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27화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
이세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정말 궁금한데…… 그리고 내가 그쪽을 만나면 무슨 소리를 할지 정말 오랫동안 생각을 하기도 했고…….”
말만 들으면 무슨 헤어진 연인 같은 애틋함!
그러나 태현은 저 말 속에 숨겨진 진실을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오랫동안 품어온 원한이라는 것 아닌가!
케인이 옆에서 소곤거렸다.
“뭐야, 네 여자친구야?”
“멍청한 놈아. 이세연이잖아.”
“?!?!?!?!?”
케인은 기겁해서 펄쩍 뛰려고 했다. 어쩐지 태현이 어울리지도 않는 존댓말을 써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세연이었냐?!
‘근데 저놈이 이세연하고는 무슨 관계지? 만난 적 없지 않나?’
태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여기서도 가면을 쓰고 다녔어야 했는데…….
이런 던전 구석진 곳에서 이세연 같은 사람을 만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김태현 맞지?”
“그래. 맞다.”
더 이상 거짓말은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태현이었다. 예의 바르게 하던 존댓말도 어딘가로 사라지고 평소의 태도로 돌아왔다.
“저번에는 왜 거짓말을 했어?”
“기억이 안 나는데…….”
“만났을 때 김대현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좀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랬지.”
“…….”
무언의 압박! 이세연은 말없이 태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레드존 길드하고 한바탕 치고받고 난 뒤라서 이름을 좀 숨겨야 했지.”
“아. 그래?”
이세연은 태현 옆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 사람은 전 레드존 길마 아냐?”
“……그렇지…….”
“저렇게 따르게 할 수 있으면서 신분을 숨겨야 했다고?”
“그때는 그랬거든?”
“……김태현……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게?”
뭔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끄는 이세연!
태현은 가슴이 오랜만에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이 대화가 재미없으니 대충 끝내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나? 괜찮아. 이해하니까.”
“아니. 우리가 판타지 온라인 1에서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착각 같은데.”
“아니야. 착각 아닌 것 같아. 요즘 계속 생각을 했었는데, 직접 마주 보니까 정말로 맞는 것 같아.”
옆에서 듣는 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둘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무슨 말 하고 있는 건지 알지?”
“모르겠는데.”
태현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이세연은 확신을 내렸다는 것을!
‘들켰군, 젠장.’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그냥……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김태현. 우리 길드에 들어올래?”
“!!!”
케인은 화들짝 놀랐다. 그 이세연의 길드에 넣어준다고?!
“당연히 들어가야…… 컥!”
케인을 다시 입 다물게 하고, 태현은 대답했다.
“안 들어가겠다고 한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지?”
“…….”
태현은 케인한테 귓속말을 보냈다.
-싸울 준비 해라.
-뭐?! 이세연인데!?
-이세연이 너 죽인다고 하면 그냥 죽을 거냐?
-그건 아니지만…….
-밑에 있는 놈들 전부 잘 들어라. 거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상황 봐서 빠르게 튀어나와. 던전 출구는 저 홀 끝에 있는 세 번째 방이다.
이 상황에서도 태현은 신의 예시로 출구를 파악하고 있었다.
-알겠어요! 그런데 대체 무슨 상황이…….
이다비의 말을 끊고, 태현은 본론으로 돌아왔다.
-전력으로 덤벼. 나도 공격 들어갈 테니까.
-으, 네크로맨서용으로 세팅 좀 해놨어야 했는데…….
케인은 입맛을 다셨다. 이세연을 상대해야 한다니.
‘아니, 이 멍청한 자식은 이세연이 길드 들여보내 준다는데 왜 안 들어가는 거야!? 배가 불러가지고!’
케인도 나름 이세연을 동경하는 플레이어 중 하나!
그런 이세연이 자기 길드에 태현을 넣어준다는데! 왜 이리 뻗대는 거란 말인가!
“둘이 갑자기 조용해진 거 보니까 싸울 준비하고 있나 봐?”
“하하. 그럴 리가.”
“그렇지? 내가 오해했나?”
이세연은 웃으면서 말했다.
“내 길드에 들어오라는 제안이 좀 무례하게 보일지 몰라도, 정말 좋은 제안일 거야. 내가 부길마 자리 제안한 거 알면 다른 애들은 기겁을 할걸?”
“부길마래! 부길마라고!”
“너 명치 한 대 더 맞고 싶냐?”
“…….”
케인은 조용히 찌그러졌다.
‘나 시켜주면 잘할 수 있는데!’
“그리고 지금 네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것도 알았으면 좋겠어. 내 길드에 들어오라는 건 너를 걱정하는 것도 어느 정도 있어서야. 네가 다른 사람들한테 맞고 다니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거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역시 모르고 있었구나? 요즘 대형 길드들끼리 연합하고 있는 거.”
“길드들끼리 뭉치는 건 언제나 있는 일일 텐데? 그리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그야 그 길드들끼리 뭉치게 된 데에는 네 탓도 어느 정도 있으니까 그렇지?”
원래 알아서 잘 먹고 잘살던 대형 길드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왜 갑자기 서로 뭉치게 되었는가?
최근에 있었던 일에서 몇 번이고 실패를 겪었기 때문!
꼭 태현뿐만 아니라, 실력 있는 플레이어들이나 소형 길드에게 퀘스트를 뺏기거나 던전을 뺏긴 대형 길드들은 매우 불만이 많았다.
-우리 길드가 덩치는 커도 요즘 나오는 이익이 별로 없어.
-갖고 있는 게 많으니까 그렇지. 관리해야 하는 던전이 많으니까 길드원들이 다 나서도 어느 곳 한 군데는 뚫리게 되어 있다니까.
-다들 겁이 없어가지고…… 보복을 한다고 해도 그냥 공격을 하니까 문제지. 솔직히 보복을 한다고 해도 그냥 다른 곳으로 도망쳐 버리면 찾는 것도 일이라고.
-아예 뭉치는 건 어떨까? 다른 길드들과 경쟁에서도 유리하고, 갖고 있는 거 관리하는 데도 더 유리할 거 아냐.
그 결과 삼삼오오 뭉치게 된 대형 길드들!
“뭐야. 나 때문 아니잖아? 나 혼자 방해한 것도 아닌데 왜 나 때문이야?”
설명을 들은 태현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세연은 단호했다.
“아냐. 너 때문이 가장 커.”
“…….”
“너한테 당한 길드들이 제일 많거든. 어쨌든 당장은 무슨 일이 없겠지만 연합하는 길드 중에 너한테 원한 가진 길드들이 많은데, 걔네들이 연합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가지?”
태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생각해 보니 저런 연합의 징조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쑤닝과 다른 길드들의 연합!
대형 길드 단독으로 힘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자 저렇게 연합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 대부분이 날 싫어하겠지.’
태현한테 뺏기거나 당한 길드들이 연합을 하면 누굴 먼저 공격할지 상상이 갔다.
태현이 생각에 잠기자, 이세연은 손가락을 들며 말했다.
“한 가지 더. 판타지 온라인 1에서 있었던 일이 알려지면 네 적은 몇 배로 늘 거야. 그러니까 내가 왜 길드에 들어오라고 하는지 알겠지?”
“거 더럽게 고맙다.”
“고마울 것까지야. 그냥 들어오면 돼.”
둘은 말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움직였다. 이미 서로 대답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거절이다!”
“그럴 줄 알았지만 정말로 들으니까 화가 좀 나네!”
파파팟!
태현과 케인은 동시에 움직였다. 케인은 슬픈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냥 들어가면 어디가 덧나냐 이 배부른 자식아!”
왜 줘도 못 먹는단 말인가!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 케인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노예의 근성, 노예의 분노. 노예의 쇠사슬!
삼연속 스킬 시전!
아키서스의 노예 직업 스킬이 과감하게 터져 나왔다.
“그 이상한 스킬 이름은 뭐야?”
이세연은 어이없어했지만, 방심하지는 않았다. 케인도 실력이 없는 플레이어는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네크로맨서는 방어력이 좋은 직업은 아니었다. 잘못해서 몇 대 맞으면 위험했다.
촤라라락-
버프를 받은 케인의 몸이 빛나더니, 옆에서 쇠사슬이 뻗어 나와 이세연을 묶으려 들었다.
-망령의 벽!
순식간에 이세연 앞에 세워지는 불투명한 벽. 케인에게서 나온 쇠사슬은 벽에 막혀 튕겨 나왔다.
-방황하는 해골! 적철 골렘 소환!
그리고 이세연은 바로 반격에 나섰다. 허공에 해골 문양이 생기더니 검푸른 화살을 마구잡이로 쏘아내기 시작했다.
“으아악!”
케인은 방패를 들고 스킬을 사용했다. 방패 위로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
[방황하는 해골이 쏘아낸 화살에 맞았습니다. 일시적으로 팔이 마비됩니다.]
[검은 오라에 맞았습니다. 노예의 근성으로 저항하는 데 성공합니다.]
저항에 성공해도 뭔가 기분 나쁜 메시지창!
그러는 사이 태현은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무기 스위치!
에다오르의 뜨겁게 끓어오르는 진홍빛 대검도 좋은 무기였지만, 네크로맨서를 상대할 때 더 좋은 무기가 있었다.
바로 고대의 망치였다.
‘역시!’
이세연은 태현이 활활 타오르는 오라를 뿜는 망치를 꺼내자 긴장했다.
태현의 영상을 전부 확인한 이세연이었다. 저 망치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언데드 상대로만 꺼내는 걸 보니, 언데드 상대로 효과가 있는 신성한 무기가 분명해. 김태현 직업도 아키서스 관련 직업이고.’
설마 여기서 김태현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세연은 언젠가 김태현을 만났을 때를 대비해서 상대할 준비를 마쳐놓은 상태였다.
지금 소환하는 골렘들이 바로 그 결과물!
이세연이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들을 뽑아 던지자 그 자리에 거대한 적색 골렘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언데드가 아닌 강력한 소환수. 네크로맨서가 꼭 언데드만을 부리는 건 아니었다.
“김태현을 막아!”
그러나 이세연은 한 가지 착각하고 있었다. 고대의 망치는 대 언데드용 무기가 아니었다.
생물만 아니면 데미지가 들어가는 무기!
-행운의 일격, 행운의 일격, 행운의 일격, 그림자 도약!
태현은 빠르게 뛰어오르더니 묵직한 일격을 골렘의 어깨에 작렬시켰다.
콰콰콰쾅!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골렘의 핵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약점을 공략했습니다. 적철 골렘의 제작법을 14% 획득했습니다.]
[기계공학 스킬이 오릅니다.]
[검술 스킬이 오릅니다.]
적철 골렘이 탐나기는 했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태현은 무너져내리는 골렘의 머리를 밟고 뛰어올라 곡예를 펼쳤다.
보는 사람의 입을 벌리게 만드는 곡예!
굉음이 터져 나오고, 두 번째 골렘이 무너져 내렸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이거 잡았다고 레벨업이냐?!’
골렘의 레벨이 얼마나 되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이런 비싸고 구하기도 힘든 걸 태현을 잡으려고 아낌없이 사용하는 이세연!
‘아니, 다른 놈은 몰라도 이세연은 내가 졌는데 이렇게 원한을 가지는 건 좀 말이 안 되지 않나?!’
태현은 속으로 불평하며 연신 스킬을 사용했다. 은신과 그림자 잠수.
길을 막는 골렘을 일단 치웠으니 그다음에 노릴 건 이세연이었다.
소환 마법에 뛰어난 마법사 상대로 소환수만 붙잡고 싸우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어떻게든 마법사 본인을 노려야 했다.
“칫!”
그러나 이세연도 이미 태현의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몸이 검게 물들더니 사라졌다.
‘저거 언데드한테만 드는 무기가 아니었어?!’
그녀로서도 적철 골렘이 순식간에 무너진 건 충격적인 일이었다.
어지간한 플레이어는 충분히 발을 묶을 수 있을 정도로 방어력이 높고 강력한 소환수!
그런데 태현의 공격에 저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사실 고대의 망치의 공격력, 행운의 일격으로 인한 데미지 뻥튀기와 신의 예지 스킬로 인한 골렘의 약점인 핵 파악까지 겹쳐진 콤보였지만 이세연이 거기까지 읽어내는 건 무리였다.
[상대방의 높은 행운으로 인해 <어둠으로부터의 도주>가 풀립니다.]
설상가상으로 태현의 행운 때문에 풀려버리는 스킬. 이세연은 손에 땀이 나는 걸 느끼며 다음 스킬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