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9화
아농 성 병사들 사이에서 태현의 평가는 높았다. 바쁜 와중에도 그들이 쓰는 무기를 최대한 손봐주려고 하는 백작이라니.
이 얼마나 솔선수범하는 백작이란 말인가!
궁수들도 다 좋아했지만, 한 명만 슬퍼했다.
‘내…… 내 한탕이……!’
* * *
아농 성 궁수들과 마법사들이 그렇게 퍼부어댔지만, 마르덴 후작의 군대는 끈질겼다.
피해를 막아내며 끈질기게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형 언데드 괴물 몇 마리는 벌써 성벽에 접근해서 쾅쾅거리며 박아대고 있었고, 성벽 밑까지 접근한 언데드 병사들과 뱀파이어들은 가능한 원거리 공격을 시작했다.
“해자 메우고 사다리 걸고…… 이야, 난리 났다.”
“지금 그렇게 여유로우실 땝니까?!”
루포는 성벽 위에서 달려드는 뱀파이어를 베어내며 외쳤다. 하도 숫자가 많고 밑에서 반격까지 해대니 위에서 막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점점 기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걱정 마라. 어지간해서는 성벽 위는 안 뚫려. 밑이 문제지.”
태현은 구성욱과 에반젤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좁은 공간에서 랭커급 플레이어들이 지원을 받아가며 대기를 하고 있었다.
한둘씩 기어오르는 뱀파이어들로는 뚫을 수가 없는 상황!
특히 구성욱의 검기(劍技)는 다른 플레이어들마저 감탄시켰다. 어딘가 한이 서린 살기!
“차가운! 울음의! 검!”
“차가운 울음의 검이 뭐지?”
“스킬명 아닐까?”
“이상하게 멋있는데?”
오히려 신경 써야 하는 곳은 밑이었다. 태현은 지금 뱀파이어들이 올라오고 있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밑에 신경 끄라 이거지?’
성벽 위를 괴롭히며 성벽과 성문을 공략한다. 정석적인 방법이었다. 실제로 해자와 장애물도 꽤 많이 치워져 있었다.
‘상관없지.’
태현은 루포와 케인, 정수혁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성문이 뚫리면 다음 방법을 쓸 때였다.
* * *
꽈과광! 꽈광!
두꺼운 철문이 쩌적거리는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성문 앞에 접근한 뱀파이어 전사들과 언데드 괴물들이 총공격을 가한 것!
거기에 흑마법까지 작렬해대자 아무리 두꺼운 철문이라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꿀꺽-
아농 성의 기사들은 침을 삼켰다. 그들은 아농 백작과 함께 성문 앞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성문이 부서지는 순간 싸움이 시작된다!
적들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절대로 물러서지 마라! 그대들의 뒤에 내가 있다!”
아농 백작이 그 커다란 덩치에 걸맞게 크게 외쳐댔다. 겉만 보면 백전노장의 모습!
그 순간 뒤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
“아직 안 뚫렸네?”
“…….”
기사들은 순간 넘어질 뻔했다. 이 무슨 비장한 순간에 초를 치는…….
“김태현 백작님!”
“어. 성문 깨질 거 같아서 내려와 봤어.”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태연한 태도. 그러나 아농 백작은 감탄할 뿐입니다.
“과연! 하지만 이 정도는 저와 제 기사들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지켜보십시오! 오늘이 끝나고 나면 음유시인들이 저에 대한 노래를 지어서 부를 테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드디어 성문이 박살 났다.
콰아아아아-
먼지가 일어나더니 그 사이에서 나타난 건 뱀파이어 전사들과 대형 언데드 괴물, 그리고…….
마르덴 후작이었다.
“……!”
“!!!”
“!!!!!!!”
모두가 말 대신 표정으로 경악을 표현했다. 태현은 어떻게 된 건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너무 많이 도발했군!’
피가 끝까지 오르다 못해 머리를 뚫고 올라간 마르덴 후작이 뒤에서 지휘를 포기하고 앞으로 달려 나온 것이다.
사실 공격력만 생각한다면 그게 맞는 일이었지만, 품위 따지고 체면 따지는 마르덴 후작이 이렇게 성문 앞에서 숨어 있다가 들어오는 건 평소에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
그만큼 태현의 도발이 강하게 먹힌 것이다.
“너와 네 기사들하고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물론입니다! 모두 돌격!”
아농 백작은 겁도 없이 칼을 뽑아 들고 돌격했다. 사제들과 마법사들한테 빼곡히 받은 버프 때문에 전신이 빛났다.
“받아라, 이 타락한 뱀파이어야!”
“…….”
그러나 마르덴 후작은 아농 백작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냥 몸을 튕기더니 바로 뛰어넘었다.
“어헛?! 도망치다니! 돌아와라! 이 겁쟁아!”
아농 백작은 당황했지만 마르덴 후작은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가 노려보는 것은 오직 태현!
쾅! 쾅! 쾅! 쾅!
“죽인다! 버러지! 죽인다!”
“거 후장님 말씀 너무 살벌하시네!”
태현은 마르덴 후작의 일격을 <유성>으로 막아내며 대답했다. 어찌나 힘이 강력한지 막아내는데 뒤로 쭉쭉 밀려났다.
[회피에 성공합니다.]
[회피에 성공합니다.]
마르덴 후작은 특유의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모시고 있는 신을 믿고 있겠지! 그렇지 않느냐!”
“뭐…… 일단은…….”
“버러지 같은 놈. 내가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되는 줄 아느냐! 너 같은 버러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신에게 의지하는 겁쟁이를 상대하는 방법 정도는 갖고 있단 말이다!”
태현은 순간 긴장했다. 생각해 보니 마르덴 후작은 예전에 화신의 권능이 담긴 무기에 당한 적이 있는 뱀파이어.
당연히 그 이후로 대책을 세웠을 것이다.
“네놈이 믿고 있는 사디크! 그 사디크의 불꽃을 봉인해 주마!”
“……그거 정말 무섭군!”
태현은 사디크 교단에게 속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돌격했다.
행운의 일격을 미리 걸어두고 동시에 들어가는 스킬 연격!
폭풍 같이 몰아치는 치명타들. 그러나 마르덴 후작은 그 정도 공격은 그대로 맞으며 감수했다.
“강력한 카인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니, 놈이 갖고 있는 사디크의 불꽃을 되돌리겠다! 화신이 되기 전 인간일 때의 불꽃으로 돌아가거라!”
“아! 너무 무섭다!”
태현은 비웃듯이 외치며 마르덴 후작을 계속해서 후려갈겼다. 마르덴 후작이 미리 걸어놓은 방어막들은 다 찢겨나가고 이제 후작의 몸통에 데미지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현의 몸에서는 미동도 하지 않는 상황!
“어째서냐?!”
“사디크는 너 따위 뱀파이어보다 더 강력한 신이다, 마르덴 후장!”
“그럴 리가…… 이, 이런! 이 버러지 같은 놈……! 네가 믿고 있는 신을 속인 것이냐! 어떻게 그런 짓을!”
“엄밀히 말하자면 네가 스스로 속은 건데.”
“닥쳐라!”
“그리고 내가 화신이니 내가 신 자체 아닌가? 내가 내 이름 좀 속이겠다는데 뭐 어쩔 거야?”
태현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보아하니 마르덴 후작의 저 스킬은 신의 이름을 모르면 제대로 걸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태현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상황!
“……두고 보아라, 버러지 같은 놈. 오늘 밤이 끝나기 전 너는 죽을 테니까!”
그 말과 함께 마르덴 후작은 뒤로 빠져나갔다. 이곳에 계속 혼자 있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주변에는 온통 강력한 적뿐이었으니까.
-상급 흡혈 회복!
성문으로 물러나자마자 마르덴 후작은 회복 주문을 외웠다.
주변에 있던 용병대들의 시체에서 피가 쭉쭉 빨려 나오더니 마르덴 후작의 상태가 회복되었다.
성벽 위에서 그걸 본 플레이어들은 질색했다.
“우와. 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성기사급 생존력이네.”
“뱀파이어 진짜 기분 나쁜 종족 아니냐?”
듣는 에반젤린은 속으로 투덜댔다.
‘왜 뱀파이어만……!’
회복한 마르덴 후작은 외쳤다. 어쨌든 성문은 뚫은 상황. 안으로 계속 밀고 들어가 성안에서 싸워야 했다.
“길을 만들어라!”
마르덴 후작의 군대가 쏜살같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메꿔진 해자 위로 올라가고 성문 주변의 성벽을 부수고…….
그리고 태현이 명령했다.
“모두 성벽 주변에서 물러나라.”
갑자기 물러서는 병사들과 플레이어들. 마르덴 후작의 군대는 의아해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적이 후퇴할 때 몰아치는 건 전술의 기본!
그러나 그 순간 재앙이 들이닥쳤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성벽과 성문, 어디 한군데에서 일어나지 않고 전체에서 일어나는 대폭발!
그 많은 폭탄은 해자나 길목이 아닌 성벽과 성문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칭호:성벽 파괴자를 얻었습니다.]
[성 파괴자 칭호와 성벽 파괴자 칭호가 합쳐져 위대한 파괴자 칭호로 변합니다.]
[서버에서 처음 얻은 칭호입니다. 각 스탯이 25씩 증가합니다.]
칭호:위대한 파괴자
위대한 파괴자:이제 당신이 파괴할 것은 무엇일까요?
기계공학 관련 NPC를 상대할 때 친밀도 상승, 드워프, 고블린 상대 시 친밀도 상승, 성주 NPC 상대로 특정 반응이 일어날 수 있음. 폭탄 아이템 제작, 사용 시 추가 보너스. 폭발의 설계에 추가 보너스.
[마르덴 후작의 군대를 대량으로 쓰러뜨렸습니다.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악한 뱀파이어들이 당신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악한 군대를 상대로 맞서 싸워서 크게 타격을 입혔습니다. 선한 이들을 상대할 때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전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기계공학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중급 전술 스킬이 레벨 5에 도달했습니다. 부하들을 지휘할 때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지휘 가능한 부하들의 숫자가 늘어납니다. <뛰어난 지휘관에 대한 믿음> 패시브 스킬을 얻습니다. 부하들이 공포에 강한 저항을 갖습니다.]
[각국의 귀족들이 이번 일에 대해서 듣고 싶어 합니다.]
자리에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이 입을 벌렸다. 아농 성 정면에 있는 성벽과 성문을 통째로 무너뜨려 버리는 과감한 전략!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할 수도 없었다. 성 주인인 귀족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걸 허락하겠는가?
이런 게 가능한 건 오로지 인맥이 두터운 태현뿐이었다.
우르르르-
성벽과 성문 주변에 있던 마르덴 후작의 군대는 완전히 박살이 났다. 재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형 언데드 괴물들은 떨어지는 바윗돌에 맞아서 깔리고, 용병대들은 허겁지겁 도망치다가 폭발에 휘말려서 박살이 났다.
간신히 빠져나온 건 안개화를 쓴 마르덴 후작과 뱀파이어들 정도!
그러나 그들도 워낙 대폭발이었기에 엉망진창이었다. 태현은 악랄하게 그 폭탄에도 은을 잔뜩 넣어둔 것이다.
은의 가격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상대만 쓰러뜨릴 수 있다면!
“크…….”
완전히 폐허가 된 아농 성 앞쪽을 보며 태현은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이게 기계공학이지!
마법에 비하면 한정적이고 불안정이라고 구박만 받지만, 재료와 시간만 준다면 마법은 생각지도 못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스킬!
-태현 씨. 태현 씨.
-예?
-지금 방송 시작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 여쭤보려고 연락드렸습니다.
-아. 괜찮아요. 괜찮아. 전 멀티태스킹 됩니다.
-그러면 방송 연결해도 괜찮겠죠?
-그러세요.
태현은 배장욱의 연락을 받아 태현 주변의 화면을 공유했다.
배장욱은 눈을 깜박였다. 태현 주변이……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폐허! 그 주변에는 산더미 같은 적의 시체들!
‘이게 대체 어디야?’
-영지 아니었습니까?
-영지요?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요.
-아. 여긴 아농 성인데요.
-?!
배장욱은 다시 한번 놀랐다. 왜 아농 성에 김태현이 와있는지도 궁금했지만, 그보다는 지금 멀쩡한 아농 성이 완전히 박살이 난 게 더 궁금했다.
“저…… 지금 방송 시작해야 하는데…….”
“잠, 잠깐만. 조금만 묻고.”
질문을 받아서 진행을 하기로 한 김수아가 곤란한 듯이 말했지만 배장욱은 손을 내저었다.
-지금 왜 아농 성에 있는 겁니까?
-퀘스트 때문에 있죠, 뭐.
대화를 하며 배장욱은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찾는 건 당연히 ‘아농 성’과 ‘퀘스트’와 ‘김태현’!
그러자 바로 영상과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배장욱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퀘스트가…….
시청자의 질문을 받기로 해놓고 자기가 묻는 배장욱!
-아니, 왜 우리 질문은 안 받아줘요?
-지금 시작이라면서요? 아직 시작 안 했어요?
김수아는 불만 섞인 시청자들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