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33화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지금 플레이어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해주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데, 가장 커다란 몫을 가져간 건 태현이었다.
그리고 그 당사자는 따지기도 전에 말을 타고 저 멀리 가버린 상황!
“저 자식 뭐냐!?”
“잡아! 잡아 와!”
“잡아서 뭐라고 할 건데? PK라도 할 거야?”
“PK 해서라도 책임지게 한다!”
자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각자 자기 할 소리를 떠들어대는 플레이어들. 그들은 현실성 없는 소리들을 떠들며 시간을 낭비했다.
그사이 태현은 기사들을 이끌고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버포드, 넌 내가 찾는다!’
이글거리는 눈빛!
원수를 보는 눈빛도 이보다 더 강렬하지는 않을 것이다.
* * *
“에취!”
버포드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뭐야? 왜 갑자기…….”
중얼거리던 버포드는 앞을 바라보았다. 뭔가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타난 건 한 무리의 기병대!
“왕국군인가? 어휴…….”
버포드는 투덜거리며 검을 들었다. 겁을 먹지는 않았다. 주변에는 아직 동료 사디크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많았던 것이다.
불의 마수가 플레이어들과 싸우고 있는 동안, 그들을 쫓아오는 왕국군 추격대가 벌써 다섯 번째였다.
성공적으로 막고는 있었지만 이제 슬슬 지겨웠다.
‘언제까지 쫓아오려는 거야? 이기지도 못하면서 그냥 좀 내버려 두지.’
버포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신성 마법을 사용했다.
-사디크의 굳건한 분노!
순간 붉게 달아오르는 몸. 전투 시작 전에 거는 버프용 마법이었다.
“자, 가자!”
“사디크 님을 위하여!”
“사디크 님이 보고 계신다!”
다른 사디크 성기사들도 기세 높여 외쳤다. 사제들은 달려오는 기병들을 막기 위해 마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기어 다니는 사디크의 죽음!
뭉클거리는 검은색 저주가 쏘아져 나갔다. 그 저주는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사람을 노리고 날아갔다.
퉁!
“?!”
그리고 저주는 정확히 롱소드에 튕겨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뭐…… 컥!”
야심 차게 저주를 외웠던 사디크 사제는 오히려 당해서 쓰러져버렸다.
“모조리 밟아버려!”
“예!”
두두두두두두-
이제까지 쫓아왔던 왕국군과는 전혀 다른 위압감!
버포드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놈들인가?!’
왕국군이야 워낙 강하고 숫자가 많은 곳이니 이제까지 왔던 추격대가 아닌 다른 이들이 쫓아와도 놀랍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왕국군 기병대와는 분위기가 다른 기사들!
그리고 그 앞에서 가장 날뛰고 있는 건 태현이었다.
* * *
사디크 성기사들이 버티고 있는 길목에 돌진하기 전, 태현은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다 왕국군 기병대 모습으로 갈아입어라!”
“예??”
“아니 어떻게 체면도 없이 그런 짓을 할 수가 있…….”
말을 하던 기사는 태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움찔했다.
“을 것 같군요!”
“명령을 따르는 게 기사 정신!”
[초급 사기 스킬이 상승합니다.]
[변장 스킬을 얻었습니다.]
<변장>
아군을 변장시켜 적들에게 혼란을 줍니다. 레벨이 높아갈수록 흉내 낼 수 있는 대상이 많아집니다.
점점 잡다해져 가는 태현의 스킬 목록!
준비가 끝나자마자 태현은 기사들을 재촉했다.
지금이 딱 좋은 순간이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불의 마수를 갑자기 뺏긴 탓에 당황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도망치는 사디크 교단의 뒤를 쳐서 공적치를 추가로 올릴 절호의 기회!
거기에다가 한 가지 더, 버포드가 있었다.
왕궁을 습격할 때 있었던 버포드.
태현의 반지를 가져가버린 버포드!
‘죽이고 뺏는다!’
버포드가 알면 소름이 끼쳤을 집념!
왕궁에 와있던 풍림화산 길드장, 스티븐은 그 반지가 얼마나 좋은지 방송에서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했다.
물론 버포드란 놈이 얼마나 나쁘고, 우리가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방송을 보면서 속으로 눈물을 흘린 건 태현이었다.
저건 그가 가졌어야 할 반지인데!
지금 갖고 있을 게 분명했다. 태현은 절대로 놓칠 생각이 없었다. 원래 상대가 가진 아이템은 원하는 대로 뺏을 수 없었지만, 태현에게는 계산이 있었다.
‘버포드는 사디크 교단 소속 성기사지. 그러면 악명이 높고 사망 페널티가 높을 거다. 게다가 내 행운 수치라면 적을 죽였을 때 드랍하는 아이템은 분명 좋은 아이템이 나올 가능성이 커.’
이런 여러 가지 요소가 겹친다면?
버포드가 가진 가장 좋은 아이템이 나올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버포드가 가진 가장 좋은 아이템은 바로 그 반지!
“가자! 사디크 교단 놈들을 죽이자!”
태현의 외침에 기사들이 대답했다.
“왕국 만세!”
“더러운 사교도 놈들에게 죽음을!”
그러나 태현은 한 가지 놓치고 있었다.
버포드가 반지를 가져간 것도, 그의 사망 페널티도, 태현의 행운도 모두 다 사실이었다.
그러나 버포드가 가진 가장 좋은 아이템이 반지라는 건 태현의 추측일 뿐!
버포드가 반지보다 더 좋은 아이템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태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 *
두두두두두-
“크아아악!”
“사디크 님이시여!”
태현은 기사들 가장 앞에서 말을 달리며, 날아오는 저주를 반격의 원으로 튕겨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봤다면 ‘저거 핵 아니냐?!’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빠르게 달리는 불안정한 말 위에서, 타이밍을 잡고 <반격의 원> 스킬을 성공적으로 사용하다니!
땅바닥 위에서 가만히 서서 써도 맞추기 힘든 스킬을 태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었다.
“이야. 저걸 나 혼자 보는 게 아깝다 아까워.”
최명성은 모니터실에서 중얼거렸다. 다른 랭커들이나 방송인이라면 저걸 생방송으로 내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한동안 열광했겠지.
그러나 태현은 방송을 하지 않았고, 주변에 있는 건 기사 NPC들뿐.
이 기막힌 장면을 본 건 그밖에 없었다.
“김태현은 방송은 안 하니까…… 아쉽네. 아쉬워.”
최명성은 아직 몰랐다. 태현이 배장욱과 약속을 잡았다는 걸.
알게 된다면 펄쩍 뛸 것이 분명!
그러는 사이 태현은 기사들을 이끌고 버포드 성기사들이 있는 곳에 들이박고 있었다.
콰콰쾅!
“크아악!”
기사들의 돌격으로 인해 온갖 버프를 받은 상태.
거기에 행운의 일격까지 몇 겹으로 걸자, 태현의 공격력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해졌다.
신성 마법으로 무장한, 단단한 사디크 성기사들이 바로 썰려 나갈 정도!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막강한 괴력으로 적을 때려눕혔습니다. 힘이 1 오릅니다.]
퍽!
태현의 롱소드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사디크 성기사들은 쭉쭉 밀려 나갔다.
다른 기사들도 뒤지지 않았다. 출발하기 전 왕국군 소속 사제들에게 버프를 받고, 온갖 기사 스킬들을 스스로한테 건 상태였다.
레벨이 레벨인 만큼 무시무시한 위력!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디크의 시야 현혹!”
“사디크의 혼돈!”
사디크 사제들은 기사들에게 저주를 걸기 시작했다. 워낙 단단하게 뭉쳐서 사디크 성기사들을 썰고 다니니, 일단 저주를 걸어서 혼란에 빠뜨리려는 것이다.
혼란에 빠져서 이리저리 흩어지기만 해도 상대하기는 수월!
저주가 몇 겹이나 겹쳐지자, 저주를 맞은 기사들 몇몇이 혼란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태현이 외쳤다.
“모두 중심으로! 나를 따라와라! 못 따라오는 놈들은 처벌하겠다!”
[냉정한 지휘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가혹한 채찍질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중급 전술 스킬로 보너스를 받습니다. 뛰어난 지휘로 혼란 상태에 저항합니다.]
태현의 전술 스킬도 만만치 않은 상황! 덕분에 사디크 사제들의 저주는 실패해버렸다.
공을 들였던 저주까지 실패하자, 사디크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사디크 신이시여!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
“저 필멸자들에게 죽음을!”
그러거나 말거나 태현은 사디크 성기사들을 날려버리면서 버포드의 모습을 찾아 헤맸다.
‘어디냐?’
* * *
‘이건 무리야!’
버포드는 깨달았다.
여기서 계속 있으면 그냥 죽을 거라는 걸!
‘도망쳐야 해!’
사디크 교단에서 강제로 퀘스트를 주기는 했지만, 그걸 하다가 죽으면 오히려 손해였다.
일단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은 했으니, 이제 도망쳐야 했다. 나름 버텼으니 페널티는 좀 덜 받으리라.
버포드는 뒤로 도망치기 시작한 사디크 성기사들과 같이 도망치기 위해 뛰려고 했다.
그 순간 앞에 꽂히는 창!
콱!
“?!”
태현이 옆의 기사가 들고 있던 창을 뺏어서 던진 것이었다.
“그, 그건 제 창…….”
“시끄러.”
“옙.”
바로 겁을 먹은 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태현은 아주 아주 친절한 웃음을 얼굴에 띠며 버포드를 쳐다보았다.
“버포드지?”
“……?”
콱!
“으아악!”
버포드가 대답을 하지 않자 태현은 바로 기사가 들고 있던 다른 창을 뺏어서 던졌다. 버포드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버포드 맞아! 맞다고!”
파팍! 퍼퍼퍽!
-크악!
-도망쳐라! 도망쳐!
태현과 버포드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사이, 사디크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맞서 싸우는 걸 포기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버포드도 그걸 깨달았다.
‘나도 도망쳐야…….’
버포드가 눈치를 보며 시선을 돌리자, 태현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되지. 안 되지.”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이 분위기를 봐라. 설마 여기 있는 놈들이 네가 도망가는 걸 보고만 있을 거 같아?”
속마음을 들킨 버포드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구부렸던 등을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좋아. 협상하자.”
“뭐?”
“바로 공격하지 않고 이렇게 붙잡은 건 이유가 있겠지. 안 그래?”
“눈치가 없지는 않군. 맞췄어.”
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버포드는 속으로 안도했다.
다른 사디크 성기사들과 사제들과 버포드의 차이점은, NPC냐 플레이어냐였다.
당연히 버포드는 협상이 가능한 플레이어!
그렇기에 이렇게 붙잡아 놓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버포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놈이 뭘 원할까? 돈? 돈이면 줄 수 있는데…….’
사망 페널티를 피할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편이었다.
“내놔.”
“……뭘?”
“네가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거.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뭐라고?!”
버포드는 경악했다. 어떻게 저놈이 그걸 알고 있는 거지?!
버포드가 놀라서 태현을 노려봤지만, 태현은 심드렁했다.
“그거 원래 내 거거든?”
“무슨 소리! 그게 왜 네 거냐!”
“그래. 네가 훔쳤으니까 네 거라고 하고 싶겠지. 나도 판타지 온라인 1 때는 그런 소리 많이 하고 다녔어. ‘죽이고 뺏으면 내 거다!’ 참 편하지 않냐? 근데 지금 다른 건 뭐냐면, 넌 내 부하들한테 포위당해 있다는 거지. 뒤지기 싫으면 곱게 아이템 내놔라. 내가 원래 열이 받으면 사람을 복잡하고 다양하게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야. 관대하게 끝내줄 때 넘어가자.”
태현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게임에서 사람을 괴롭히는 것에는 도가 튼 게 바로 태현이었다.
죽은 사람 쫓아가서 다시 죽이기, 일부러 적을 위험한 지역으로 몰고 가서 부활하지도 못하게 만들기, 사냥하고 있는 적을 향해 온갖 몬스터 몰고 가기…….
‘적을 괴롭히는 101가지 방법’으로 책을 출판하라고 한다면 일주일 안에 출판할 수 있는 게 바로 태현!
그렇지만 오늘은 드물게 관대했다.
사디크 교단의 뒷길로 잠입해 교단의 비밀 신전 건물들을 날려버리고, 불의 마수의 완전한 부활도 막았고, 거기에 불의 마수까지 처치한 다음 이렇게 남은 사디크 교단의 잔당까지 처리한 것이다.
공적치로 따지면 이미 1등 확정이었다. 태현은 확신하고 있었다.
반지만 받으면 관대하게 살려줄 수도 있을 정도로 기분이 좋은 상황!
태현이 적에게 이런 자비를 베풀어주는 건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버포드는 눈치가 없었다. 아니, 알았더라도 그가 갖고 있는 걸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저, 절대 안 돼!”
“……그러면 죽으시던가.”
태현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