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204화
“그런데 계속 숨길 줄 알았는데. 발표를 했네요. 위험한 거 아닌가요? 정보를 깐 거잖아요. 벌써 전설 직업 아니냐는 말들 나오던데.”
“어차피 언젠가는 겪게 될 일이었어. 다른 전설 직업이면 모를까, 아키서스의 화신은 공개하고 사람들을 모아야 하는 직업이잖아.”
“그렇기는 하죠. 다만 너무 성급했던 게 아닐까 싶어서…….”
“김태현도 다 생각이 있겠지.”
“전설 직업 숫자 발표는 언제 하실 거예요? 저번에도 하신다고 해놓고 미루셨잖아요.”
“지금 전설 직업 도전하는 플레이어가 다섯 명 정도 있나? 두세 명 정도만 더 전직하고 나면 하자.”
“아니, 아무리 팬이셔도 그렇지…….”
“팬이라서 연기하는 거 아니거든? 숫자 깔끔하게 끊어서 발표하려는 거야.”
나중에 전설 직업이 조금 더 나왔을 때 현재 전설 직업이 몇 명이라고 발표한다면, 태현이 비교적 덜 주목받을 것이다.
윤주환은 굳이 따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최명성이 성질을 내면 피해를 보는 건 그였으니까!
“하하. 어쨌든…… 그런데 발표도 발표지만, 김태현은 다른 거 걱정해야 하지 않나요?”
“뭘?”
“이번 MBS에서 방송하는 거요. 아주 크게 광고 때리던데요. 편성표 잡아놨다고.”
“아. 에스파 왕국 퀘스트.”
둘은 에스파 왕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태현의 사악한 인성이 대폭발한 퀘스트 라인!
물론 최명성은 태현이 그런 사람인 줄 이미 알고 있었으니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야 그렇지만 시청자들은 퀘스트 보면 실망하지 않을까요?”
“그건 걱정 안 해도 될걸.”
“네? 아, 편집인가요? 그래도 바르도 시를 약탈하고 도망친 건 어떻게 편집으로 안 될 텐데…… 이미 다들 봤잖아요.”
“편집을 말한 게 아니야. 편집을 안 해도 상관이 없다는 거지. 넌 김태현이 왜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냐?”
“그야 판타지 온라인 1때부터 랭커로…….”
“야. 시청자들은 그걸 모르잖아.”
“그, 그러네요. 그러면…… 2만 봐도 김태현이 한 퀘스트는 어마어마하잖아요. 다른 랭커들이 이를 갈 정도니까요. 이세연이나 스미스 정도 아니면 비교가 안 되니까…….”
방송에서 공개된 태현의 퀘스트 라인업은 그야말로 초호화였다. 카테란드 섬부터 시작해서 사디크 교단까지.
다른 랭커들도 나름 비밀 던전 공략, 비공개 퀘스트 공략 같은 걸로 방송에서 승부수를 띄웠지만 태현에게는 승부도 되지 않았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압살!
“그래. 김태현이 깬 퀘스트가 어마어마하긴 하지. 근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
“……?”
“김태현이 인기가 있는 건 시청자가 대리만족이나 감정 이입하기 좋아서야.”
“???”
윤주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다른 랭커들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아니지. 조금 다르지. 랭커들은 대부분 다 대형 길드 소속이잖아? 대형 길드는 아니더라도 자기가 이끄는 탄탄한 길드 하나 정도는 데리고 다니면서 지원을 받는다고. 그리고 보통 길드들은 어느 정도로 이기적으로 굴게 되어 있어. 대형 길드는 특히 더하고.”
판타지 온라인은 거의 무한한 자유도를 갖고 있었다. 서로 이익을 얻기 위해 뭉친 길드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방송에 많이 노출되는 길드는 나름 눈치를 본다고 하지만, 그건 정말 생색을 내는 정도였다.
당장 쑤닝 같은 길드만 해도 아발랍 시에서 무차별 PK를 시도했고, 레스토랑 길드는 아예 재료 독과점이나 요리에 독 타기 같은 짓도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판타지 온라인에는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보다 소속되지 않은 일반 플레이어들이 훨씬 더 많단 말이야.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보통 시청자고. 그런 사람들 눈에 김태현이 어떻게 보이겠어? 길드에는 안 들어가지만, 길드와 맞서서 싸우는 사람으로 보일 거 아냐. 당장 레드존 길드 때 생각해 봐라.”
“그렇군요. 그래도 김태현이면 착한 이미지인데 이번에 바르도 시 같은 건 좀 그렇지 않나요?”
“아니라니까. 물론 김태현이 어쩌다가 저렇게 선량한 이미지가 되긴 했는데, 시청자들이 바보가 아니야. 마음속 깊숙하게 ‘김태현은 정정당당하고 올바른 성인군자다’라고 믿고 있지는 않다고. 당장 방송만 봐도 김태현이 정정당당한 방법을 안 쓴 게 얼마나 많은데. 김태현이 선량한 이미지가 생긴 이유는 하나야. 대형 길드와 싸우고 일반 플레이어들을 안 건드려서지.”
최명성은 태현이 인기 있는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단순히 랭커여서, 단순히 대단한 퀘스트를 깨서가 아니었다.
악당 이미지를 가진 길드들과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치열하게 맞서 싸웠기 때문!
그런 이미지를 기본적으로 깔고 갔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을 꼬셔서 카테란드 섬을 데리고 가도 좋게 해석이 됐고, 케인을 데리고 다녀도 좋게 해석이 된 것이다.
한 번 영웅은 끝까지 영웅!
최명성은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태현의 이미지는 어지간해서는 추락할 일이 없었다.
“김태현 이미지가 깎이려면…… 지나가는 저렙 플레이어들 상대로 무차별 PK를 하는 정도는 해야 할걸. 그래도 김태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유가 있었겠지’ 하고 편들어 줄지도 모르겠다. 이래서 이미지가 무서운 거야. 한 번 잘 쌓으면 정말 오래가거든. 이번에 아발랍 시에서 PK 한 거? 그건 오히려 김태현 이미지에 도움이 된다. 대형 길드들만 당했잖아.”
“바르도 시 약탈은요?”
“그건 플러스가 될 건 없지만 마이너스도 아냐. 일반 플레이어들이 죽지도 않았잖아. 바르도 시 플레이어들만 좀 불만을 터뜨리고 말걸. 바르도 시 약탈한 것 때문에 불편을 겪을 플레이어들보다, 김태현이 아발랍 시에서 대형 길드 때려잡은 걸 좋아할 플레이어들이 훨씬 더 많을 거야.”
최명성의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 * *
‘내가 아직 배울 게 많구나.’
배장욱은 태현의 에스파 왕국 퀘스트 방송이 나가고 난 이후, 새삼스럽게 생각에 잠겼다.
‘김태현은 이걸 예측했단 말인가!’
물론 아니었다. 태현은 그냥 ‘다른 놈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하고 방송에 내보내라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배장욱이 오해를 할 정도로, 반응은 뜨거웠다.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 개발 관련 방송은 언제 나오죠? 그것도 하죠?
-김태현 영지에서 경매할 때 참가하려면 조건 있습니까?
-아키서스 교단 새로 부활했다고 발표했는데, 아키서스 교단 관련해서 방송은 언제 해줘요?
이번 방송으로 시청률 기록을 다시 한번 돌파!
놀라울 정도로 태현이 바르도 시에서 약탈한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물론 태현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김태현 죽어라! 저게 사람이냐! 백정이지!
-자기 따르는 사람한테 폭탄 갑옷 입혀서 보스 레이드를 시도하네! 진짜 쓰레기라니까! 케인 불쌍하지 않냐? 진짜 불쌍하지 않냐?
-저놈 저거 보세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웃으면서 죽이네! 저게 인간이에요?!
아무리 봐도 태현한테 당한 게 많은 것 같은 사람들!
당연히 정체가 뻔히 보였다.
-아, 크라잉 해머 길드 또 왔네. 좀 가라니까. 너 크라잉 해머 길드원 맞지?
-아니, 성기사이즈킹 길드일 수도 있어.
-그놈들은 대체 왜 길드명 변경 안 당하는 거지?
-띄어쓰기를 잘해서겠지.
태현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반응은 여론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 * *
“아니 뭐 이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이러면 안 되지!”
“김태현도 영지 발전하려면 어쩔 수 없었을 거 아냐.”
“뭐? 넌 바르도 시 플레이어 아니냐? 지금 김태현 때문에 시설 다 못 쓰는데 그런 소리가 나와?”
“아, 좀 기다리면 회복되겠지! 아니꼬우면 다른 도시 가던가!”
바르도 시에서도 나뉘는 의견!
“김태현 그 XX 두고 보자! 다음에 보이면 반드시…….”
“반드시 뭐?”
“……다른 플레이어들을 불러서…….”
“에이.”
“그 자식 분명 가정교육을 개판으로 받은 놈이 분명해!”
꿈틀!
별생각 없이 태현을 욕하던 플레이어는 뒤에서 느껴지는 분노의 오오라에 움찔했다.
“뭐, 뭐야?”
턱-
갑자기 어깨동무를 하는 우락부락한 오크들!
“웃어. 웃으라고. 친한 척해.”
“얌전히 따라와라. 형님 기분이 안 좋으시니까.”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협박하는 오크들. 태현을 욕하던 플레이어는 겁에 질려서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현을 욕하는 건 좋아. 그런데 꼭 김태현의 가정교육을 욕해야겠어? 어?”
“김태현만 욕하란 말야. 김태현만!”
“알, 알겠습니다…….”
오크들에게 설교를 들은 플레이어는 혼비백산한 얼굴로 도망쳤다.
“형님, 잘 타일러 보냈습니다.”
“그래.”
김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는 로이가 있었다.
“다 썼냐?”
“다 썼다고 했잖아.”
“말이 짧다?”
“다, 다 썼습니다.”
“좋다. 꼬마야. 앞으로 충성과 견마지로를…… 아니, 그냥 됐고 하라는 대로나 해라.”
태현한테 버림받고 김태산한테 포위당한 로이는 무릎을 꿇고 항복을 외쳤다.
더 이상 사망해서 레벨이 깎이면 정말 위험하다!
-살려달라고! 뭐든지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그 결과, 김태산한테 붙잡혀서 쓰게 된 계약서!
‘어길 시 레벨 –5와 스탯 하락…… 이런 저주 계약서 어디서 산 거야? 랭커 마법사, 그것도 저주 전문 계열이 만든 거 같은데?’
정답은 현질!
아주 온갖 아이템을 다 현금으로 사고 있는 김태산이었다.
“길마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태현이 그놈 영지로 찾아간다!”
“예? 전면전입니까?”
“아니. 그놈 영지에서 싸우는 건 자살행위지. 길드원 중 몇 명만 변장시켜서 거기로 보내. 성규 아이템도 사오고, 쓸 만한 아이템 있으면 사와라.”
“아…….”
그제야 길드원들은 김태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양성규가 PK 당해서 뺏긴 아이템을 회수하고, 덤으로 다른 아이템도 찾으려는 생각!
태현한테 그렇게 당했는데도 이성적으로 계산을 할 수 있다는 게 감동적이었다.
“크흑, 형님……!”
“길마님이라니까. 이 자식들아!”
* * *
[교단의 수장으로서 교단의 과격도를 정해야 합니다. 교단의 과격도가 높아질수록 타 교단에 대해 적대적으로 변합니다. 과격도에 따라 관련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음…….”
교단 관련 메시지창. 태현은 고민에 잠겼다. 다른 교단과 달리 아키서스의 교단은 태현이 처음부터 다 만들어가야 하는 교단이었다.
수장이 태현이었으니, 선택도 태현의 몫!
“과격! 과격하게 갑시다! 극 강경주의!”
옆에서 오랜만에 보는 펠마스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철과 피의 규칙으로 운영되는 강력한 교단! 먼저 들어온 사람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강력한 교단! 저는 그런 교단을…….”
“아, 시끄러워.”
태현은 펠마스를 걷어찼다.
“네가 먼저 들어왔으니 왕 노릇 해보려는 거 다 보인다. 펠마스. 너는 나한테 참 도움이 되는 놈이야. 네가 가려는 길이랑 반대로 가면 일단 안전하거든.”
“그, 그런…… 오해십니다!”
“어쨌든 과격도는 최저로 간다. 강경은 무슨 강경이야.”
“새로 시작한 교단이 그러면 위엄이 없습니다, 태현 님! 새로 시작한 교단일수록 철저하고 강력한 모습을 보여야 사람들이 모입니다!”
“위엄은 무슨…… 애초에 구성원부터가 위엄이 없는데. 위엄 만들려면 너랑 네 친구들부터 쫓아내야 하는데, 나갈래?”
“생각해 보니 위엄은 필요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대륙에 필요한 건 사람들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손을 잡아줄 친구 같은 교단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