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07화
“뭐? 너한테 잘 대해주는 사람을 속이고 퀘스트에 참가했다고?”
“죄, 죄송합니다. 우르크 지역으로 가는 파티는 안 보이고…… 거기 놓치면 못 갈 거 같아서…….”
“잘했다.”
“…….”
“알 게 뭐야? 네 퀘스트만 잘 깨면 그만이지.”
태현의 반응에 정수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그다음은? 데메르 교단 NPC들과 같이 갔는데 영향력 전파는 힘들었을 것 같은데.”
* * *
쾅! 콰콰콰콰쾅!
“성기사들은 앞으로! 마차를 끼고 싸워라! 공격을 막아! 사제를 먼저 보호해!”
“누나. 이거 너무 심한 거 같은데?”
“그, 그러게?”
우르크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을 반긴 건 분노한 오크들의 습격이었다.
에스파 왕국의 야생 오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한 오크 전사들!
그들이 한 번 도끼를 던질 때마다 사제들의 방어막이 팍팍 소리를 내며 깨져갔다.
“제가 돕겠습니다!”
정수혁은 지팡이를 들고 외쳤다. 아키서스 교단 마법사로 전직하고 나서 나름 많이 연습을 한 상태였다.
물론 연습을 한다고 적응이 되는 직업은 아니었지만…….
-아키서스를 향한 강한 믿음!
정수혁의 주변에 빛나는 방벽이 쳐졌고 동시에 패시브 스킬, <아키서스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콰르르르르-
“……?”
“뭐야?”
아주 깊숙한 곳에서 땅이 울리는 소리. 성기사, 사제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취이익, 지진이다! 지진! 저 기분 나쁜 놈들이 지진을 불러왔다!”
오크 전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그러나 이미 도망치기에 늦은 상태였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순식간에 땅이 갈라지며 위로 뾰족한 암석의 창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피해! 피해! 뒤로 물러서!”
성기사들도 혼비백산했지만 더 기겁한 건 오크들이었다. 지진을 직격으로 맞은 오크들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 나갔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 * *
‘이 자식은 뭐 이리 쉽게 레벨 업을 하냐……?’
정수혁도 태현과 같이 다니면서 나름 고렙 플레이어의 반열에 들어간 상황.
그런데도 저렇게 레벨 업을 쉽게 하다니.
태현은 배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다음은?”
-아, 예!
우르크 지역에 들어온 성기사 일행은 오크 전사들의 습격을 받았지만, 어떻게든 버텨내는 데 성공했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오크 전사들.
거기에 치열하게 저항하는 데메르 성기사들.
갖고 온 마차를 활용하고, 자연지형을 활용하고…… 어떻게 싸웠는지만 이야기해도 몇 시간이 그냥 갈 정도였다.
“아니, 잠깐. 잠깐.”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자 태현은 도중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다 죽었냐? 아니면 살았냐?”
-살았습니다!
“그래. 그러면 거기서부터 이야기하자.”
-간신히 공격을 버텨내고 기지를 만들었습니다. 기지를 만들고 나니까 한층 낫더라고요. 그렇지만 여전히 오크들은 우리를 공격하려고 해서, 다들 쉴 틈도 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저도 최하영 씨하고 같이 다니면서 오크 정찰대와 싸웠는데…….
얼굴을 보지 못하고 이야기하는데도 왠지 모르게 정수혁의 얼굴이 풀어진 느낌이었다.
“수혁아.”
-예?
“나 진짜 네가 최하영하고 어떻게 친해졌는지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
-네…….
칼같이 냉정한 태현!
“그냥 퀘스트 어떻게 됐는지나 좀 말해라.”
-……하나도 못 깼는데요.
“……그래. 앞으로 전화하지 말고.”
-선배님! 선배님! 끊지 말아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태현이 이런 걸로 농담을 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정수혁은 애절하게 외쳤다.
“에휴…… 됐다. 나도 그렇게 크게 기대를 하고 보낸 건 아니니까. 죽지나 말고 잘해봐. 데메르 교단 NPC들이 그렇게 있는데 아키서스 전도하는 건 힘들겠지.”
-아닙니다! 이제 부족원들을 찾아서 친해지고 있는 과정입니다. 조금만 더 하면 부족의 핵심 NPC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응? 데메르 성기사나 사제들은 뭐하는데?”
-제가 설득해서 데리고 온다고 했습니다.
“…….”
한마디로 데메르 교단 사람들한테 ‘맡겨둬! 내가 데리고 올게!’라고 한 다음 혼자 가서 깨고 있다는 것 아닌가.
‘얘가 원래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퀘스트를 열심히 깨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예전 순진무구하던 정수혁이 왜 이렇게 됐는지 양심이 아팠다.
“그래? 그러면 믿고 있을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근데 거기 오크들은 어떠냐? 그게 가장 궁금한데. 대규모 퀘스트 일어날 징조 같은 건 안 보이지?”
별생각 없이 한 질문. 당연히 대답도 ‘별 징조 없습니다! 여기 오크들은 그냥 알아서 서로 싸웁니다!’ 같은 대답을 기대했다.
그러나 나온 대답은 정반대였다.
-보이는데요?
“뭐?”
-원래 치고받던 오크 부족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연합해서 대규모 훈련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 아니. 그게 꼭 대규모 퀘스트의 징조는 아니잖아. 너도 거기 간 지 얼마 안 됐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아, 같이 간 데메르 성기사 NPC가 설명해 줬습니다. 원래 우르크 지역 오크들은 서로 싸우느라 제대로 연합이 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인지 다들 뭉쳐서 깃발을 엮고 같이 힘을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아주 칼을 갈고 있다고 하는데요.
“…….”
갑자기 태현은 등이 서늘해졌다. 분명 케인한테 죄를 뒤집어씌웠지만, 그래도 떨리는 게 사람 마음!
“그, 그래. 알겠다.”
-덕분에 저희는 공격을 덜 받았습니다. 오크 놈들이 무슨 일이 있는지 저희 같은 침입자들과 끝을 보지 않고 물러서더라고요.
“…….”
평소였다면 오크 전사들과 몇 번 싸웠을 때 더한 공격이 찾아왔어야 했지만, 지금은 오크들이 대규모 전투를 준비하고 있어서인지 그나마 정찰대 정도만 상대하면 됐다.
정수혁이나 최하영, 최하준한테는 좋은 일이었지만 태현한테는 더 등이 서늘해지는 일!
-그 오크 놈들이 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선배님? 누구를 죽이려고 그러는 걸까요?
“너 이 자식 알면서 이러는 거 아니지?”
-예?
“하긴, 됐다. 알겠어. 말해줘서 고맙고 퀘스트 열심히 잘 깨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아닙니다, 선배님! 저도 선배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꼭 여기 부족들을 설득해서 아키서스 교단으로 넣어 보겠습니다!
“그래. 별로 믿음이 가지는 않지만 파이팅이다.”
태현은 이때 정수혁이 나중에 무슨 일을 벌이게 될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예, 선배님! 선배님도 아키서스 교단 파이팅입니다! 저번에 사디크 교단도 한 방 먹었으니 선배님한테는 더 좋으신 기회일 겁니다!
“……응? 언제?”
-예? 선배님. 에반젤린 씨 영상 안 보셨습니까?
“걔 영상도 올렸냐? 미안. 관심 없어서.”
-…….
정수혁은 살짝 당황했다. 그래도 같이 싸웠던 동료이고, 나름 인기가 많았던 동영상인데…….
왜 이렇게 무관심한 거지?
-지금 주소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 별 관심 없는데…… 뭐 중요한 내용이라도 있어?”
-사디크 교단 추적 퀘스트 동영상입니다.
“그놈들은 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죽지를 않네. 알겠어. 줘봐.”
본거지를 잃고 도망친 이후 사디크 교단은 완전히 지하로 숨어들었다.
덕분에 대규모 토벌 퀘스트 같은 건 뜨지 않고, 사디크 교단을 추적하는 플레이어들에게 간간이 개인 퀘스트가 뜨는 정도로 바뀌었다.
‘에반젤린도 그런 거겠지.’
태현은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주소를 클릭했다.
* * *
“영, 영상 나오고 있는 거야? 녹화되고 있는 거 맞아?”
불안한 목소리. 에반젤린이 혼자 두리번거리며 말하는 것으로 동영상은 시작되었다.
누가 봐도 동영상 녹화를 처음 해보는 사람!
두꺼운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어색해하는 게 느껴졌다.
‘얘는 참 아싸 같단 말이지.’
본인도 아싸면서 다른 사람을 아싸라고 지적하는 태현이었다.
에반젤린은 어색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다시 헛기침을 했다.
“그, 그러면…… 퀘스트 시작!”
태현은 동영상 밑의 조회수를 확인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렇게 어색하고, 뭔가 어설퍼 보이는 동영상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
그러나 에반젤린이 올린 동영상은 이번 주 플레이어들이 올린 영상 랭킹 10위 안에 당당히 들어가 있었다.
‘뭐야, 이다음부터는 잘했나 본데?’
태현의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녹화를 시작할 때에는 어색하고 몸을 둘 곳을 몰라 했던 에반젤린이었지만, 일단 싸움이 시작되고 말을 할 필요가 없어지자 에반젤린의 장점이 나타난 것이다.
압도적 전투력!
말을 잘한다거나, 목소리가 좋다거나, 외모가 뛰어나거나…… 여러 가지 인기 있는 방송의 요인들이 있었지만, 결국 게임 방송은 실력이 우선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에반젤린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사디크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닥치는 대로 박살 내기 시작했다.
-우와. 포스 봐. 말 한 마디 안 하고 다 패버리네.
-눈 한 번 안 주고 사디크 성기사들 박살 내는 거 봤냐? 장난 아니다, 진짜.
처음 시작했을 때 어색한 대사는 다 잊어버리고, 사람들은 에반젤린의 묵직한 박력에 환호했다.
물론 진상을 아는 태현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뿐!
‘얘, 동영상 녹화하고 있는 거 까먹었구만……?’
이런 녹화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자기가 켜놨다는 걸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아무 말 없이 퀘스트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
-이 사람 김태현하고 같이 퀘스트 깨지 않았었어? 이것도 김태현하고 관계가 있는 건가?
-그러게. 김태현하고 사디크 교단 사이 안 좋잖아.
에반젤린의 겉모습을 알아본 몇 명은 태현의 이름을 언급했다.
방송에 나온 이상 아예 넘어갈 수는 없었던 것! 사람들의 기억력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혹시 이거 무슨 연계 퀘스트 아닐까?
-헉. 그러면 지금 여기로 가면 그 퀘스트에 참가할 수 있는 거 아냐? 나 저번 사디크 교단 토벌 퀘스트에 참가 못 해가지고 진짜 억울했는데.
“……?”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상상의 나래?
에반젤린이 사디크 교단과 싸우고 있는 건 사디크 교단이 갖고 있는 저주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에반젤린이 그러고 있는 건 태현이 사디크 교단의 적을 하나 더 만들어주려고 보냈기 때문!
연계 퀘스트고 뭐고 그런 거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벌써 알아서 분석 글을 써가면서 추측을 하고 있었다.
[김태현과 사디크 교단 퀘스트 분석 글]
[아키서스 교단과 사디크 교단의 관계는 과연 어떤 관계인가?]
[현재 에반젤린 플레이어가 하고 있는 퀘스트 지역에 대해서-앞으로 추후 있을 퀘스트 가능성]
태현은 별 생각 없이 했는데 벌써 장문의 분석 글이 몇 개나 올라온 상황!
‘……뭐 상관없나?’
태현 입장에서 사디크 교단이 있는 곳에 많은 플레이어가 가서 싸워주면 고마울 뿐!
안 그래도 아키서스 교단 부활 이벤트 때문에 사디크 교단이 신경이 쓰였다. 사디크 교단이 당연히 좋아하지는 않을 테니까.
적립된 원한만 따진다면 1순위!
태현은 동영상에 달린 리플과 주변 분석 글을 같이 보면서 에반젤린의 동영상을 마저 확인했다.
“죽고 싶냐? 여기까지 기어오다니.”
에반젤린이 싸우는 동안 저 멀리서 들려오는 거친 목소리. 태현도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사디크 교단 소속으로 왕궁 습격 퀘스트에도 참가했던 플레이어, 버포드!
‘내 반지!’
물론 태현에게 버포드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플레이어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