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9화
물론 속으로 욕한다고 태현이 달라지는 건 아무도 없었다.
겉으로 욕을 먹어도 달라지지 않는 게 바로 태현! 달라질 사람이었다면 판타지 온라인 1에서 벌써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뭔데?”
“……마르덴 후작이 왜 쓰러졌는지에 대해 알아내는 퀘스트가 있는데, 거기서 권능이 나와.”
“쓰러져? 잠든 게 아니었나?”
“원래라면 그 정도 되는 뱀파이어가 그렇게 오래 잘 이유가 없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서 회복하기 위해서 깊은 잠에 빠진 거야.”
태현은 에반젤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듯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러면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건가?’
쓰러뜨리기에는 지금이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몰랐다. 괜히 시간을 오래 줬다가는 회복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게 화신의 권능이 담긴 무기라고 했어.”
“무슨 화신?”
“그것까진 모르는데…….”
순간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태현의 표정! 마치 눈빛으로 ‘이것 가지고 그렇게 잘난 척을 한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낫잖아!”
“하긴 그렇긴 해.”
태현은 생각에 잠겼다.
화신의 권능이 담긴 무기. 여기서 화신은 아키서스의 화신일 가능성이 높았다.
에드안이 아무리 그래도 아예 관련도 없는 퀘스트를 들고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믿는다. 에드안!’
태현은 주먹을 움켜쥐며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믿음이 틀리면 피의 보복이 들어갈 것!
‘그런데 화신의 권능이 담긴 무기는…… 권능을 배울 수 있는 건가?’
태현의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어서 그 무기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무기를 얻으면 권능을 배울 수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무기만 있는 건지…….
‘설마 이걸로 또 연계되는 퀘스트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불안했지만 가능성 높은 추측!
“그래도 태현 님. 아예 헛걸음을 하지는 않은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그래. 그렇지.”
불행 중 다행이었다.
* * *
-에랑스 왕국 남서부에 대규모 퀘스트 뜰 거 같다!
-뭐? 무슨 소리야?
-거기 마르덴 고성 있잖아. 거기서 퀘스트 뜬 모양이더라.
-마르덴 고성? 나 저번에 파티 끌고 갔었다가 포기하고 나왔었잖아. 진짜 짜증 나는 곳이야. 들어가고 나오는 것도 힘든데 지하로 내려가면 길은 어찌나 복잡한지…… 거기서 손해 본 게 우리만 있는 거 아닐걸? 다른 길드도 거기 도전했다가 나가떨어졌다고 하더라. 거기 퀘스트는 죽어도 안 해!
-던전 클리어 퀘스트가 아니야. 멍청아. 거기 주인이 깨어났대.
-뭐?? 마르덴 후작이?
-죽은 거 아니었어?
-난 안 죽었을 것 같더라. 꼭 그렇게 소문 퍼진 사람은 안 죽는다니까.
왁자지껄한 판타지 온라인 2 게시판. 수많은 퀘스트들과 정보에 관해서 이야기가 오갔지만, 그중에서 눈에 띄는 건 몇 개 안 됐다.
그중 하나가 마르덴 고성의 주인인 마르덴 후작이 깨어났다는 소식!
-마르덴 후작이 깨어나서 군대를 모은다던데.
-미쳤네. 군대까지? 마르덴 후작이 어느 정도 되는 몬스터지?
-글쎄? 찾아보니까 살아 있었을 때도 대단한 인물이었으니까 지금도 강하지 않을까? 게다가 군대까지 이끌 정도면…… 그냥 작게 끝나지는 않을 거 같은데.
-아놔. 친구 중 한 명이 거기로 장사하러 갔는데…… 장사 그만하고 나오라고 해야겠다.
-장사는 원래 그럴 때 하는 거지! 안전한 곳만 가면 아무것도 안 돼!
-너나 많이 하세요. 이번에도 죽으면 달에 세 번째 죽는 거다.
-파티로 마르덴 후작 퀘스트 참여할 사람?
-너무 무모한 거 아니냐? 지금 우리들끼리 가봤자 바로 죽을 거 같은데. 마르덴 고성 주변에서 사냥하던 파티들 박살 난 거 봤냐? 진짜 개처럼 박살 나더라.
-그러고 보니 나 거기 영상에서 신기한 거 봤어. 궁수가 은제 화살 쏘는데 화살이 멋대로 폭발하더라.
-스킬이겠지.
-아니 스킬은 아니었다니까.
-네 눈깔이 삔 게 아닐까?
-너 누구야? PK 뜰까?!
마르덴 고성 주변의 영상은 많이는 아니더라도 나름 퍼져서 플레이어들에게 공유되고 있었다.
마르덴 후작이 나타나서 파티들을 전멸시키는 영상도, 그 이전에 다른 파티가 그 주변에서 사냥을 하는 영상도 나름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머리가 굴러가는 플레이어들은 마르덴 후작한테 지금 당장 달려가 봤자 죽기 딱 좋다는 걸 눈치챈 상태였다.
그렇다면?
-가까운 도시나 성으로 가서 대기하는 게 가장 좋을 거 같다.
-그렇지? 마르덴 후작이 군대 끌고 오면 참가하는 거지. 일석이조!
게시판의 플레이어들도 태현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적극성!
태현은 직접 백작을 만나서 판을 주도하려고 했다.
* * *
“여기가 아농 백작의 성이야? 좋네.”
아농 성은 평야에 위치했지만 넓고 단단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안의 건물들이나 인구수를 보면 다른 도시에 밀리지 않는 수준!
과연 대륙에서 안정적인 강국 취급을 받는 에랑스 왕국의 성다웠다.
“정말 좋은 곳이군요.”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밝습니다. 이 주변이 어떤 곳인지 바로 알 수 있네요.”
“성벽도 두텁고, 경비 초소에 있는 병사들의 장비도 좋아 보이네요.”
뒤에서 오가는 일행의 대화를 계속 듣자, 태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갖고 있는 영지,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와 너무 비교되었기 때문!
영지를 줄 거면 이런 좋은 곳을 줘야지, 하필이면 왜 그런 박살 난 곳을 준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그 골짜기는 이름부터 재수가 없었어.’
절망과 슬픔. 어쩐지 태현의 지금 상황을 놀리는 느낌의 이름!
태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 앞에는 큰 구덩이인 해자가 파져 있었고, 성문 앞으로 큰 도개교까지 걸려 있었다.
‘흠. 마르덴 후작 군대를 끌고 와도 되겠군!’
아농 백작이 들었다면 당장에 노발대발했을 속마음!
이 주변은 다른 플레이어들도 많았다. 도시나 성 주변에는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들만 있지 않았다. 온갖 플레이어들이 모여서 각자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의 표정은 대부분 밝았다.
‘마르덴 후작이 군대를 끌고 오는 걸 걱정하지는 않나?’
하긴 당연했다. 아직 마르덴 후작은 부하들을 다 모으지도 않았고 어디로 갈지 이동하지도 않았으니까. 벌써부터 신경을 쓰는 사람은 이 주변에 없었다.
“우와. 저게 뭐야?”
“귀족인가 본데? 진짜 멋지다!”
웅성웅성-
다른 플레이어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태현한테까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태현은 호기심이 생겨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지평선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화려한 겉모습!
다양한 문양과 색이 그려져 있는 깃발들과 말을 타고 무장한 기사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마차까지.
‘귀족이군.’
보통 저 정도로 하고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물론 사람의 취향이란 건 다양하니 저러고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도 있을 수 있겠지만, 보통 저런 건 NPC였다.
‘이런 때에 아농 백작의 성으로 오는 귀족이면…… 아. 아농 백작의 친구인가?’
태현은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마르덴 고성 토벌 퀘스트가 뜬 이유는 아농 백작의 친구가 아농 백작의 영지를 방문해서였다.
그렇다면 저 일행이 아농 백작의 친구?
와르르-
필드에서 약초를 채집하고 있던 플레이어들도, 도시 가까운 곳에서 좌판을 깔고 영업을 하던 플레이어들도, 모처럼 구경거리가 생기자 우르르 몰려나왔다.
판타지 온라인 2의 플레이어들은 다양했다. 게임을 꼭 목숨 걸고 하지 않고 이렇게 즐기는 플레이어들도 많았던 것이다.
“귀족이야? 나 귀족 오는 거 처음 봐.”
“아농 백작이 사냥 가는 거 못 봤어?”
“난 그때 다른 곳에 있었다고.”
순식간에 길가에 인파가 생기자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플레이어들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작님. 사람들이 몰려온 모양입니다.”
“흠흠. 내 위엄이 높으니 그럴 법도 하지.”
“당연하신 말씀이십니다. 백작님의 위엄이 워낙 높으셔서 저 멀리 있는 미천한 것들도 알아보고서 이렇게 몰려든 겁니다.”
쿵 짝이 맞는 백작과 기사의 대화!
듣는 플레이어들은 기분이 더러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말을 잘못했다가는 여기서 저 귀족이 이끄는 기사한테 공격당할 수도 있는 것!
“저거 마르셀 백작 아니냐?”
“잘 모르겠습니다? 잘 안 보이는데요.”
“마르셀 백작 맞는 거 같은데? 멍청하게 생긴 얼굴. 마르셀 백작 맞는 거 같아.”
“아. 멍청하게 생긴 얼굴이라고 하니까 알아보기 쉽군요. 네, 멍청하게 생긴 게 마르셀 백작 맞는 거 같습니다.”
“그렇지? 저렇게 멍청하게 생긴 게 흔하지가 않잖아.”
멀리서, 작게 들리지만 마르셀 백작도 충분히 들을 수 있을 만큼 또렷한 목소리!
저 건방진 대화에 마르셀 백작은 분노해서 마차의 창틀을 내리치며 벌컥 화를 냈다.
“어떤 고얀 놈들이냐!?”
“나다.”
“?!”
마르셀 백작은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사람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 저놈은……!
“마차를 돌려라! 마차를 돌려!”
“예? 백작님! 왜 그러시는 겁니까!”
“마차를 돌리라고! 이놈들아!”
[마르셀 백작이 공포에 질립니다.]
[공포 스탯이 오릅니다.]
‘아니, 이번엔 진짜 아무것도 안 했는데?’
태현이 당황하는 동안, 마르셀 백작은 행동에 나섰다.
갑자기 마차의 앞문을 열고 나오더니 마부가 들고 있는 말의 고삐를 뺏어 든 것이다.
그리고는 알아서 방향을 틀려고 시도했다. 물론 제대로 마차를 몰아본 적도 없는 마르셀 백작이 마차를 몰 수 있을 리 없었다.
콰당탕!
혼자서 말을 몰려다가 자빠지는 마르셀 백작을 보며, 루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하는 걸까요?”
“날 보니 반가워서 직접 마중 나오려다가 실수했나 보지.”
“아. 그렇군요. 마르셀 백작이 은혜를 아나 봅니다.”
“…….”
농담으로 말했는데 진담으로 받는 루포를 보며, 태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르셀 백작이 진심으로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물론 구해주기는 했지만 그걸 제대로 구해줬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실제로 마르셀 백작은 어지간히도 트라우마였는지 태현을 보자마자 마차를 반대쪽으로 돌리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는 사이에 기사들은 마르셀 백작을 일으켜 세워서 진정시키고 있었다.
“백작님! 진정하십시오! 이 주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적이 있다면 저희가 해치우겠습니다!”
믿음직스러운 기사들의 목소리!
그러나 마르셀 백작은 겁에 질린 눈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악귀 같은 놈! 왜 네가 여기 있는 것이냐! 네 영지로 가라! 네 영지로 가라고!”
“섭섭한데? 카테란드 섬에서 같이 싸웠던 걸 잊어버렸나?”
“같이 싸우기는 누가! 훠이훠이!”
마르셀 백작은 마차 안에 숨어 손만 흔들어댔다. 옆에서 에반젤린은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걸 보는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다그닥 다그닥-
그제야 태현이 원인이라는 걸 깨달은 기사들이 말을 몰고 태현에게 다가왔다.
“백작님께 다가오지 마라! 더 이상 다가오면 베겠다!”
“날 베겠다고? 내가 누군지나 아냐?”
“네, 네가 누군데?”
언제나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질문은 듣는 사람을 움찔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뭔가 있나 보다’싶게 만드는 질문!
“김태현 백작이다.”
“헉!”
기사들은 깜짝 놀란 눈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태현은 백작의 인장 반지와 얼굴을 드러냈다.
[아탈리 왕국의 백작 작위를 증명했습니다.]
[기사들이 당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작위와 명성은 이런 맛으로 가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