들 표정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공짜만큼 기쁜 것도 없었다.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돌고 있었다.
-김태현을 따라다니면 얻어먹을 게 많다!
물론 스미스나 이세연을 상대로 아이템 먹튀를 시도하는 미친 장면을 직접 봐야 하는 위험이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딱히 게임 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페널티 받으면 그만이지 뭐!
-페널티 안 받아봤자 어차피 랭커 경쟁에도 못 끼는데 알 바냐. 골드나 모아서 현금으로 바꾸자!
뭔가 쩨쩨하면서도 현실적인 사고방식!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게임 내에서 거물이 되어 한탕을 벌겠다’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파워 워리어 길드에 들어오지 않았다.
파워 워리어 길드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가늘고 길게 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소소하게 골드를 버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처음에는 이다비와 핵심 길드원들만 태현을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길드 내에서 이야기가 퍼지자 다들 태현을 따라다니고 싶어 했다.
-길마님, 저희도 따라다니면 안 됩니까?
-저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무게 용량도 커서 짐도 잘 드는데…….
물론 이다비는 아무나 받지 않았다.
-김태현을 따라다니고 싶으면 길드 내에서 지위를 올려야 하겠지?
-아니, 그거 언제 올려요!
-맞아. 저희가 이미 차단당한 곳이 꽤 많다고요.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질색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길드에서 더 높은 지위를 받기 위해서는 길드에 공헌을 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광고 리플 달기!
길드원들이 볼멘소리를 내도 이다비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러면 이런 기회를 그냥 얻겠다는 거야? 말도 안 되지!
이런 면에서는 철저한 이다비였다.
“어디 가냐고?”
이다비의 질문에 태현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내가 말을 안 했나?”
“네. 안 하셨는데요.”
“베알 성 가는데.”
“베알 성? 베알 성, 어디서 들어봤는데요…….”
이다비는 눈썹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오스턴 왕국에서 꽤 유명한 성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들었을 리 없었으니까.
“2왕자 성이잖아.”
“아, 2왕자 성…… 거기를 왜 가요?!”
화들짝 놀라는 이다비였다.
이미 1왕자를 따라온 태현이었다. 2왕자는 당연히 태현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2왕자가 머무르는 성에 갔다는 소식을 1왕자가 듣기라도 한다면?
그 뒷수습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1왕자가 저렇게 나오는데 1왕자한테 기대를 걸고 싶냐? 저건 딱 봐도 틀려먹은 놈이야. 처음부터 2왕자한테 갔어야 해. 2왕자는 분명 제대로 된 머리를 갖고 있는 놈이겠지?”
“그럴까요?”
“솔직히 형제 두 명이 다 이상한 놈일 리는 없지 않겠어? 오스턴 왕국이 무슨 시정잡배 소굴도 아니고.”
있었다.
* * *
“나야말로 진정한 왕! 그놈은 절대 자격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김태현 백작!”
“…….”
“왕이란 건 타고난 것이다! 다른 모든 것처럼! 나를 봐라! 왕 그 자체 아닌가!”
“아, 예…….”
왕이라기보다는 뒷골목 양아치 같은 모습이었다. 태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오스턴 왕국은 뭐 이렇게 이상하게 생겼냐?’
1왕자는 간신배, 2왕자는 양아치 같은 인상!
그러나 2왕자는 태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열정적으로 떠들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마다 자기 위치가 있고, 그 자리에 맞게 살아야 하는 법! 왕에게는 왕의 자리가! 하찮은 놈들에게는 하찮은 놈들에게 맞는 자리가 있는 것이다! 김태현 백작, 충성이란 뭐라고 생각하나?”
“……?”
태현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 뭐라는 거지? 태현은 케인을 쳐다보았다.
‘뭐 채찍과 당근을 쓰는 그런 걸 말하나?’
“뭔가 기분이 나쁜데…….”
케인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2왕자는 탁자를 내려치더니 외쳤다.
“충성이란 건 스스로 타고난 위치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내 밑으로 태어난 놈들은 날 위해 아무 대가 없이 모든 걸 바치는 것! 그게 충성이다!”
“…….”
그 순간 태현은 깨달았다.
아, 여기도 안 되겠구나……
1왕자고 2왕자고 열정페이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인물들!
태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김태현 백작. 1왕자한테 먼저 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
2왕자가 싫은 건 싫은 거고, 표정 관리는 표정 관리였다. 태현은 금세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흑, 1왕자의 부하들이 칼을 들이밀며 협박을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
[귀족 작위를 갖고 있습니다. 제 2왕자가 당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화신의 매력> 스킬로 인해 제 2왕자가 당신을 대하는 태도에 보너스를 받습니다.]
[중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제 2왕자가 당신을 대하는 태도에 보너스를…….]
이제는 익숙한 메시지창들!
NPC들은 어지간해서는 태현의 거짓말을 눈치챌 수가 없었다. 2왕자가 믿는 것 같자 태현은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저는 2왕자님이 진정한 왕이라고 생각했기에, 1왕자를 잘 속이고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 이게 바로 충성이다!”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1왕자 밑에서 그를 속여 2왕자님을 돕고 싶습니다!”
“오오! 김태현 백작! 뭐가 필요한가!”
“성의 창고를 둘러보고 쓸 만한 걸 챙겨도 되겠습니까?”
“그건 안 되네.”
‘이런 개XX가…….’
정말 오랜만에 강적들을 만난 태현!
보통 이 정도 친밀도에, 이런 이유까지 있으면 창고를 열어서 아이템 몇 개 가져가게 허락을 해줬다.
그렇지만 1왕자고 2왕자고 끝까지 자기 창고는 열지 않았다.
존경스러울 수준의 짠돌이들!
태현은 욕을 하고 싶었지만 아직 이성이 날아가지는 않았다.
‘침착하자. 침착해. 아직 뜯어먹을 방법은 있다.’
“그…… 렇다면 알아서 해보겠습니다.”
“김태현 백작.”
“……?”
“1왕자를 속이는 것도 좋은데, 나는 군사가 필요하네. 어디서 군사를 좀 가지고 와서 내게 바쳤으면 좋겠군.”
[2왕자가 당신에게 병력 요청을 합니다. 바치는 병력의 숫자가 많을수록, 질이 높을수록 2왕자가 크게 만족합니다.]
“……알겠습니다.”
주는 것도 없으면서 뻔뻔하게 요청만 하는 2왕자!
태현의 살의는 무럭무럭 끓어올랐다.
* * *
“세상에는 왜 이리 날강도들이 많지?”
‘네가 그런 소리를 할 처지냐?’
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날강도 기준으로 봤을 때 1왕자나 2왕자는 저 밑이었다.
그에 비하면 태현은 날강도들의 왕! 뜯어내는 솜씨가 저 1왕자나 2왕자들과 차원이 달랐다.
“아…… 진짜. 저 짠돌이들한테서 어떻게 뜯어낼 방법이 없나?”
원래 태현의 계획은 간단했다.
1왕자한테는 1왕자의 편인 척, 2왕자한테는 2왕자의 편인 척. 그런 식으로 굴면서 최대한 뜯어먹고, 마지막에는 도주!
둘이 싸우느라 정신이 없으니 태현을 쫓지는 못할 것 아닌가.
그런데 이 두 놈이 워낙 인색해서 뭘 주지를 않았다.
이렇게 나오니 오히려 오기가 생기는 태현! 두뇌가 풀가동되는 느낌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태현을 보며 이다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쁜 짓 하려고 저렇게 열심히 고민한다는 건 대체…….’
툭-
“……?”
길가에서 고민하던 태현.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부딪혔다. 부딪힌 NPC는 신경질부터 냈다.
“뭐야! 이 무례한 평…… 헉! 김태현 백작이시군요. 죄송합니다!”
[베알 성의 상인, 가르고가 당신의 작위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입니다.]
[명성으로 인해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가르고가 겁에 질립니다.]
가르고는 고개를 숙이더니 허겁지겁 도망쳤다. 그걸 본 이다비가 말했다.
“다른 왕국 귀족인데도 되게 공손하네요?”
“그야 내가 일단은 2왕자하고 친하고 명성도 높으니까…… 잠깐?”
태현은 멈칫했다.
아탈리 왕국에서야 사고를 치고 다니면 다른 귀족들이나 국왕이 태현을 공격하겠지만, 오스턴 왕국에서는?
“어이! 가르고! 거기 서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