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3화
그런 일은 희박했다.
태현은 순간 등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혹시 여기 어떤 퀘스트를 먼저 깨고 왔는지 물어봐도 되나?”
태현은 물어보면서 에반젤린이 대답을 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원래 이런 정보는 공개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무슨 퀘스트를 깨는지,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 이런 건 다 지킬 가치가 있는 정보였다.
그러나 태현이 놓치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에반젤린은 다른 플레이어들과 대화를 못 한지 꽤 되었다는 것!
가까이 있어도 되는 플레이어를 워낙 못 만나다 보니 태현 앞에서 자연스럽게 말이 많아졌다.
“일단 고대 뱀파이어들이 살았다는 유적에 가서 퀘스트 몇 개 깼어. 거기서 뱀파이어 장로한테서 타락한 뱀파이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아주 예전부터 마르덴 고성에는 타락한 뱀파이어가 있었다는데…….”
상세하고 자세하게 말해주는 에반젤린. 그러나 태현은 들으면 들을수록 표정이 구겨졌다.
아무리 봐도 신빙성 있는 퀘스트 내용!
그에 비해 태현은 에드안이라는 신뢰 안 가는 대도적(자칭)이 어디서 갖고 온 소문뿐이었다.
만약 겹칠 경우 틀릴 가능성이 높은 건 태현!
‘젠장.’
여기까지 온 이상 뒤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아키서스의 화신 직업 퀘스트는 깨지 못하더라도 던전은 클리어해서 보상은 받아야 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그래서 너는?”
“나야 던전 클리어해서 백작한테 보상받으려고 왔지.”
“아. 그래. 다른 파티들도 종종 보이더라.”
에반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너는 그런데 왜 멀쩡한 거야?”
“평소에 착하게 살아서 그런 거 아닐까? 평소에 착하게 살면 아무리 운이 없어도 나쁜 일을 안 겪는 법이지.”
“아하. 그렇…… 그게 말이 돼?!”
“어떡하겠어. 그게 진짜인데.”
“진짜로 메시지창 안 떠? 불운에 휘말렸다거나…….”
태현은 이 이유를 알고 있었다.
태현의 압도적인 행운이 에반젤린의 불운을 이긴 것!
에반젤린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지 계속 태현 옆에서 말을 걸었다.
원래라면 각종 스킬이 실패하고 아이템이 부서지는 불운이 겹쳐야 하는 상황!
그러나 태현은 정말로 멀쩡해 보였다.
‘대체 뭐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상황!
태현은 앞으로 걷기 시작했지만 에반젤린은 뒤에서 졸졸 따라붙으며 말을 걸었다.
물론 정수혁과 루포, 용용이는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저 뱀파이어에게서는 매우 불길함이 느껴진다.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겠다!
용용이는 학을 떼며 그렇게 말했다. 용용이의 겉모습은 워낙 신비로웠기에 루포도 그 말을 따랐다.
“저기, 장비야? 혹시 스킬? 아니면 직업?”
정답은 그냥 깡스탯으로 버티고 있는 것!
“치사하잖아! 나도 알려줬는데!”
“내가 말해준다고 약속하지는 않았잖아.”
“그, 그렇긴 하지만! 알려줘! 궁금하단 말야! 대신 나도 보답으로…… 음…… 퀘스트 도와줄게. 나 일단은 랭커거든?”
“직업 성능 좋고, 여기서 솔플할 정도면 랭커겠지.”
“난 아농 백작과 상관이 없어. 그러니까 먼저 클리어하는 경쟁에 참가 안 한다는 소린데, 그러니까 알려주면 이 던전을 클리어하는 걸 도와줄게!”
“흠. 근데 어쩌냐. 네가 한 가지 모르는 게 있는데, 나는 네가 안 도와줘도 여기를 가장 먼저 클리어할 자신이 있거든.”
“…….”
가만히 있어도 흘러넘치는 자신감!
에반젤린은 살짝 어이없어했다가 다시 말을 붙였다.
“과연 그럴까? 넌 이 성에 대해서 모르고 있잖아!”
선행 퀘스트를 여러 개 깨고 와서 이 고성에 대해 알고 있는 그녀와 달리, 태현이나 다른 파티는 그냥 아농 백작이 토벌하라고 와서 몰려온 플레이어들이었다.
당연히 알고 있는 게 없었다. 이건 커다란 차이였다.
태현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에반젤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만 생각을 해보자. 음…….”
여기까지 5초.
“아. 마르덴 후작이 혹시 뱀파이어가 되어서 아직까지 살아 있냐?”
“!?!?!?!?”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태현은 에반젤린의 반응을 보고 그가 제대로 맞췄음을 짐작했다.
“어떻게?!?!?!”
“척하면 척이지.”
영화 수백 편을 본 사람이 새로운 영화를 봤을 때 결말이 어떻게 될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태현도 이런 종류의 퀘스트에는 꽤 이골이 나 있었다.
마르덴 후작이 죽기 싫다고 그 난리를 치고, 에반젤린은 타락한 뱀파이어를 찾아 여기로 오고…….
척하면 척!
그러나 에반젤린 입장에서는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고 자시고 간에…… 아. 몬스터군.”
그러는 사이 나타난 마르덴 언데드 병사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오는 몬스터들이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태현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태현을 잡으려면 단순히 레벨이 아닌 상성이 필요!
-카흘라단의 번개!
“야! 지금 마법 쓰면!”
뒤에서 들리는 마법 시전 효과음에 에반젤린은 깜짝 놀라 외쳤다.
파지지지지지직!
그리고 에반젤린 위로 떨어지는 벼락!
[뱀파이어의 힘으로 저항하는 데 성공합니다.]
데미지는 없었지만 기분은 더러웠다. 정수혁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죄, 죄송…….”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냐. 네 잘못도 아닌데.”
“…….”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냉정함!
태현의 말에 에반젤린은 이를 갈았다. 물론 그녀의 불운 때문에 마법이 꼬인 거긴 하지만, 꼭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필요는 없잖은가!
“야! 어 다르고 아 다른데 꼭 그렇게 말해야 해?!”
“싫으면 저 앞으로 쭉 가시면 되겠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같이 다니면 불운을 몰고 오는 사람하고 왜 같이 있어야 하지? 그냥 쭉쭉 가라고.”
“넌 효과 안 받는다며!”
“나야 안 받지만 저기 뒤에 셋은 받거든.”
용용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뱀파이어 싫다! 뱀파이어 싫다!
“…….”
어디서 뭔가 용같이 생긴 펫이 뱀파이어라고 저런 취급을 하니 뭔가 속에서 울컥했다.
“이유 말 안 해주면 끝까지 따라붙을 거야! 나는 다 말해줬으니까 너도 이유는 말해줘야지!”
정수혁도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선배님. 그냥 말해주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자기 직업부터 퀘스트까지 다 말해줬는데…….”
정수혁이 봐도 너무한 태현의 냉정함!
그러나 태현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다 그러고 크는 거지. 오늘 교훈 하나 얻었네. 처음 보는 사람을 믿지 마라.”
“…….”
그러는 사이 마르덴 언데드 창병이 가까이 다가왔다.
-나를 무시하지 마라!
푹!
창은 멋지게 태현의 가슴팍을 찌르고 들어왔다. 태현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데미지도 안 들어가는…….
[마르덴 언데드의 독에 당했습니다.]
[출혈 상태에 빠집니다.]
“?!”
정말 오랜만에 뜨는 데미지 표시!
태현은 깜짝 놀랐다. 물론 지금의 태현은 과거의 태현이 아니었다.
<아키서스의 변덕> 패시브 스킬로 인해 강제로, 빠르게, 균형 잡힌 스탯 성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공격 한 대 맞았다고 위험해지지는 않았다.
“뭐 이런…….”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태현은 망치를 들고 그대로 마르덴 언데드 창병을 날려버렸다.
……에반젤린에게로.
와지끈!
“야!!”
창병과 부딪힌 에반젤린은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몬스터를 쳐서 날려 보내는 건 PK로 인정이 되지 않았다. 그걸 알았기에 태현은 자신감 넘치게 에반젤린한테로 보낸 것이었다.
에반젤린이 저 멀리로 구르자 다시 돌아오는 행운 능력!
[회피에 성공했습니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그래. 이래야지.’
언제나 뜨는 메시지창이 안 뜨자 허전할 정도! 태현은 가차 없이 몬스터들을 쓸어 넘겼다.
그러는 사이 에반젤린은 자기 위로 떨어진 몬스터를 박살 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콰직!
투구의 입 부분을 연 다음 몬스터의 어깨를 깨무는 과감한 동작.
뱀파이어의 직업 스킬이자 종족 스킬인 흡혈이었다. 상대방을 봉인함과 동시에 능력을 흡수하는 강력한 능력!
에반젤린은 간단하게 몬스터를 해치운 다음 씩씩거리며 자리에 일어섰다.
그런데 쳐다보는 눈빛들이 이상했다.
“와…… 언데드 상대로 흡혈을 하다니…….”
-주인이여. 뱀파이어는 비위라고는 없는 더러운 종족이다! 상종하지 않는 게 좋다!
“그래. 나도 지금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저 언데드들을 상대로 깨물 생각이 들다니!
태현도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제야 눈빛의 뜻을 깨달은 에반젤린이 허둥대며 외쳤다.
“야! 아냐! <고대 뱀파이어의 후예>로 전직한 다음부터는 피 맛은 달라진다고! 언데드 피라도 달콤한 맛이 난단 말이야!”
“더 소름 끼치지 않냐?”
-그렇다. 주인이여. 역시 뱀파이어는 불쾌하다. 추방해야 한다.
“너 이 어디서 짤막하게 생긴 도마뱀 같은 자식이! 너 이리 나와! 뒤에 숨어 있지 말고!”
용용이가 태현 뒤에서 종알대자 화가 난 에반젤린이 삿대질을 했다. 용용이는 안 들린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날갯짓을 했다.
펫한테도 비웃음을 받다니!
화를 내던 에반젤린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쩔 수 없는 건가?’
보아하니 저 상대방 일행은 뭐 어떻게 말해도 이유를 말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에반젤린이 PK 협박을 할 정도로 사악하거나 나쁘지는 않았다.
태현이 말했듯이, 처음 본 사람을 믿고 다 털어놓은 게 잘못!
“알겠어! 가면 되잖아.”
에반젤린은 투덜대며 검을 어깨 위로 들었다. 그러고는 떠날 준비를 했다.
탁-
그러나 태현은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
“아니. 네가 원한다면 같이 있어도 좋아.”
“……!”
처음 들어보는 따뜻한 말.
에반젤린은 순간 눈물을 흘릴 뻔했다. 투구를 쓰고 있어서 망정이지!
그러나 이 자리에 케인이 있었다면 말했을 것이다.
-저놈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흥, 흥. 싫다면서. 갑자기 왜?”
“좋은 생각이 났거든.”
“……?”
* * *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서 계속 싸우는 데 성공합니다. 체력이 1 오릅니다.]
“…….”
“바로 이거야! 아주 좋아. 옆에서 그러고 있으라고.”
에반젤린은 혼이 빠진 얼굴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지금 저게 뭐하는 짓?
태현은 에반젤린을 아주 가까이 붙여놓고, 일부러 언데드한테 가까이 다가가서 몇 대씩 맞아주고 있었다.
HP가 아슬아슬해질 정도로!
태현은 <아키서스의 화신> 직업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느린 레벨 성장을 빠른 스탯 성장으로 보완하는 직업. 각종 패시브 스킬이 그런 걸 의미하고 있었다.
문제는 체력, 지구력, 방어력 같은 스탯들은 아슬아슬한 상태에서 맞고 싸워야 빨리 오르는 스탯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태현은 그게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식으로 하려면 회피 불가능한 스킬이나 저주를 맞아야 하는데 이건 또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사디크 교단에서 좀 했었는데, 사디크 교단은 폭삭 망해서 어디로 사라진지 모르는 상황!
게다가 나중에 다시 만나면 이런 스탯 작업을 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골짜기를 통째로 뺏긴 것도 모자라서 <사디크의 성물 반지>까지 뺏긴 사디크 교단은 그야말로 이를 갈고 있었던 것이다. 암살자들을 보내서 습격을 할 정도니…….
그렇기에 스탯 작업은 이런 상황이 좋았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아주 위험하지는 않고, 언제든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상황.
거기에 퍼즐의 마지막 부분까지 찾았다. 태현의 행운을 강제적으로 내려서 공격을 맞게 해줄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에반젤린이었다.
“…….”
에반젤린은 언데드 창병이 찌르는 창에 달려가서 일부러 맞는 태현을 보고 생각했다.
‘그냥 도망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