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92화
“아니, 나도 원래 이렇게까지 하려고 한 건 아니었거든? 근데 저기 길드 놈들이 진짜 끝까지 눈치 못 채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니까 흥이 올라서…….”
“…….”
케인, 이다비, 양성규 등 자리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태현을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방금 아발랍 시의 길드들을 전부 박살 내놓고 한다는 소리가 저거?
“뭐 결과는 좋잖아?”
“내 악명을 봐라! 지금 죽었다가는 페널티가 장난이 아니겠다!”
“맞아요! 어떻게 보상해 줄 거예요!”
케인과 이다비는 척척 손발이 맞았다. 태현한테 당한 게 많은 두 사람!
태현은 대답 대신 둘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중간한 말보다 더 무서운 대응이었다. 그러자 케인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하하. 생각해 보니까 나는 원래 악명을 신경 안 썼었지? 악명 높은 게 오히려 멋있기도 하고 말이야.”
“저기요?!”
졸지에 혼자 남게 된 이다비가 당황해서 케인을 쳐다보았다.
‘악명이라. 잠깐, 나도 악명 좀 조심해야 하는데.’
태현은 스탯을 확인했다. 악명이 지금 얼마쯤 올랐을까?
명성 : 5,760
악명 : 5,520
신성 : 1,823
‘…….’
태현도 순간 움찔할 정도로 악명이 올라있었다. 태현의 악명은 예전에도 몇 번 사고를 친 것 덕분에 높은 편이었지만, 명성이 워낙 높아서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악명이 명성 앞까지 바로 따라와 있었다. 길드들을 갈아버린 덕분!
“으…… 판타지 온라인 1 때 하던 버릇이 나와 버렸어.”
“……?”
태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한 번 싸우기 시작하니 신이 나서 너무 나간 것이다.
-위대한 악마 태현 님을 찬양하라!
-마족의 피보다 더 진한 마족의 피를 가지신 분!
[현재 에다오르의 군세 내에서 당신의 자리는 <에다오르의 왼팔>입니다.]
[에다오르는 당신에게 인간을 향해 보낼 수 있는 최고의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중급 뿔 악마, 중급 대형 악마, 중급 날개 악마, 중급 흑마법사 마족을 마음껏 지휘할 수 있습니다.]
[상급 악마 전사를 부릴 수 있지만, 지휘할 경우에는 지휘 가능한 숫자가 줄어듭니다.]
아발랍 시에서 길드 몇 개를 갈아버리다 보니, 태현을 따르던 악마들은 태현을 극도로 존경하게 됐다.
거기에 에다오르의 굳은 신임은 덤!
‘적당히 길드만 갈아버리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는데 일이 너무 커졌네.’
초롱초롱하게 태현을 쳐다보는 악마들의 눈빛! 이놈들만 데리고 가도 작은 마을 하나 정도는 그대로 밟아버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태현 님. 제게 이름을 지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
[당신 곁에서 가장 많이 싸운 악마가 승급을 요청합니다.]
[이름을 지어주고 승급시킬 수 있습니다. 이 악마는 당신을 독자적으로 따릅니다.]
“……!”
등에 네 장의 날개를 단 우락부락한 악마 전사가 태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태현은 살짝 당황했지만 어떻게 된 건지 바로 알아차렸다.
너무 충실하게 악마스러운 짓을 한 덕분에 그가 이끌던 악마 부하들이 성장하게 된 것!
‘잠깐, 날 독자적으로 따른다고? 에다오르도 배신하게 할 수 있다는 건가?’
생각해 보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에다오르가 불러내기는 했지만 결국에 이들은 악마. 상황에 따라 밥 먹듯이 배신하고 강한 자를 따르는 종족이었다.
‘날 독자적으로 따르게 하는 악마들을 더 늘리면 내가 계속 부릴 수 있다는 거겠지? 그러면…….’
이제 뒤통수 칠 길드가 없어지자 에다오르의 뒤통수를 치려고 계획하는 태현!
뒤통수의 달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좋아. 네 이름은…….”
“…….”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데. 그냥 긴꼬리원숭이로 할까?”
“지금 설마 저 악마 꼬리가 길다고 그렇게 지은 건 아니죠?”
이다비는 태현이 농담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태현은 진지했다.
“하긴. 너무 길지? 긴꼬리 1로 하자.”
“……그런데 왜 1이에요?”
“앞으로 더 생기면 뒤에 2, 3, 이렇게 붙이려고.”
무성의의 극치!
그러나 악마 전사는 그것도 좋다는 듯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광입니다!
“그래. 긴꼬리 1. 힘내라.”
-주인이여! 악마 같은 걸 부리면…….
“폼이 난다고? 나도 알아.”
태현은 대답과 함께 용용이를 들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시끄러운 불평을 먼저 차단!
지금 에다오르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용용이를 괜히 내버려 뒀다가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위장을 잘했지만 그래도 신수 아닌가.
-읍읍읍!
“좋아. 이제 도시에 남은 사람도 없고…… 에다오르나 만나러 가야겠군. 투기장에 있겠지?”
태현이 워낙 악마들을 이끌고 일 처리를 잘해 준 덕분에 에다오르는 아직도 투기장에서 폼을 잡고 있었다.
“태현아. 너 근데 계속 에다오르 퀘스트 깰 거냐?”
“원래 길드 정도만 갈아버리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부하도 받고. 슬슬 튀어도 괜찮을 것 같긴 하네요.”
‘상자도 열어야 하고.’
태현을 따라다니는 악마들 때문에 받은 상자를 못 여니 살짝 답답했다.
“잠깐만! 우리는 못 튀잖아!”
“그러게 누가 그렇게 술 먹으라고 했습니까?”
“이, 이 치사한 녀석……!”
“자기 혼자 도망치면 안 되죠!”
양성규와 이다비는 태현을 붙잡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태현이 싹 튀어버리면 곤란해지는 건 둘!
에다오르와 그의 부하들은 쌩쌩하니 앞으로 퀘스트는 계속 진행될 거고, 그들은 도망칠 수도 없으니 코가 꿰여서 계속 퀘스트를 깨야 했다.
물론 보상이야 나오겠지만 에다오르를 따라다니면서 할 퀘스트가 무엇이겠는가. 다른 도시를 박살 내고 다니는 파괴 퀘스트!
하고 나면 나중에 뒷감당을 다 고스란히 해야 하는 그런 퀘스트였다.
태현이야 그런 걸 생각 안 하고 날뛰는 사람이었지만 둘은 아니었다.
태현이 붙잡은 둘을 밀어내자 양성규는 화를 내며 말했다.
“이 녀석 진짜…… 됐다!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생각이 있지!”
“오. 어떻게 하시려고요?”
“에다오르 퀘스트를 깨고 있는 게 너뿐만은 아니잖냐! 나도 에다오르한테 가서 부하를 빌리겠다!”
“……!”
옆에서 듣던 이다비가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런 좋은 방법이?
태현을 따라 다른 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을 치고 다니는 동안, 그들도 꽤 많은 공적치 포인트를 쌓았다.
태현만큼 에다오르와 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악마들을 빌릴 수 있는 수준!
“빌려서 뭐하시려고요? 제가 데리고 다니는 놈들 수준으로 만드시려면 시간 좀 걸릴 텐데.”
“너 믿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양성규는 그렇게 말하고 에다오르가 있는 투기장으로 향했다. 이다비도 그 뒤를 따랐다.
술을 안 마신 태현과 달리, 술을 마신 그들은 일단 에다오르의 퀘스트를 따라가면서 기회를 엿봐야 했던 것이다.
여차하면 혼자 도망칠 수 있는 태현과 같이 일하는 것보다는 아예 단독으로 에다오르에게 악마 부하들을 받아가면서 일하는 게 훨씬 더 나았다.
“안 잡냐?”
“뭐 어차피 저 둘이 내 적이 되지는 못하니까. 쑤닝이나 크라잉 해머 같은 길드들도 다 박살이 났고…….”
원하는 걸 다 이룬 태현은 태연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주변에 아쉬운 게 많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태현은 그냥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그냥 지금 튈까?’
에다오르의 뒤를 치는 건 남는 것도 많았지만 그만큼 위험했다. 지금으로는 어림도 없고 퀘스트를 깨면서 기회를 엿봐야 했으니까.
게다가 왕국에 악마가 나타나서 난리를 치는 퀘스트는 언제나 끝이 좋지 않았다.
악마가 얼마나 강하든 간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몰려와서 집중 공격을 하기 때문이었다. 악마가 더 많이 깽판을 치면 칠수록 보상이 커졌기에 더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에다오르의 뒤를 노리다가 잘못 엮이는 수가 있었다. 그럴 바에는 그냥 지금 부하로 삼은 악마 몇을 데리고 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길드들을 갈아버리고 얻은 산더미 같은 전리품들! 하도 많아서 태현은 다 확인도 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자리를 잡고 제작 스킬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헉, 헉헉…….”
“……?”
싸움으로 인해 반쯤 박살이 난 도시 성문으로 누군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당연히 NPC는 아니고 플레이어였다.
“뭐냐, 저거? 왜 지금 아발랍 시에 찾아오는 거지?”
이미 아발랍 시에서 일어난 사건은 온갖 사이트에 다 퍼진 상태.
물론 그걸 못 봤더라도 도시 주변이 박살이 난 걸 봤으면 알아서 ‘무슨 일이 생겼구나’하고 눈치를 채야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시로 다가오다니.
“글쎄? 여기에 원하는 게 있어서 아닌가?”
“여기에 원하는 게 뭐가 있는데?”
“에다오르 군세에 들어가려고 하거나…….”
충분히 그럴듯한 이유였다. 태현처럼 악마를 부려서 다른 길드들을 박살 내려는 사람들 말고도, 흑마법사나 악마 관련 직업을 가진 플레이어들에게 에다오르 같은 악마가 나타난 건 기회였다.
“……!”
그러나 그 생각은 곧바로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다. 멀리 있던 플레이어가 태현을 보고 바로 손을 흔들며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너 보고 손 흔드는데?”
“에다오르 군세에 들어가려는 건 아닌 모양이군. 그러면…….”
“너 노리는 거 아냐?”
“아니, 꼭 날 노리는 놈이란 법은 없잖아. 여기 주변에 있는 플레이어면 무조건 날 노려야 하냐?”
“네가 그런 짓을 해놓고 암살자가 안 붙길 바라면 양심이 없는 거지!”
태현의 뻔뻔함에 케인은 혀를 내둘렀다.
지금 이 아발랍 시에서 태현이 죽인 플레이어가 몇 명인데!
강제로 로그아웃 당한 길드원들이 바로 암살자들을 고용해서 보내도 놀랍지 않았다.
“정당한 싸움이었다고. 꼭 플레이어가 날 노리는 암살자라는 법은…….”
“김태현……!”
“너 부르는데?”
“젠장. 암살자 맞군.”
태현은 바로 롱소드를 뽑으려고 했다.
“……님!”
“……?”
“찾고 있었습니다!”
“네가 누군데?”
“전 로이라고 합니다.”
“혹시 길드 이름은 로켓단인가?”
“…….”
만나자마자 로이는 순간 울컥했다. 태현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느낌!
김태산에게서 받은 느낌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사람의 속을 뒤집는 천부적인 재능.
* * *
태현이 악마들을 이끌고 길드들을 이간질하고 때려 부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그걸 생중계하고 있었다.
아발랍 시에는 길드 플레이어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무소속 플레이어들도 많았던 것이다.
그들은 에다오르가 나타나고 도시가 싸움판이 되자 일단 밖으로 도망친 다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호기심에 차서 지켜보기 시작했다.
“공중 부양 마법 걸어드립니다! 여기 언덕 위에서 보면 도시 안 싸움 그대로 구경 가능해요!”
“얼마에요?”
“2골드만 받겠습니다.”
“2, 2골드?! 공중 부양 마법 걸어주는데 2골드가 말이 돼요!?”
“싫으면 마세요. 걸어달라는 사람 많으니까.”
“싸움 구경할 때 좋은 음료수 팝니다! 중급 요리 스킬 찍은 요리사가 만들었어요!”
“어두운 밤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야간 시야 마법 걸린 아이템 팝니다!”
태현과 길드들의 싸움 덕분에 도시 밖에서는 임시 축제! 근처 언덕에서는 싸움을 구경하는 플레이어들로 북적댔다.
아발랍 시가 박살 나는 건 분명 손해였지만, 그보다 지금 눈앞의 싸움이 더 흥미진진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상대는 이제까지 도시 내에서 깽판이란 깽판은 다 치고 다녔던 길드들!
“오, 오오……! 쑤닝 길드가 도망친다!”
“크라잉 해머랑 성기사 놈들이 이긴 건가?”
그러나 잠시 후…….
“크라잉 해머가 털린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또 잠시 후.
“성기사 놈들이 튄다! 성기사 길마가 죽었어!”
“뭐?! 그게 말이 돼?!”
해가 뜰 때쯤이 되자……
“…….”
그저 남는 건 경악뿐! 아무도 떠들지 않고 몰두해서 태현의 싸움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