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1화
“아, 아니, 아농 백작. 굳이 그렇게 급하게 영웅이 되려고 할 필요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편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신 건 형님이셨잖습니까!”
“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했다고?”
태현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아농 백작을 쳐다보았다.
마르셀 백작의 성격에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말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잡혀 있다가 추하게 빠져나온 그걸 말했다고?’
“예. 형님께서는 그 험하고 위험한 카테란드 섬에 인질로 위장하고 들어가신 거 아닙니까?”
“…….”
태현은 마르셀 백작을 쳐다보았다. 마르셀 백작은 시선을 피했다.
“그 이후의 활약도 대단했습니다. 아탈리 왕국 해군 함대가 오는 시간에 맞춰서 목숨을 걸고 해적단들을 혼란시킨 그 용기!”
마르셀 백작은 이제 부끄러워서 얼굴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부끄러운 게 자기가 했던 허세가 이렇게 들키는 것!
“그걸 듣고 저도 크게 감동했습니다.”
“아주 좋은 자세야. 그래! 이런 혼란한 시대에 가만히 있으면 쓰나! 적극적으로 나서야지!”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러기 위해 내가 좋은 방법을 하나 알려주지. 마르셀 백작도 아는 방법이야.”
“……?”
아농 백작은 태현의 말에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아농 백작을 완전히 설득하는 데 성공합니다.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명성이 150 오릅니다.]
* * *
태현과 아농 백작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귀족의 응접실인 만큼 호화롭고 값나가는 게 많았다.
움찔-
에드안은 의자에 앉아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방앗간을 본 참새 같은 모습! 그 같은 도적에게 이런 곳은 너무 유혹적이었다.
루포는 검을 들고 에드안에게 경고했다.
“가만히 계십쇼.”
에드안이 사고를 치지 못하게 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나?”
“지금 손 꿈틀거리셨잖습니까!”
“이게 의수라서 가끔 말을 안 들을 때가 있다고.”
“헛소리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계시라니까요!”
“날 너무 못 믿는 거 아닌가? 내가 그래도…….”
에드안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툭-
와장창!
[에드안이 강력한 불운에 휘말립니다. <아름답게 장식된 유리병>이 깨집니다.]
“…….”
가만히 있던 에반젤린은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 있던 에반젤린 때문에 에드안이 불운에 휘말린 것이다.
‘내 탓 아냐.’
에반젤린은 빠르게 태현 파티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여러분, 백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아니! 이걸 누가 부순 겁니까?!”
시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박살 난 유리병을 보고 깜짝 놀라서 외쳤다.
에드안은 재빨리 케인을 가리켰다.
“저 사람이 실수를 해서 깨뜨렸지 뭔가. 이해해 주게!”
“뭐?!”
[아농 성에서의 평판이 조금 하락합니다.]
[명성이 5 내려갑니다.]
케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에드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에드안은 그런 눈빛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너 이 자식. 지금 장난하냐?”
“후후. 백작님이 부르신다니 지금 이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케인이 멱살을 잡으려 들자 에드안은 대도적(자칭)다운 동작으로 빠져나갔다.
케인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
쿵-
“조심해.”
에드안을 쫓다가 케인이 부딪히자, 에반젤린은 경고했다. 물론 케인은 그걸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안 그래도 에드안한테 한 방 먹어서 심기가 불편한 상황!
“뭘 조심해? 어?”
“……충고를 해줘도 못 알아들어? 마음대로 하던가.”
“아놔. 진짜 NPC부터 시작해서 다 나를 무시하네!”
케인은 투덜거리며 에반젤린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면 몰라도 갑자기 새로 들어온 플레이어까지 그를 무시하려고 하니 울컥한 것이다.
처음 봤을 때 태현한테 같이 당한 사람으로서 느꼈던 동병상련은 사라진 지 오래!
그런 케인을 에반젤린은 딱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충고를 해줘도 저러다니. 그녀와 부딪혀서 손해를 보는 건 케인뿐이었다.
이제 곧 강력한 불운에 휘말려 온갖 페널티를 입겠지!
“……?”
그러나 케인은 멀쩡하게 지나갔다. 에반젤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 * *
“태현 님!”
두 백작과 같이 나타난 태현을 보고 에드안은 반갑게 외쳤다. 그러나 태현은 에드안을 무시하고 루포에게 물었다.
“루포, 저놈 사고 치지는 않았지?”
“예. 안 쳤습니다.”
신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대화! 에드안은 가슴을 치며 말했다.
“태현 님. 저를 조금 더 믿어 주십시오! 사고는 오히려 저놈이 쳤습니다!”
에드안이 그를 가리키자, 케인은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PK를 하고 싶어지는 NPC!
“무슨 사고를 쳤길래?”
“유리병을…….”
“거 조심성 없게 그러면 쓰나. 원래 케인이 좀 그런 면이 있지.”
“후후. 맞습니다.”
‘정말 죽이고 싶다!’
그러는 사이 에반젤린이 태현에게 다가왔다.
“저기, 저 케인이라는 사람도 행운이 높아?”
“아니. 케인은 행운이 안 높은데.”
케인이 행운이 높았다면 애초에 태현을 만나지 않았을 것!
“그런데 왜 나하고 부딪혔는데 페널티를 안 받는 거지?”
“음?”
태현은 순간 멈칫했다.
케인의 직업이나 스탯을 생각했을 때 에반젤린의 불운 영향을 받지 않는 건 말이 안 됐다.
“아…….”
“……?”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케인이 사디크 교단 암살자들한테 당한 저주!
[사디크의 왼손에 당했습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풀 수 없는 저주입니다.]
[행운이 0으로 고정됩니다.]
“행운이 0으로 고정되는 저주를 맞아서 그런 거 같은데.”
“뭐?! 그런 좋은 저주가 있어?!”
행운이 0으로 고정되는 저주라면 에반젤린에게는 축복이나 다름없는 저주!
에반젤린은 태현의 손을 덥석 잡고서 물었다.
“그 저주 어디서 구해? 배울 수 있어? 방법은?”
“하하. 적극적이어서 좋군.”
뭔가 불길한 태현의 대답! 에반젤린은 순간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받고 싶은 게 있다면…….”
“…….”
“열심히 일해야겠지? 그렇지?”
뭐 하나도 그냥 줄 생각은 절대로 없는 태현! 에반젤린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좀 알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녀는 태현이 물어봤을 때 별생각 없이 다 말해줬는데!
태현이 저렇게 나오니 많이 속는 느낌이었다.
* * *
뿌우우우우-
아농 백작의 내성에서 크게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성벽 안에서 각자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고개를 돌렸다.
보통 저런 건 아농 백작이 퀘스트를 줄 때 나오는 모습!
“무슨 일이지?”
“김태현이 백작을 만나러 들어갔다는데, 무슨 퀘스트 뜨는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근처 마르덴 고성에서 보스 몬스터 나왔다는데.”
웅성웅성 떠드는 플레이어들. 다들 떠드는 내용은 달랐지만, 한 가지는 똑같았다.
기대 가득한 표정!
이 근처에 김태현이 왔고, 백작과 만나서 이야기를 했으니 뭔가 커다란 퀘스트의 예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아농 성의 모험가들은 모두 들어라! 저 마르덴 고성에서 커다란 위험이 다가오고 있으니,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그대들의 힘이 필요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퀘스트창이 떴다.
<마르덴 후작의 공격에 맞서 아농 성을 지켜라>
타락한 마르덴 후작은 생전 이루지 못했던 야망을 다시 한번 이루려고 한다.
살아 있었을 때 걸물로 칭송받았던 마르덴 후작은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다.
마르덴 후작과 마르덴 후작이 이끄는 군대에 맞서 아농 성을 지켜라.
보상:?, ??, ??, 아농 백작에게 보상, 아농 성 내의 평판 상승
“……!”
플레이어들의 표정이 변했다. 이건 기회였다. 랭커나 대형 길드 소속이 아닌 그들도 대규모 퀘스트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
“참가하고 싶습니다!”
“화가인데 참가할 수 있나요? 깃발이라도 그릴게요!”
“저도 꼭 참가하고 싶습니다!”
밑에서 플레이어들이 열렬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아농 백작은 흐뭇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험가들도 이렇게 뜨거운 정의를 갖고 있다니. 아농 성의 미래가 밝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그래…….”
마르셀 백작은 죄책감으로 가득한 표정!
“아농 백작. 그래도 너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 게…… 성의 군대는 한계가 있지 않나? 그리고 마르덴 후작은 예전부터 대단한 사람이었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죄 없는 사람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야말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아니. 어차피 기다리면 다른 귀족들이 알아서 싸워줄 텐데…….”
태현은 옆에서 마르셀 백작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구구절절 맞는 말!
마르셀 백작이 겁이 많고 게으르고…… 하여튼 안 좋은 단점들이 많아서 그렇지, 상황을 보는 눈은 정확했다.
지금 상황에서 직접 나서서 싸우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지금 마르덴 후작이 누구를 공격할지 아직 모르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나서면 가장 먼저 공격해달라는 뜻밖에 되지 않았다. 다른 귀족들은 자기가 손해 보는 걸 꺼려 했다.
-다른 곳으로 가면 굳이 우리가 싸울 필요가 있나?
-다른 귀족들이 싸워줬으면 좋겠군.
태현도 그걸 알기에 이 호구…… 아니, 아농 백작을 적극적으로 부추기고 있는 것!
‘마르덴 후작 같은 보스 몬스터는 오래 내버려 두면 안 돼.’
다른 영지를 몇 개 집어삼키고 하는 순간 골치가 아파졌다.
판타지 온라인 1에서도 초반에 잡지 못한 보스 몬스터가 세력을 키워서 대륙을 위협한 적이 꽤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면 다른 귀족들이 알아서 싸워줄 테지만, 먼저 명예롭게 나서서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마르셀 백작이 말하려는 거지. 그렇지 않나?”
“어?”
태현은 마르셀 백작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렇지?”
“어…… 그렇지…….”
“역시, 형님!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기사들을 만날 테니, 천천히 오십시오!”
아농 백작은 호쾌하게 웃은 다음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마르셀 백작은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난 쓰레기야……!”
“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 * *
아농 성 주변의 움직임은 바빴다.
밖에 나가 있던 병사들이 돌아오는 건 물론이고 다른 곳에 있던 플레이어들도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에드안은 착착 준비가 되어가는 성을 보며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태현 님, 그런데 아농 성의 병력만으로 마르덴 후작을 공격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아니지. 애초에 뭐가 아쉬워서 마르덴 후작이 있는 곳에 찾아가서 공격을 하겠어?”
태현은 마르덴 후작이 있는 곳에 찾아가서 공격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적이 유리한 곳에서 싸우는 건 멍청한 짓!
적이 직접 불리한 곳으로 오게 만들어야 했다. 태현은 마르덴 후작이 직접 아농 성 앞으로 오게 만들 생각이었다.
“나는 놈이 찾아오게 만들 거다.”
“과연!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만드실 겁니까?”
“그건 네가 해야지.”
“……네?”
태현은 편지를 내밀었다. 에드안은 순간 뒤로 물러섰다.
저걸 받으면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
“마르덴 후작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이 편지를 잘 주고 와. 그리고 준 다음에는 죽지 말고 잘 돌아오고.”
“……내용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안 되지. 편지가 뜯겨 있으면 후작이 의심할 거 아니냐. 대신 내용은 알려주지. 네 홀은 우리가 갖고 있으니까 돌려받고 싶으면 찾아오라고 써놨어.”
“……!”
“거기에 욕도 좀 써놨고.”
“……!!!!”
태현이 말한 ‘죽지 말고 잘 돌아오고’가 섬뜩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