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81화
“총독,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말이야…….”
태현은 총독의 눈치를 보고 슬슬 말을 꺼냈다.
‘능력 없는 부하들’에 대한 뒷담으로 총독과 나름 친해진 상태였다.
원래 사람은 같은 것을 좋아할 때보다 같은 것을 싫어할 때 더 빨리 친해지기 마련!
거기에 화술 보너스와 작위 보너스까지 들어가니 다른 플레이어들은 몇 달을 시도해도 뚫지 못했던 친목의 문을 뚫을 수 있었다.
“이 투기장에서 아주 큰 이벤트가 열린다고 들었는데?”
“그렇지.”
“나도 거기에 참가하려고 왔지.”
“백작이나 되어서 말인가? 그대도 참 체면이란 게 없군.”
“백작이면 뭐 어때? 돈과 권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돈이야 그렇다 쳐도 이 도시의 권력이 필요한가? 그대 영지로 가면 그대가 왕이나 다름없을 텐데.”
“…….”
무심코 아픈 곳을 찔린 태현이었다. 영지도 있고 작위도 있지만…… 정작 그 영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 하하…… 뭐 어쨌든. 거기 보상에 흥미가 있어서. 보상이 그렇게 좋다면서?”
“미안하지만 나는 총독으로서 일을 공정하게 처리해야 하지. 부정한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
‘악마 주제에 뭔…….’
상대의 정체를 알고 있는 태현에게 총독의 말은 웃기는 소리일 뿐이었다.
‘꼭 투기장을 진행시켜야 하는 이유가 있는 모양인데…… 에이, 됐다. 나는 아이템만 받아서 가면 되지.’
태현은 웃는 얼굴을 풀지 않고 계속 총독을 설득했다.
“아니, 부정한 부탁을 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야.”
“……?”
“밖의 야만적이고 저능하고…… 하여튼 기타 안 좋은 건 다 달고 있는 모험가들이 투기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잡으려고 뒤에서 서로 싸우고 있잖아.”
총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다 보니까 투기장 인원을 정할 때도 뭔가 비열하고 더러운 짓을 하지 않을까 걱정인 거지.”
투기장 안에 들어가서 부정한 방법은 쓰지 못하더라도, 참가하는 인원을 정할 때 수작을 부릴 수는 있을 것이다.
같은 길드 여럿이서 동시에 신청을 해서 대놓고 같이 편을 먹거나, 견제해야 할 상대가 신청하는 시간대에 맞춰서 동시에 신청을 하거나…….
여럿이서 짜고 치면 혼자서는 그걸 막기 힘들었다. 혼자서 그런 걸 막으려면?
역시 권력이 답!
“으음…… 그래. 더러운 모험가들하고 그대 같은 귀족을 같은 취급을 하는 것도 올바르진 않겠지. 뭘 원하나?”
“뭐…… 부정한 부탁을 바라는 건 아니고, 다른 놈들도 다 같이 싸울 텐데, 최대한 떨어뜨려 달라는 거하고, 그래도 꽤 많이 붙어 있을 테니 내 부하하고 나는 같은 경기장에 넣어달라는 것 정도?”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지.”
총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투기장에서 예상치 못한 일로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할 일은 사라진 셈!
* * *
-주인이여, 이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악마가 총독 자리에 앉아 있다니! 내버려 두면 에스파 왕국 자체가 위험에 빠질…….
총독 관저 밖으로 나가며 용용이는 쉴 새 없이 재잘댔다.
‘그러고 보니 얘는 뱀파이어도 싫어했었지.’
신수 출신이다 보니 타락한 존재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예민하게 반응!
“어? 거기, 너!”
“……?”
누군가 멀쩡하게 길을 걷고 있는 케인을 불렀다. 케인과 태현은 지금 같이 걷고 있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움직일 때도 다들 조금씩 떨어져서 움직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플레이어 눈에는 가장 늦게 총독 관저에서 나온 케인이 혼자서 총독 관저에서 나온 것으로 보였다.
“너 방금 총독 건물에서 나오지 않았냐?”
“그랬다면 어쩔 건데?”
케인은 심드렁하고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안 그래도 저 건물 안에서 태현 덕분에 스트레스를 받을 만큼 받은 상황.
-어디 한번 만만한 놈 걸리기만 해봐라!
얼핏 들으면 쪼잔하게 보였지만 케인은 진지했다.
“어떻게 총독 건물에 들어간 거지?”
“말 잘해서 들어갔다. 왜. 꼽냐?”
“뭐? 이 자식이…… 너 내가 누군지 몰라?”
“그러는 넌 내가 누군지 모르냐?”
“네가 누군데?”
“나는 ㅋ…….”
“ㅋ?”
“……크……게 될 사람이지…… 언젠가.”
케인이라고 말하려다가 케인은 꾹 참았다. 여기서 말했다가는 태현한테 뒷감당이 안 될 테니까!
물론 상대 플레이어는 케인을 머저리 보듯이 쳐다보았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너 잠깐 따라와라.”
“네가 누군데 따라오래?”
“너 이 길드 마크 몰라? 너 여기 새로 왔냐? 우리가 여기서 얼마나 잘 나가는데…….”
플레이어는 갑옷에 새긴 길드 마크를 자랑했다.
“뭔 길드인데?”
“<성기사 이즈 킹>길드다.”
“뭐? <성기사이즈킹>길드?”
“띄어쓰기 이상하게 하지 마, 이 자식아! 제대로 하라고!”
“이름을 이상하게 지은 너희들 잘못이지! 그리고 그 음란한 길드 이름은 뭔데! 그런 길드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다!”
“이, 이 자식이…… 감히 우리 길드 이름으로 놀려?”
상대 플레이어는 케인 때문에 화가 났는지 얼굴을 붉혔다.
그 순간 태현이 귓속말을 보냈다.
-야. 얌전히 따라가라.
-?
-쟤가 끌고 간다고 했잖아. 얌전히 따라가라고.
-아니, 왜? 이길 수 있어!
-나도 알아 이 자식아. 지금 대로라서 보는 눈이 있잖아. 따라가다가 안 보이는 곳에서 패라고.
-…….
태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는 수많은 경험을 겪은 노련한 PK 플레이어의 냄새가 풍겼다.
‘대체 저 자식은 예전에 뭐하고 다녔던 걸까?’
케인은 태현의 귓속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따라가면 되잖아. <성기사이즈킹> 놈아.”
“이, 이 자식…….”
상대 플레이어는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일단 케인이 항복하고 따라가자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근데 왜 끌고 가는 거냐?”
“다른 길드원들 앞에서 어떻게 총독 건물 들어갔는지 말해. 내가 데려왔다는 것도 꼭 말하고.”
“길드 안에서 대접이 별로인가 보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래!”
케인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냐?”
“뭐?”
“너한테 한 소리 아니야. 이 자식아.”
플레이어는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순간 옆에서 은신을 풀고 나타나서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는 태현!
“억!”
“귓속말 보내지 마라. 보내는 순간 널 죽일 거거든. 자. 당황스럽겠지. 그렇지만 침착하게 설명을 들어봐. 나랑 이 친구는 둘 다 랭커야. 이번 투기장 이벤트가 그렇게 좋다고 해서 찾아왔지. 그런데 너희 같은 길드 놈들이 우리 같은 개인 플레이어를 견제하려고 하는 거야. 이러면 되겠어, 안 되겠어?”
“……안, 안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 그래서 우리도 좀 대응을 하려고 그래. 그런데 내가 왜 너한테 귓속말을 하지 말라고 했느냐. 그걸 설명해 주지. 아까 내가 널 죽인다고 했잖아? 그리고 우리 둘이 랭커라고 했고. 네가 죽고 나서 사흘 후에 부활하고 나면 또 찾아서 죽일 거야. 그리고 부활하면 또 찾아서 죽일 거고. 너희 길드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기사이즈킹>이란 이름 달고 다니는 거 보면 수준 나오지. 우리 둘이 마음먹고 쫓아다니면 너희 길드가 막아줄 수 있겠냐? 랭커 둘이 눈에 불 켜고 덤벼드는데? 내가 장담하는데 그놈들은 그냥 너를 버릴 거야. 네가 길드에서 뭣도 아닌데 뭐하러 그렇게 고생을 하겠냐.”
떡 벌어지는 상대 플레이어의 입.
한시도 쉬지 않고 술술 나오는 태현의 협박에 제대로 겁을 먹은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케인은 감탄했다.
‘아, 이제까지 내가 했던 PK와 협박은 잘못되었던 거구나! 진짜 협박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케인은 스스로가 했던 나쁜 짓이 얼마나 수준이 낮았는지 태현을 보고 깨달았다.
진정한 협박의 정수!
상대방이 겁을 먹을 만한 걸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너 레벨 몇이냐? 아이템 보니까 한 70 안 된 거 같은데. 우리한테 찍혀서 레벨 50 밑까지 떨어져 볼래, 아니면 그냥 순순히 질문 몇 개만 대답해 줄래.”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아주 좋아.”
아까까지 거만했던 플레이어는 순식간에 순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협박은 이렇게 하는 거지.’
태현은 게임 내에서의 협박을 어떻게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상대방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면 안 됐다. 그러면 실패했다. 지금도 상대방은 잔뜩 겁을 먹고 몰래 귓속말을 보낸다는 선택지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태현한테 휘둘리고 있었다.
* * *
<성기사이즈킹>, <크라잉 해머>, <쑤닝>, <레스토랑>, <파워 워리어>…… 여러 길드가 아발랍 시의 투기장 이벤트를 노리고 있었다.
대형 길드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들 한가락 할 자신이 있는 길드들! 그렇지만 모두가 <성기사이즈킹>처럼 적극적인 PK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투기장에서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전략을 짜는 길드들도 있었다.
그런 길드들 같은 경우는 <성기사이즈킹> 같은 길드들의 공격을 막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잠깐. <파워 워리어>…… 어디서 들어봤는데.”
“그놈들이잖아.”
“……?”
“이 광고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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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현과 케인의 대화를 듣던 플레이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길마님이 <파워 워리어> 길마 재수 없다고…… 만나면 바로 알리라고 했거든요…….”
“하긴, 재수 없긴 하지.”
뭔가 불쾌하고 짜증 나는 광고 방법!
태현이 반응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기 방송에 자꾸 저런 식으로 광고를 하는 사람을 곱게 봐줄 생각은 없었다.
‘투기장에서 만났으면 좋겠는데.’
“그…… 그러면 저는 가봐도 될까요?”
태현한테 아발랍 시에서 움직이는 길드들과 그 길드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고 있는 걸 다 토해놓은 플레이어는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그리고 네가 말하는 거 다 영상으로 찍었거든? 만약에 투기장 시작하기 전에 우리한테 견제 들어오면 네가 불었다고 생각하고 이 영상 풀 거야. 너희 길드에서 좋아하겠지.”
“……!”
태현은 상대가 길드 안에서 별로 좋은 위치가 아니라는 걸 바로 눈치챈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용할 뿐!
“안 말해요! 안 말할 거예요!”
“그래. 열심히 입을 다물고 가라!”
<성기사이즈킹> 플레이어는 허겁지겁 달려서 도망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태현은 중얼거렸다.
“성기사라…… 단단하고 끈질겨서 투기장에서는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직업인데.”
“너 투기장 했었냐? 언제?”
케인은 별생각 없이 물었지만 태현은 아차 싶었다. 판타지 온라인 1때 이야기를 하는 건 별로 좋지 않았다.
“레벨 낮을 때 했지. 저렙용.”
“너라면 아주 날렸겠네. 근데 확실히 성기사들 많은 길드면 좀 귀찮을 거 같은데. 게다가 아발랍 시 투기장은 난전이잖아.”
“뭐…… 그렇긴 한데 못 죽이는 건 아니니까…….”
태현은 턱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성기사가 단단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지만 약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일단 투기장 시작할 때까지는 얌전히 있자. 괜히 눈에 띄어서 좋을 거 없으니까.”
“오케이.”
태현은 남은 시간 동안 아이템이나 좀 만들 생각이었다. 초보자들한테서 대량으로 구매한 기계공학 아이템들을 뜯어서 다시 재활용해야 했다.
“……?”
발걸음을 옮기려던 태현은 순간 눈을 깜박였다. 뭔가 어디서 본 거 같은 얼굴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