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5화
“아, 죄송합니다. 말씀하시던 거 끝났나요?”
태현의 말에 배장욱은 깨달았다.
태현이 일부러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 진짜로 방금 말한 것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아니, 방금 말한 거에 어떻게 관심이 안 가지?!’
배장욱은 기가 막혔다.
지금 그가 늘어놓은 건 보통 플레이어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이었다.
-MBS 방송국이 얼마나 잘 나가는 방송국이고, 여기서 전속 계약을 하면 얼마나 이익인지.
-MBS 방송국에서 전속 계약을 한 유명한 플레이어들이 누가 있는지.
거기에다가 태현의 퀘스트까지 말해주면서 온갖 칭찬을 해주었다.
그런데도 태현은 하나도 관심이 없는 모습!
‘대체 뭐지?!’
배장욱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 걸 느꼈다.
“흠. 흠. 별로 관심이 안 가시나 봅니다?”
“아. 네, 별로 관심이 없는 내용이어서…….”
“?!”
배장욱은 눈을 깜박였다.
“저, 저희와 전속 계약을 한 플레이어 중 잘나가시는 분은 월에 천만, 이천만 원의 수입을 올리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요? 잘됐네요.”
무슨 황금을 돌 보듯 하는 태도!
배장욱은 점점 마음이 답답해졌다. 원래 태현을 만나면 온갖 유혹적인 조건을 늘어놓고 전속 계약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뭘 어떻게 해야 꼬실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저, 저희 쪽 방송에 출연하시는 플레이어 중에서는 그 랭커 이세연도 있는데…….”
움찔!
이제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태현이 순간 움찔하자 배장욱이 눈빛을 빛냈다.
‘이거 봐라?’
돈도, 유명한 방송인도 관심이 없지만, 톱랭커인 이세연한테는 관심이 있다?
‘역시 게이머군!’
다른 건 몰라도 게이머라면 이세연한테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배장욱은 그렇게 생각했다.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다!’
“하하. 이세연 씨한테 관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판타지 온라인 하는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죠.”
“그렇죠! 세계 제일이라고도 하니까요.”
“…….”
태현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카롱을 집어 먹었다. 들어왔을 때 배장욱이 시켜놓은 디저트였다.
“맛있네요. 이거 좀 더 시켜도?”
“물론 괜찮습니다. 여기 마카롱이 평이 좋죠? 방송국 내에서도 인기에요. 가격이 좀 비싼 게 흠이지만 별거 아닙니다!”
배장욱은 ‘내가 이렇게 당신을 대접해주고 있다!’라는 뜻으로 말했다.
그러나 태현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네요. 가격을 보니 별거 아니네요.”
“?!”
당황한 배장욱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 그래서. 이세연 씨한테 관심이 있으면 만날 기회를 만들어드릴 수도…….”
다시 움찔.
태현이 반응하는 걸 보며 배장욱은 속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니, 됐습니다.”
“네? 아.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따로 만나는 게 아니라 방송 내에서 만나는 것…….”
“됐다니까요? 꼭 만나야 하면 저는 계약을 안 하겠습니다.”
“?!?!”
배장욱은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이세연한테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나?
‘대체…… 이 녀석의 정체는 뭐지……?’
배장욱이 앞에서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태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이세연을 게임 내에서 한 번 만나서 다행이었다.
이세연이 그렇게 원한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이세연도 직감이 꽤 좋은 편이었으니, 굳이 만나서 위험을 겪을 필요는 없었다.
오해의 연속!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오해한 채 카페에서 대화가 이어갔다.
* * *
“……그래서, 이 정도가 우리의 조건입니다. 어떻습니까?”
배장욱의 복잡한 속마음과 별개로 MBS의 조건은 매우 훌륭했다.
태현의 게임 플레이 영상을 방송국이 가져가고, 그걸 진행자들과 출연자들이 보며 해설하듯이 방송하는 것이다.
물론 태현이 어떤 퀘스트는 공개하고 싶지 않다면 그건 공개하지 않아도 됐다.
방송의 시청률에 따라 수입을 나눠주고, 추가로 인기가 있을 경우 광고도 넣을 수 있고…….
다른 신생 방송국에서 들리는 노예 계약과는 거리가 먼, 입지가 탄탄한 방송국다운 계약서였다.
“다 좋은데 한 가지가 좀…….”
“네? 그게 뭡니까?”
“전속 계약은 별로 하고 싶지가 않은데요.”
“……!”
배장욱은 눈을 크게 떴다. 전속 계약.
태현이 하는 퀘스트나 게임 플레이는 MBS에서만 공개하는 계약이었다.
배장욱에게는 꼭 필요했다. 좋은 인재는 당연히 다른 방송국에서도 데려가고 싶어 할 테니까.
그리고 독점하지 않으면 차별화가 되지 않았다.
“네? 혹시 다른 방송국에 섭외를 받았다거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집안 가훈이 좀…….”
“예?”
태현은 자라면서 아버지, 김태산에게서 여러 교육을 받아왔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인생 교육이었다.
-절교를 하더라도 보증은 서주지 마라!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어떤 놈이 너한테만 좋은 이야기를 하자고 하면 주먹을 날려!
-기분이 우울할 때는 고기를 먹어라!
-뭐든 간에 상관없으니까 코 꿰이지 마라. 나중에 귀찮아진다!
온갖 종류의 조언이 섞인 교육!
꼭 김태산 때문은 아니더라도, 태현은 굳이 전속 계약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다른 곳을 갈 생각이 있는 건 아니지만, 벌써부터 MBS와 같이 계속 갈 필요가 있을까?
MBS가 어떤 곳인지도 확실히 모르는데 말이다.
태현의 말을 들은 배장욱은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사실이었으니까.
‘끄응…… 미끼가 다 안 먹히니 뭘 할 수가 없네…….’
배장욱은 입맛을 다셨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게 그였다.
당연히 플레이어들은 전속 계약보다는 자유 계약을 좋아했다. 다른 방송국에서 더 좋은 제안을 받으면 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 플레이어들을 좋은 조건으로 설득하는 게 배장욱의 능력이었다.
그렇다고 속이는 건 아니었다. 속여서 플레이어들을 데리고 왔으면 그의 평가가 좋을 리 없었다.
배장욱의 능력은 플레이어들이 뭘 좋아하고 뭘 원하는지 알아차린 다음 그걸 제시해서 계약에 성공하는 것이었다.
서로에게 Win-Win인 계약!
문제는 태현이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욕심이 없나?’
“어쨌든 꼭 독점 계약을 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죠. 방송국도 사정이 있을 테니.”
태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탁!
배장욱은 급히 태현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허공을 잡고 비틀거렸다. 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뺀 것이다.
“뭐 하세요?”
“아, 아니. 그게…… 죄송합니다. 급한 마음에. 그보다 전속 계약, 안 해도 됩니다! 자유 계약으로 하죠!”
“그러셔도 됩니까?”
태현은 의아해했다. 방송국 입장에서 꼭 전속 계약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배장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놓치는 것보단 나아!’
카테란드 섬 퀘스트를 다른 방송국에 뺏기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하는 게 훨씬 나았다.
게다가 배장욱은 경매 사이트에서 일어난 경쟁을 잊지 않고 있었다.
놓치는 순간 바로 뺏길 수도 있었다.
“그, 그래도 전속 계약을 하신다면 제 권한으로 기본금을 더 드린다거나 할 수도 있…….”
“아뇨. 별 필요 없는데요.”
“……예.”
배장욱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 * *
계약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일단락이 되자, 배장욱은 태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정작 게임에 대한 이야기는 못 했네.’
“태현 씨는 직업이랑 레벨이 어떻게 되십니까?”
“네? 꼭 말해야 합니까?”
태현의 반응에 배장욱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습니다.”
“별로 숨길 건 아니지만 공개할 것도 아니라서…… 직업은 아키서스의 화신이라는 직업이고, 레벨은…….”
태현은 말하다가 머뭇거렸다. 이제 간신히 50을 찍은 상황.
“……비밀로 하죠.”
“아키서스의 화신? 이름만으로는 무슨 직업인지는 모르겠는데요. 일반 직업은 아닐 테고, 영웅 직업인가요?”
“영웅 직업 아닙니다.”
“아, 그러면 희귀 직업이군.”
배장욱은 멋대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은 설명해 주려다가 포기했다.
‘굳이 설명할 필요 없잖아?’
“그러면 요즘은 어디서 뭘 하십니까?”
“사디크 교단 토벌 퀘스트 깨고 있는데요.”
“아. 그거 핫하죠.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배장욱도 일이 바쁜지라 사디크 교단 토벌 퀘스트는 이름만 봤다.
안에서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는 모르는 상황!
“뭐…… 대충 잡고 대충 깼죠.”
“혹시 그거 방송에 공개 가능할까요?”
“방송이요? 뭐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그러면 영상 보낼게요.”
“하하. 뭐든지 보내만 주십시오. 방송에 내보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저희 팀이 판단할 테니까요. 의외로 게임 플레이어분들은 자기가 한 퀘스트가 재미없다고 생각하시는 경우가 많은데, 시청자 입장에서는 아니거든요. 그러니 일단 보내만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배장욱은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다.
카테란드 섬 퀘스트는 정말 대단한 퀘스트였다. 한 플레이어가 그렇게 연속으로 대단한 퀘스트를 깨기는 힘들 것 아닌가.
게다가 사디크 교단 토벌 퀘스트처럼 유명한 퀘스트는 온갖 플레이어들부터 대형 길드까지 다 몰려왔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태현이 눈에 띄는 활약을 하기는 힘들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태현이 ‘대충 잡고 대충 깼죠’라고 말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배장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재미있는 게 있을 수 있으니까.’
평범한 곳에서 재미를 찾아내는 게 프로 방송인의 능력!
배장욱은 그래도 만족스러운 만남이었다고 생각했다. 태현에 대해서는 아직도 헷갈렸지만, 나름 성과를 거뒀으니까.
‘그러고 보니 김태현이라면 판타지 온라인 1에서 그 김태현하고 이름이 똑같네.’
문득 든 생각에 배장욱은 고개를 들어 태현을 쳐다보았다. 뭔가 1의 김태현하고 닮은 성격 같기도 했다.
“에이, 설마…….”
“……?”
* * *
“태산 님!”
다시 접속한 태현을 맞이해 준 건 대장장이들이었다.
“어. 사디크 교단 놈들은 잡혔냐?”
“네?”
“다른 사람들이 도망가는 거 쫓아가지 않았어?”
“아. 그거요. 잡몹 몇 명 잡은 거 말고는 건진 게 없다는데요.”
“역시 그렇겠지.”
“지금 그게 중요한 거 아니에요. 왕궁에서 공지가 나왔다고요.”
“공지?”
“예! 토벌 퀘스트를 끝내고 포상을 하겠다고요!”
“그렇겠네.”
골짜기에 있던 사디크 교단은 박살이 나서 다른 곳으로 도망쳤으니, 왕궁 입장에서는 토벌 퀘스트가 성공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왕국군도, 교단들도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 하는지 아세요?”
“흠. 내 욕 하나?”
불의 마수를 사냥하던 플레이어들은 태현을 욕할 만했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맛있는 부분을 그냥 가져가 버렸으니까!
박성찬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그러는 사람도 있겠지만…… 공적치 1위가 누군지 이야기하고 있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누가 1위래?”
“랭커 요한손이나, 아카시아 길드장, 파이터즈 길드장 정도 경쟁하고 있는데…… 크로포드도 랭커긴 한데 하필 화염 전문이라 이번 퀘스트에서 1위는 힘들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
“난 없고? 나도 나름 활약하지 않았나?”
“그야 다른 사람들은 골짜기 안에서 일어난 걸 못 봤으니까 그런 거 아닌가요? 불의 마수만 사냥해서 공적치 1위를 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하면…….”
“잘됐네. 견제는 안 받겠군.”
태현은 씩 웃으며 일어섰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예상을 뒤집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