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95화
‘왕국군과 같이 싸우는 건 패스. 현실적으로 힘들 거 같고.’
태현은 방법 중 하나를 지웠다. 아무리 혀를 잘 놀려도 에스파 왕국군이 같이 싸워줄 것 같지는 않았다.
에스파 왕국군에게 에다오르가 포위당한다면 그 이후부터는 태현이 끼어들 수 없다고 봐야 했다.
‘아. 뭐 이러냐. 잡을 방법도 확실하게 있는 게 아닌데 잡을 타이밍도 까다롭네.’
딱히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잡을 수 있는 타이밍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다 태현이 벌여놓은 업보였지만.
뒤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아발랍 시!
‘다른 세력들이 끼어들면 오히려 내가 잡기 힘들어지는군.’
역설적이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그러면 차라리 다른 놈들 오기 전에 잡아버리면…… 젠장. 아버지 괴롭히는 걸 포기해야 하나?’
에다오르가 빨리 죽는다면 그의 군세를 김태산이 있는 곳으로 보내는 계획이 틀어졌다.
그 순간 태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다.
‘잠깐…… 지금 에다오르 군세 내에서 내 위치가 어느 정도지? 에다오르만 죽이면 군세를 내가 지휘할 수 있는 거 아냐?’
순간 번뜩인 생각이었지만 곰곰이 씹어볼수록 그럴듯했다.
아발랍 시와 길드 플레이어들을 바쳐서 얻은 군세 내의 자리!
덕분에 왕국군과 협조는 하지 못하게 됐지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에다오르가 죽는다고 나온 악마들이 바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고, 그다음 위치를 따를 것이다.
게다가 강자를 존중하는 게 악마들이니…….
‘지금 당장 에다오르를 죽이고 군세를 먹튀한다?’
남들이 들었다면 미쳤다고 했을 테지만 태현은 아니었다. 태현은 머릿속에서 착착 그림을 그려나갔다.
‘이거 할 만하다!’
태현은 벌떡 일어섰다. 다른 플레이어들을 불러 모아야 했다. 에다오르를 잡으려면 혼자서 움직일 수는 없었으니까.
‘아, 그 전에 상자는 마저 까고.’
상자 안에서 나온 다른 상자. 태현은 바로 상자를 열었다.
파아앗!
A급 스킬 비전서:
직업 스킬을 모아 놓은 비전서입니다. 어떤 직업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뭔 마트료시카냐?’
상자를 까고 나온 상자를 깠더니 다시 상자 같은 아이템이 나오는……
-사용.
‘기왕이면 마법사 관련 직업이면 좋겠는데…….’
태현은 아직도 마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A급 스킬 비전서 같은 아이템이라면 분명 직업 스킬 내에서도 강력한 스킬들이 나올 것이 분명!
쓸 만한 마법 한두 개만 건져도 아주 오랫동안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라제단 대장장이의 비전을 얻었습니다.]
‘라제단 대장장이?’
대장장이 계열 직업이라는 건 알겠지만 어떤 특성인지는 스킬 이름을 봐야 알 것 같았다.
[스킬-<장비 위조>를 얻었습니다.]
[스킬-<장비 강제 착용>을 얻었습니다.]
[스킬-<불안정한 장비 제작>을 얻었습니다.]
‘…….’
태현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 * *
태현은 오랜만에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내가 최근에 뭔가 나쁜 짓을 해서 벌을 받는 건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도 태현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잘못한 게 없으니 그냥 운 때문이군!’
10초도 가지 않고 끝나는 자기반성!
라제단 대장장이의 직업 스킬들은 결코 나쁜 스킬들은 아니었다. 스킬의 성능들을 봤을 때 직업 스킬 중에서도 얻기 힘든 직업 스킬들이 분명했다.
문제는 <라제단 대장장이>라는 직업 말고 다른 직업이 걸렸으면 더 쓸 만하고 더 좋은 스킬들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
‘하필 왜 이상한 직업이 걸려가지고…… A급 스킬 비전서 같은 아이템은 구하기도 힘든데.’
태현은 구시렁대며 스킬을 확인했다.
<장비 위조>
장비의 겉모습과 상태 창을 위조할 수 있습니다. 스킬 레벨이 높아질수록 지속 시간과 가능한 위조 범위가 늘어납니다.
<장비 강제 착용>
장비 제한을 무시하고 장비를 강제로 착용합니다. 스킬 레벨이 높아질수록 페널티가 줄어듭니다.
<불안정한 장비 제작>
‘불안정’ 속성이 달린 장비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불안정’ 속성이 달린 장비는 일반 장비보다 더 강력한 성능을 가졌지만 쉽게 파괴됩니다.
‘으음…… <장비 강제 착용>은 확실히 좋은데. 이런 스킬을 여기서 구할 줄은 몰랐어.’
태현의 직업은 대장장이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지만, 태현이 얻을 수 있는 대장장이 스킬들은 한계가 있었다.
다른 대장장이들이 직업 퀘스트를 깨고 마법검이니 속성 부여니 뭐니 각종 스킬을 얻는 동안 태현은 기본적인 대장장이 스킬만 써왔던 것!
대장장이의 스킬 중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장비의 제한을 무시하고 착용하는 스킬이었다.
레벨, 스탯 같은 제한을 무시하고 착용할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장점. 이렇게 스킬을 얻게 될 줄은 상상치도 못했었다.
‘문제는 장비 위조나 불안정한 장비 제작인데…….’
태현은 스킬을 다양하게 익히는 걸 전혀 꺼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잡캐다 뭐다 했지만 태현은 오히려 그런 다양성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이건 좀…….
‘하. 인생을 선하게 살려고 하는데 왜 자꾸 이런 스킬들이 나올까?’
등을 떠미는 것 같은 스킬들!
태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루포는 태현을 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상자를 까더니 갑자기 혼자 왜 저런단 말인가.
* * *
“왜 불렀냐?”
“맞아요. 우리가 할 이야기가 뭐가 있다고요. 흥흥.”
싸늘한 양성규와 이다비의 태도. 물론 태현은 그렇다고 해서 반성하거나 하지 않았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
“내가 두 사람을 PK 못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할 이야기 없으면 그냥 서로 붙어볼까?”
바로 나오는 PK 협박!
아발랍에 있던 길드들을 뒤통수치고 박살 낸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도 한 때 손을 잡았던 그들을 바로 공격할 수 있다고 말하다니.
“…….”
‘진짜 개XX다 정말! 김태현 인성 좋다고 한 사람 누구야?!’
이다비는 방송과 실제는 생각보다 많이, 아주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생각해 보니 할 이야기가 많은 거 같기도 해요!”
그러나 어쩌겠는가. 법은 멀고 칼은 가까운데. 이다비는 억지로 웃었다.
“하하. 그렇지? 우리 친구잖아.”
“친구예요, 친구!”
손을 잡고 까르륵대는 둘을 보며 양성규는 고개를 저었다. 못 볼 걸 보는 기분!
‘빨리 이곳을 뜨든가 해야지…….’
“태현아, 미리 한 가지만 말해두겠는데, 이제 협박해도 소용없다. 죽으면 그냥 깔끔하게 에다오르 군세를 떠날 생각이거든. 그러니까 태산이 형님을 공격하려는 데 날 이용할 수는 없을 거다.”
양성규는 마음을 굳혔다. 사망 페널티가 두려워서, 그리고 ‘설마 태현이 뭘 어떻게 하겠나’ 싶어서 초반에 안일하게 대처했던 게 화를 키웠다.
태현은 정말…… 1을 생각하면 100을 보여주는 괴물!
별생각 없이 같이 싸웠다가 김태산을 찌르게 된 상황. 양성규는 더 이상 태현을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PK 협박? 그건 이다비처럼 잃을 게 많은 사람한테는 잘 먹혔지만 양성규에게는 아니었다.
‘죽으면 그냥 사망 페널티 받고 에다오르 군세를 떠난다. 차라리 그게 나아.’
페널티 때문에 구질구질하게 끌려가다가는 본전도 못 건진다. 그게 양성규의 냉정한 판단이었다.
“하하. 아저씨. 제가 언제 아저씨를 협박했습니까?”
“……방금 하지 않았어요?”
꽉!
태현은 잡고 있던 이다비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아야! 아야야야!”
“협박이라니. 잘못 들었지?”
“네! 네! 잘못 들었어요! 제가 잘못 들었어요!”
태현은 이다비의 손을 놓고 말했다.
“그리고 아저씨. 여기 부른 건 아저씨한테도 좋은 이야기입니다.”
“……?”
“에다오르를 칠 생각이거든요. 같이 하시죠.”
“……?!”
어떤 이야기가 나와도 놀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양성규는 다시 놀라야 했다.
* * *
“에다오르를 잡는다고? 그것도 지금?”
태현한테 설명을 들은 양성규는 얼굴을 굳혔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에다오르를 잡으면 에다오르 군세를 형님한테 보내려는 네 계획이 틀어질 텐데?”
“하하. 아저씨. 제가 설마 진심으로 아버지 괴롭히려고 악마들을 도시에 보내겠습니까? 그렇게까지 하겠어요?”
‘그렇게까지 할 놈이잖아, 넌…….’
양성규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옆에서 듣는 이다비는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아버지 겁 좀 먹으라고 그렇게 말한 겁니다. 지금쯤 들으셨을 테니 이것저것 고민 좀 많이 되시겠네요.”
“으음…….”
“애초에 그 로이란 놈을 제가 믿을 거 같습니까? PK나 하고 다니는 놈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김태산은 이 소식을 듣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태현은 처음부터 에다오르를 잡을 생각이었단 말인가? 김태산이 있는 도시로 보내는 건 그냥 위장이었고?
‘또 이 녀석한테 놀아났나?’
양성규는 설마 지금도 놀아나고 있다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에다오르를 잡으려면 가능한 준비는 다 하고, 여기 전력을 모두 동원해서 한 번에 쳐야겠죠. 그래도 보스 몬스터인데.”
“잠깐, 우리는 그게 안 되는데. 덤비는 순간 에다오르가 독을 발동시킬걸.”
“해독제 있습니다.”
“……해독제 있는데 이제까지 안 준 거예요?”
이다비가 중얼거렸다.
“뭐 불만이라도?”
“없어요…….”
“그래. 독은 해독제로 풀면 될 겁니다.”
“그 해독제 진짜 맞냐?”
양성규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하도 많이 속아서 이제 태현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잘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아저씨, 왜 이렇게 의심이 느셨어요? 제 마음이 다 아픕니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이겠냐. 그리고 태현아. 내가 말하려다가 만 게 한 가지 있는데, <레스토랑> 길드가 독 요리를 판다고 다른 요리사들한테 말해준 플레이어 이름이 양성규라더라. 뭔가 이상하지 않냐?”
“별로 안 이상한데요. 이름 같은 건 흔하잖아요?”
“너무 공교롭지 않냐? 응? 나중에 레스토랑 길드가 복수를 할 때를 대비해서 이름을 지어놓은 거 같지 않냐?”
“하하. 아저씨. 피해망상입니다, 그거.”
“어쨌든 난 그 해독제 못 믿겠다.”
“못 믿으시면 어쩌시려고요?”
“이걸 쓸 거다.”
양성규가 꺼낸 건 주문서였다. 은은하게 녹색으로 빛나는 주문서.
상급 감별 주문서:
아이템을 대상으로 상급 감별을 사용합니다.
효과는 간단했지만, 절대로 흔한 아이템은 아니었다. 경매에 나오면 몇백은 기본이고 물량이 달리면 천까지도 가는 아이템!
던전이나 퀘스트를 깨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이템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중요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전투 직업은 아이템 확인을 할 스킬이 없었다. 제작 직업을 데리고 가거나, 제작 직업에게 가거나, 그도 아니면 이렇게 주문서를 써야 했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 편리성 때문에 중요한 퀘스트를 깨는 플레이어들은 주문서 한두 장 정도는 챙기려고 했다.
제작 직업을 데리고 가는 건 힘들었고, 매번 찾아가는 건 시간이 아까웠으니까.
돈 나가는 아이템 아니랄까 봐 이다비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걸 쓰는 건 너무 아깝지 않아요? 그냥 하급 감별 주문서를 쓸 테니 저건…….”
“아냐. 저 녀석한테는 전혀 아깝지 않아!”
뿌리 깊은 불신!
양성규는 망설이지 않고 태현이 건넨 해독제에 감별을 사용했다.
“…….”
물론 결과는 멀쩡했다. 멀쩡한 해독제였다. 태현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