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5화
무해해 보이는 겉모습. 그러나 이들은 알지 못했다.
판타지 온라인 2에서는 겉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저 밖의 언데드 몬스터들을 뚫고 여기에 들어왔다는 건 그럴 만한 방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 * *
‘젠장. 신의 예지를 슬슬 그만 쓰고 싶은데…….’
태현은 빠르게 닳는 MP를 보며 혀를 찼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흑마법도 연습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기에는 마나량이 빠듯했다. 입구 주변에는 없던 함정이 점점 많아지고 더 흉악해지고 있었다.
콰직! 콰지직!
벽면을 뚫고 솟구쳐 나오는 가시는 물론이고,
투콱!
아예 바닥 자체가 꺼져버리는 함정도 있었다.
신의 예지를 쓰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의 함정!
‘……다른 파티가 깨려면 무조건 도적을 데리고 왔어야 했겠군.’
원래 이런 함정이 많은 던전은 도적 계열 직업들이 활약하는 주무대였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눈치를 채지 못하는 함정도 도적 플레이어는 눈치를 채는 게 가능!
그러나 태현은 혼자서, 온몸으로 함정을 뚫고 있었다.
뒤에서 보는 에반젤린은 그저 신기할 뿐!
[강력한 불운으로 해제된 함정이 다시 작동합니다.]
카카칵!
“…….”
에반젤린은 옆에서 날아오는 창을 건틀렛으로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태현은 함정 위를 그냥 달려도 다 빗나가는데, 그녀는 해제된 함정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도 재수 없이 함정이 작동!
억울할 정도로 차이가 났다.
“선배님. 그래도 다행입니다.”
“……?”
정수혁이 바닥에 난 구멍 형태의 함정을 피해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며 말했다.
“함정이 많으니까 몬스터는 없잖습니까.”
“야. 너…….”
태현은 정수혁을 쳐다보았다. 지금 저 말은 하면 안 되는 말 중 1순위!
마치 공포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잠깐 밖에 좀 확인해 보고 올게!’나 ‘왜 이렇게 조용하지?’라고 말하면 꼭 괴물이 나타나는 것처럼!
“네?”
파드드드득!
그 순간 멀리서 들리는 날갯짓 소리! 태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네가 뭔 잘못이겠냐!”
태현은 바로 싸울 준비를 했다. 꺼낸 것은 고대의 망치가 아닌 롱소드 <유성>.
멀리서 들리는 날갯짓 소리와 찍찍거리는 거슬리는 울음소리. 이건 분명…….
“역시 뱀파이어라 이거냐?”
나타난 것은 박쥐 떼!
보통 필드에서 만나는 박쥐 몬스터는 약했지만, 여기는 마르덴 고성 지하 던전의 심층부였다.
절대로 얕볼 수 없는 상대!
-주인이여, 내가 상대하겠다!
용용이가 날개를 펴더니 바로 입에서 번개를 내뿜기 시작했다.
[신수의 속성으로 인해 사악한 존재들에게 추가 데미지를 입힙니다.]
“……?”
용용이의 공격에 거세게 날아오던 박쥐 떼들이 멈칫하자 태현은 살짝 놀랐다.
힘이 회복된 것도 회복된 것이지만, 지금 뜬 메시지창 때문이었다.
‘아. 생각해보니 용용이도 일단 신수였지?’
신수라는 건 일단 신성한 존재. 워낙 하는 짓이 허당이라서 잊고 있었지만 용용이의 공격도 신성 속성을 갖고 있었다.
덕분에 나타난 박쥐 떼들은 접근도 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맴돌았다.
-강제 흡혈의 저주!
에반젤린은 그녀에게 날아오는 박쥐 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박쥐 떼들이 허공에서 뭉치며 그녀의 손으로 강하게 끌려왔다.
행운이 –999인 것만 빼면 강력한 스킬들로 구성된 <고대 뱀파이어의 후예>!
으드득! 으득!
“으앗! 카흘라단의 번개! 카흘라단의 번개! 카흘라단의 번개!”
정수혁은 홀린 것처럼 마법을 연사했다. 박쥐가 자기한테 붙으면 자기한테 마법을 사용!
[고급 마법 스킬로 스스로의 마법에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저항에 성공합니다.]
연신 번쩍이는 게 마치 깜박이는 형광등 같았다. 정수혁은 앞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법을 퍼부었다.
“더 옵니다, 태현 님!”
루포는 재빠른 동작으로 박쥐들을 베어버리고 외쳤다.
박쥐 하나하나의 체력은 낮았지만, 그 속도와 공격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한 번만 접근을 허용하면 피가 쭉쭉 나가는 것이다.
“앞으로 가자! 여기서 앞으로 간 다음 왼쪽으로 꺾어서 복도로 들어가면 방이 하나 있어!”
에반젤린은 다급하게 외쳤다. 그녀야 괜찮았지만 정수혁이나 루포는 여기서 계속 있다가는 위험해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우선은 안전한 곳으로 가서 회복!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젤린은 선행 퀘스트 몇 개로 이 마르덴 고성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선택이라면 믿을 만할 것이다.
타타타탁-
쿵!
에반젤린이 벽을 두드리자 갑자기 틈 하나 없던 벽이 열리며 숨겨진 방이 드러났다.
“안으로! 안으로!”
다들 들어가자 에반젤린은 다시 벽을 두드려서 문을 닫았다.
‘이런 식으로 솔플을 했었군?’
태현은 에반젤린이 어떤 식으로 솔플을 한 건지 알 것 같았다. 이런 비밀 공간을 알고 있다면 도중에 휴식도 가능했으니까.
“여기는 어떻게 안 거지?”
“퀘스트 하면서 들었다. 왜?”
에반젤린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태현이 또 무슨 생각으로 묻나 싶었던 것이다.
“이런 곳이 있는 게 신기해서. 뭐하는 곳이지?”
“지하 1층이나 2층 곳곳에 있는 장소야. 그냥 흔한 비밀 장소겠지.”
에반젤린이 얻은 정보에 따르면, 후작의 침실은 지하 5층에 위치한 호화로운 장소에 있다고 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지하 2층. 다른 파티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추월했음에도 불구하고 갈 길이 멀었다.
“이런 곳이 있다니. 다행입니다.”
정수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MP 회복 포션을 꺼내서 사용했다.
“선배님. 선배님도.”
“아. 고마워.”
다른 생각을 하던 태현은 정수혁의 말에 포션을 받았다.
지금 태현은 이 장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흔히들 넘어가기 쉬웠지만, 판타지 온라인에서 의미 없는 장소라는 건 없었다.
남들이 넘어갈 때 태현은 한 번 더 고민했기에 더 앞서나갈 수 있었던 것.
은신처 안은 아무것도 없었다. 특이한 게 있다면 벽에 걸린 크고 낡은 거울 하나 정도.
태현은 MP 포션을 연속적으로 사용했다. 상쾌한 느낌과 함께 MP가 쭉쭉 차올랐다.
MP가 꽉 차자, 태현은 별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신의 예지>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방 안이 눈부실 정도의 흰색으로 밝게 빛났다.
‘……젠장.’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태현은 일단 에반젤린과 거리를 벌렸다. 그녀와 같이 있으면 불운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고대의 망치를 꺼내 들었다. 노리는 건 바로 옆의 벽. 태현은 전력을 다해 후려갈겼다.
여기까지 채 1초.
그러나 그 노력도 헛되이, 크고 낡은 거울이 산산이 조각나더니 그 안에서 검은 안개가 미친 듯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경고! 마르덴 고성의 주인인 마르덴 후작이 나타납니다!]
[포악한 뱀파이어인 마르덴 후작은 오랜 수면으로 인해 굶주려 있습니다. 도망치는 게 좋을 겁니다.]
상대가 아니라 도망치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하는 메시지창. 그것만으로도 보스 몬스터가 얼마나 강한지 알려주고 있었다.
콰콰쾅!
사방에서 터지는 소리에 다른 플레이어들은 순간 혼란스러워했다.
태현이 벽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마르덴 후작이 나타난 것이다. 에반젤린은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질렀다.
“잠들어 있었을 텐데?!”
원래 퀘스트 내용대로라면 마르덴 후작은 지하 5층의 은신처에서 후작의 호위들에 둘러싸여 잠들어 있어야 했다.
깨어나 있을 때야 미친 듯이 강력했지만, 잠들어 있을 때는 에반젤린도 숨통을 끊을 수 있었다. 그래서 퀘스트가 나온 것이었고.
그런데 지금 마르덴 후작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비쩍 마르고 눈 밑이 퀭한, 어딘가 아파 보이는 마르덴 후작이었지만 그 전신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불쾌한 냄새가 나는군…….
순간 동시에 에반젤린에게 쏠리는 시선!
다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에반젤린은 울컥했다. 꼭 불쾌한 냄새라고 그녀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마르덴 후작은 에반젤린에게 관심도 두지 않고 있었다. 그가 쳐다보는 건 태현이었다.
-어디 감히 신 나부랭이를 모시는 놈이 내 영지에 발을 디딘단 말이냐!
[플레이어들이 강렬한 공포 상태에 빠집니다!]
[공포에 저항하는 데 성공합니다.]
콰콰콰쾅!
태현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빠르게 옆으로 피했다. 그 순간 태현이 있던 자리에 핏빛 창이 솟구치며 통로를 찢어발겼다.
무시무시한 위력!
-불쾌하다! 불쾌해! 내 잠을 깨우다니! 네놈의 신이 누군지는 몰라도 내 오늘 똑똑히 교훈을 내려주리라!
태현은 혀를 찼다. 저 은신처에서 신의 예지를 먼저 썼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위험 신호를 먼저 알 수 있었으리라.
‘저 은신처는 후작이 고성 안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였군!’
그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마르덴 후작이 자고 있었을 때는 그 통로를 아무도 이용하지 않았을 테니까.
문제는 그가 일어났다는 것이었고, 더 큰 문제는…….
‘아무래도 나 때문인 거 같은데…….’
에반젤린은 마르덴 후작이 일어났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원래 퀘스트대로라면 절대로 일어날 일 없는 보스 몬스터!
그러나 마르덴 후작은 태현에게 맹렬한 적의를 보이며 덤벼들고 있었다.
카카카캉!
태현의 롱소드, 유성이 불꽃을 튀기며 마르덴 후작의 손톱을 튕겨냈다.
-제법 하는구나! 이것도 막아보아라!
핏빛 바람이 불더니 태현을 향해 맹렬하게 감돌기 시작했다.
[회피에 성공합니다.]
[회피에 성공합니다.]
[회피에 성공합니다.]
-?!
마르덴 후작은 놀란 눈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도둑의 신 헤넨을 모시는 놈이었느냐!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도둑놈 주제에!
마르덴 후작은 무언가 오해했는지 바로 다음 스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뭔지는 몰라도 회피가 불가능하다는 건 확실한 스킬! 태현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반격에 들어갔다.
활활 타오르는, 고대의 망치!
-행운의 일격, 행운의 일격, 행운의 일격, 우기기, 행운의 일격!
마르덴 후작도 고대의 망치에는 놀란 것 같았다.
-망치라니! 혹시 망치의 신 파이토스를 모시는 놈이었느냐!
태현은 대답 대신 그림자 잠수로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마르덴 후작의 뒤에서 나타난 다음 강타!
[공격이 완전하게 막혔습니다!]
“……!”
마르덴 후작을 후려치자 마르덴 후작은 펑 하고 터지며 박쥐로 흩어져버렸다.
‘회피기!’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런 완전한 공격이 막혔을 때 머리가 새하얘졌을 테지만, 태현은 달랐다.
이럴 때 상대라면?
‘뒤!’
태현은 보지 않고 감으로 움직였다. 바로 돌아서서 뒤를 향해 전력을 다해 후려친 것이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커허허헉!
뒤에서 나타난 마르덴 후작은 활활 타오르는 고대의 망치에 제대로 얻어맞고 쭉 밀려났다.
-이, 누군지도 모르는 잡신을 따르는 놈이 감히…….
무심코 날린 묵직한 팩트!
[마르덴 후작이 힘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부하들이 일어납니다!]
‘……망했군.’
태현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금 퀘스트가 단단히 꼬였다는 것을.
마르덴 후작은 적어도 레벨이 200, 더 쳐주면 250은 넘는 것 같은 보스 몬스터였다.
원래 깨어날 이유가 없는 보스 몬스터!
그런 보스 몬스터가 지금 깨어나서 부하들까지 부르려고 하고 있었다.
승산이 없었다. 태현은 숨을 한 번 들이쉬고 결정을 내렸다.
‘도망쳐야겠군.’
이길 수 없을 때는 망설이지 않고 도주!
“야.”
태현의 공격이 마르덴 후작에게 들어가자 공포 상태가 풀렸다. 다들 태현을 쳐다보았다.
과연 어떤 명령으로 이 상황을 헤쳐 나갈 것인가?
“튀자.”
“…….”
순간 루포는 들고 있던 검을 놓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